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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칼럼

[정음문화칼럼151] 산책자의 즐거움

  전월매(천진사범대학교)

2020년 06월 22일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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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가장 중요한 비평가로 손꼽히는 발터 벤야민은 자본주의에 물들기 시작한 19세기 빠리와 20세기초의 베를린을 배회하며 ‘산책자’라는 화두를 던졌다. 벤야민이 말하는 산책은 우리가 말하는 개념이 아니다. 이는 낯익은 것이 붕괴한 도시의 거리에서 군중의 팔꿈치에 떠밀리여 기꺼이 회상에 잠기는 일이다. 또한 새로운 경험을, 순간적으로 스쳐지나는 의미심장한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깨여있는 일이다. 도시산책은 근대에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해명의 물꼬를 열어주는 키워드였다.

조선은 근대이후 도시개념이 등장하였다. 20세기초, 조선작가들도 철도역이 서고 포장도로에 차가 달리며 병원이나 학교의 근대체재와 제도들이 들어서는 도시풍경을 산책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산책의 미학’으로 꼽히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다. 소설은 주인공 구보씨가 정오에 집을 나와 하루종일 식민지 경성(서울) 시내를 이리저리 배회하다 새벽 2시에 귀가하는 것이 전부다. 구보는 하루 동안 특별한 행동을 하지도 않고 남다른 사건을 경험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이동하는 장소와 만나는 사람들에 의해 촉발되는 상념들인 행복과 욕망과 고독과 불안과 초조와 기대가 펼쳐지며 과거회상과 함께 주인공의 산만하고 파편된 내면의식이 전면에 부각된다. 이러한 주인공을 우리는 ‘산책자’라 부른다.

산책자가 관찰한 도시 풍경과 거기에서 촉발된 주관적인 내면의식은 근대도시와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삶의 체현이자 작가의 사회현실에 대한 의식 반영이다. 도꾜 류학까지 다녀온 지식인이 실업자로 경성거리를 하루종일 헤매는 것은 당대 조선의 정치 경제적 상황과 련관지어 보면 단순한 소일거리로 해석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한편 식민지하에서 관료가 되는 것도 간접적이나마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동조하는 것이기에 의식 있는 지식인들에게는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산책은 일제의 왜곡된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소외된 지식인의 현실에 대한 반영이자 그러한 식민지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의 산물이라는 의식을 갖는다. 이렇게 보면 구보가 산책하는 도시 경성이야말로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글은 작가 박태원의 소설가로서의 자의식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행복을 추구하지만 결국 가난하고 고독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는 존재, 소설가로서 세속적 행복을 포기한 채, 고독하게 식민지 조선의 부정적 현실을 들여다보는 것, 소설가로서의 각오를 드러낸 자기반영적 소설이기도 하다.

그외에도 김광균의 <와사등>, 리상의 <날개>, <오감도>, 일련의 무의시 등을 비롯한 많은 작품들에서는 근대도시의 풍경을 통하여 근대인의 소외와 고독과 상실, 숨막히고 팍팍한 근대의 일상에서 도피하고 탈출하고자 하는 심경을 표현하였다. 현대로 와서 김연수의 리상문학상 수상작품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가지 즐거움>에서도 산책자의 즐거움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 속의 화자들은 모두 산책의 즐거움을 아는 인물들이다.

산책은 인간에게 최고의 유희이다. 산책자는 내가 속한 곳, 내가 살고 있는 곳의 풍경과 세상을 돌아보며 생각하고 사유하고 사색한 것을 글로 적어내는 것이다.

산책자의 시선은 공간적으로 도시, 농촌, 지역, 세계 모든 세상을 아우르고 시간적으로 고전, 근대, 현대, 당대를 넘나들며 나와 너, 그를 포함한 자아와 타인, 세상사람들의 다양한 삶과 경험들… 세상물정의 모든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욕망과 소외와 불안과 기억과 명예와 권력과 자살과 죽음 등의 세속의 리얼리티들이 들어있으며 로동과 인정과 분투와 성숙과 행복 등의 좋은 삶을 열망하기 위한 노력과 일상의 이야기들, 철학과 사상과 종교와 가치와 신념 등의 추상적이고 높은 경지의 정신적 세계들이 있다.

핵심은 산책자가 이러한 대상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사유하고 사색하며 글로 풀어내는가 하는 것이다.

생각하고 사유하고 사색한다는 것, 생각의 힘, 사색의 힘은 인간으로서의 특권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사색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인간의 실존적 의미를 사색과 련결시켰다. 쇼펜하우어는 <사색에 대하여>에서 “스스로 사색하여 얻은 진리는 산 수족과 같은 것으로 그것만이 정말로 우리 자신의 것이다. 스스로 사색하는 사람의 정신적 작품은 정확한 빛과 그림자의 배합, 부드러운 색채의 완전한 조화로 생생하게 약동하는 한장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보인다.”라고 함으로써 자신의 사상과 의식을 가질 것을 주장하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자아를 알면 세상 모든 일이 이미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되기에 자아를 아는 일은 진정 타인과 세상을 아는 일이다. 레브 똘스또이는 자아를 타자들 앞에 놓고 새롭게 인식하였으며 부단히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가는 노력을 경주할 때 비로소 사회를 위한 글이, 새로운 문학의 국면이 창조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외부적으로 보면 귀족의 신분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똘스또이는 그럴 필요도, 필연성도 없었지만 자아를 타자 세계에 비추어 성찰함으로써 그 당시 상식화되고 당연시되는 농노제도에 회의할 수 있었다. 그의 그러한 의식이 시간과 시험을 견딜 수 있는 <전쟁과 평화>, <부활>, <안나 까레니나>와 같은 명작들을 낳을 수 있었다.

산책자는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고, 인간세상에 대한 사랑을 안고 경쟁과 투쟁대신 상호부조와 련대를 가져야 한다고 문학거장들은 작품으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산책자의 사회의식은 조선의 선비정신과도 련결되여있다. 조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선비정신은 개인적 차원에서 도덕적 삶과 학문적 성취에 대한 결연한 의지와 행동으로 나타나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사회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구비하고 수준높은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면서도 이질적 존재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글로 풀어내는 일, 이는 글쓰는 이의 문체이자 풍격이다. 어떠한 글쓰기 기법이 좋은 것인지 레브 똘스또이, 체호브, 김유정 등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으로 증언하였다. 똘스또이는 문학은 고매한 리상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로씨야 농노의 오두막집의 벽을 뚫고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쉽게 씌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체호브는 대중이 리해할수 있을 만큼 쉽게 써야 한다고 하였고 김유정도 생생히 살아숨쉬는 순박한 언어와 뚝심있는 해학, 익살스러운 재치가 결합된 글을 통하여 증명하였다. 독자들에게 읽히는 글의 감염력에 의해 훌륭함이 결정되는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산책자, 자신을 돌아보고 타인과 세상을 만나며 그 속에서 자신과 타인과 세상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보듬어주고 치유하고자 하는 용기와 의지와 노력에 그 즐거움이 있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즐거움이 확산되여 합창이 될 때 상처받은 사회는 치유의 희망을 보게 되는 것이다.

2020년 6월 21일

래원: 인민넷-조문판(편집: 장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