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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칼럼

[정음문화칼럼152]전염병과 함께 발전해온 우리의 력사

최선향(장강사범학원)

2020년 07월 07일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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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8일, 전세계 신종코로나페염 루적 확진자가 1천만명을 돌파, 사망자는 50만명을 넘어섰다. 몇개월이면 끝날 줄 알았던 신종코로나페염 확산이 래년 봄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지구화로 하나가 된 지구촌에서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노마디즘적(미확정적)인 삶을 살아오던 많은 이들의 일상이 전염병으로 인해 많이 바뀌였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인적, 경제적 피해를 입게 되였다.

신종코로나페염을 겪으며 자연 전염병과 함께 해온 인류의 력사와 우리 조상들의 삶을 돌이켜 보게 된다. 력사를 돌아보면, 질병은 인류의 출현과 더불어 끊임없이 발생하였으며, 이를 치료하기 위한 인류의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여왔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만물이 력사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며 발전되여왔듯이 질병 역시 시대와 장소 등에 따라 변화,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질병 가운데서도 전염병은 전염성이 강해 사망자를 속출하는 등 인간의 정상적인 삶의 활동을 방해하였다. 14세기 중엽, 인류 력사상 가장 심한 질병으로 꼽히는 페스트(黑死病)가 류행할 당시 유럽에서는 사망자가 약 2500만명으로, 유럽 인구의 1/3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사회에서 전염병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아주 컸다. 전염병이 돌면, 한 집안이 공동화(空洞化)되는 것은 흔한 일이였으며, 가족 구성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병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경우가 많아 가정이 일시적으로 해체되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사》에 예종(睿宗)5년(1110년) 4월에 “‘금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시체와 해골이 길에 널렸으니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그것을 거두어 묻게 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 제의를 좇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시체와 해골이 길에 널렸다”는 표현은 전염병으로 길거리에서 죽었거나 전염되여 죽은 사람을 제때에 묻어주지 못했던 전염병의 참혹함을 보여준다.

고대사회에서 전염병은 한 집안과 마을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심한 경우 군현(郡县)에 타격을 주기도 했다. 조선왕조의 《세종실록》에 세종29년(1447년) 11월, 황해도에 번진 역병이 해주 지역의 인구수를 무려 1/5수준으로 전락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과장된 것일 수도 있으나 전염병이 해주지역에 준 타격은 아주 컸던 것으로 보인다.

가진 것 없는 일반백성들의 경우 전염병의 위험 앞에 적라라하게 로출되여있었다. 그러나 지배층이라고 해서 그것을 완전히 피해갈 수 있은 것은 아니였다. 학자들은 고려시대의 경종이나 예종, 인종 같은 국왕도 두창이나 홍역 같은 전염병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 왕실이나 고위관료들 역시 천연두(天花) 등 전염병에 걸렸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일기를 보면 전염병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매우 컸다. 전염병이 돌면 사대부들은 발병지역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일시적으로 거처를 옮기는 ‘피접(避接)’을 많이 행했다. 일반백성들이나 노비들은 전염병을 피해 객지를 떠도는 류이민이 되거나 혹은 전염병에 걸리면 초막이나 피병소(避病所) 등에 ‘격리’되였다.

전염병이 창궐하면 감염을 두려워해 시체를 집단적으로 방치하는 상황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지배층이 구축하고자 했던 유교적 인륜 질서를 무너뜨리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 2년(1496년)에 “전 판관(判官) 박소정의 온 집안이 온역(瘟疫)에 걸려 부처(夫妻) 및 딸이 일시에 모두 죽었는데 그 아들 박석, 박질, 박무 등이 소렴(小斂)한 뒤에 병을 피해 나가서 지금 세 달이 되도록 시체를 빈 집에 두고 오히려 렴빈(斂殯)하지 않았다 하옵니다. 이 일은 실로 풍교(風敎)에 관계되오니, 해사(該司)로 하여금 그 아들을 국문하여 치죄하소서.”라는 기록이 있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했던 조선시대에 사족 신분으로 부모의 시신을 세 달 동안 방치하고 형제들이 모두 피접을 갔다는 것은 유교적 륜리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였다. 그만큼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컸다는 이야기다.

1821년, 조선에 콜레라(霍乱)가 최초로 발병한 이후 거의 3~4년 간격으로 류행하였는데 한꺼번에 전체 인구의 5% 이상이 사망할 정도였다. 콜레라가 만연하였던 조선시대의 상황을 살펴보면, 1886년도 서울에 대한 미국의 선교사이며 의사였던 알렌의 보고서에 따르면, 특히 가난하고 잘 먹지 못하고, 바깥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주로 병에 걸렸고, 대체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였다 한다.

전염병은 전염성과 집단적 류행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므로 소수 의사들의 노력만으로는 통제하기 어렵다. 중국 력사상 막대한 손실을 초래한 3대 전염병의 대류행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전기, 원조(元朝), 청조(淸朝) 시기에 있었다. 그러나 명조는 정부가 시체와 유골을 매장하고, 방(坊)을 설치하여 격리시키고, 관리를 파견해서 시찰하며 약을 나누어주고, 조세의 감면과 관을 하사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 데서 전염병의 류행 빈도수가 많이 줄었고 류행하는 범위도 축소되였다고 한다.

인류 력사의 흐름을 보면 전염병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 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사회에 많은 피해와 혼란을 초래하였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진정되거나 소리 없이 사라졌다. 또한 일부 전염병은 변종을 거듭하며 극성기와 소강기를 반복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전 인구를 대상으로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하였던 전염병 가운데서 일부는 시간이 지나면 면역력을 갖추지 못한 어린아이들이 주로 감염되는 소아병으로 정착하였다. 례컨대 유럽에서 천연두와 홍역은 16세기 이후 소아병으로 뿌리를 내렸다.

질병이 발생하고 전염되는 데는 세균, 바이러스라는 자연적인 원인도 있지만, 병균을 전염시키고, 증식시키는 사회적 요인도 소홀히 할 수 없다. 한 시대의 류행 질병을 연구하다 보면 기후변화, 전쟁, 국제관계와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 구조 및 변동 등과 련결되여 그 시대의 전체적인 사회상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인류의 력사는 전염병과 같은 우발적인 요소들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수많은 굴곡을 겪으면서 발전해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는 과거 그 어느 시기보다도 물질적으로 풍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지만, 인류가 질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영국의 력사가 토인비는 그의 저서 《력사의 연구》에서 인류의 력사를 ‘도전과 응전’의 법칙으로 설명했다.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인류의 성공적 응전이 인류의 문명과 력사를 발전시키는 바탕이 된다고 보았다. 그러고 보면 전염병은 많은 사망자와 사회적 불안, 공포를 야기하고 인간관계를 단절시키는 파괴적인 질병으로, 자연이 인류에게 던진 크나큰 도전이다. 그러한 도전 앞에 인류는 기존의 사회적 관계와 세계관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새롭게 재구성하는 ‘대응’과 응전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련마하며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한, 그리고 잘 살아가기 위한 노력으로 지금까지 문명의 꽃을 피워왔다.

근대 과학혁명 이후 과학이 발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모든 문제가 과학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는 과학만능주의 의식을 가지게 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류는 우주관광시대의 서막을 열었고 민간인들까지 우주려행을 떠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신종코로나페염은 과학만능주의에 젖어있던 이들에게 과학의 한계와 자연 앞에 겸허하지 못한 인간의 교만함을 깨우치게 해준다. 신종코로나페염을 겪으며 인류는 아프고 힘들지만, 현대 과학과 현존의 생활방식, 가치관 등에 대한 자아성찰을 거쳐 또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보여주리라 믿는다. 지금까지 전염병과 공존하며 발전해온 우리의 력사와 같이…

래원: 인민넷-조문판(편집: 임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