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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칼럼

[정음문화칼럼178] 말 많은 요즘 우리네 부조이야기

리화

2021년 10월 11일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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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사에 금전이나 물품 혹은 로동력을 주고받는 것은 거의 모든 민족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인류 공통의 문화현상이다. 가까운 한국이나 일본은 물론 우리와 멀리 떨어진 미국이나 영국 심지어 아프리카의 나라들에서도 혼인을 하거나 사람이 사망했을 때는 나름대로의 의례와 연회를 차려 손님을 치를 것이고 그 곳의 하객이나 조문객 역시 이런저런 인연에 끌려 무엇인가를 들고 가거나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참석을 할 것이다.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경조사에 무작정 올 만큼 싱거운 사람은 드물며 거기에 아무런 성의표시 없이 식사 한끼 해결하고 가버리는 몰렴치한 이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사람 사는 게 거기서 거기"라는 말이 괜히 나왔을가.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부모형제로부터 생면부지의 타인에 이르기까지 복잡다단한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를 정서적으로 이어주는 중요한 뉴대의 하나가 바로 여러 류형의 주고받음이라 할 수 있겠다. 례를 들어 주위에 경조사가 있을 때 진심으로 축하, 위안해주고 관계의 깊이 만큼 성의를 표시하며 반대로 자신이 비슷한 일을 겪었을 때 상대로부터 그러한 물질적 보상과 정신적 지지를 다시 돌려받는 호혜성의 원리가 바로 그런 것.

"꼭 가야 하는 장소이기에", "우리 사이에 이 만큼은 줘야".

안 가고, 안 주고 안 갚으면 어떨가. 자칫 길에서 마주쳐도 껄끄러울 것이고 추후 내 경조사에 그 사람을 부르기도 애매해질 것이며 더 심하면 영원히 등을 돌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인맥관계에 매끄럽지 못한 응어리가 생성되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도덕적 비난이나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다. 우리가 보통 그런 사람을 일컬어 "해박하지 못하다" 하고 한족들이 "인정세태(人情世故)를 모른다" 고 하며 일본인들이 "의리(義理)를 지키지 않는다" 고 하는 것처럼.

즉 다시 말해서 프랑스 인류학자 모스(Mauss,1925)의 주장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주고’(giving), ‘받고’(receiving), ‘갚는’(repaying) 의무의 순환 속에서 주변 사람들과 감정을 나누며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경조사를 톨해 주고받는 것은 단순 물질이 아닌 소중한 마음과 인격의 징표인 것이며 이 또한 영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시장교환과의 차이성이기도 하다. 모스가 'hau'(선물에 내포된 원시부족인의 령혼)라 칭하고 중국어에서 '随礼', 우리말에서 '부조'(扶助)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그 문화적 가치를 강조하듯이 말이다.

다만 어떤 경조사에 누가, 무엇을, 얼마, 어떻게 주는가는 사회적 맥락과 문화적 규범에 따라 부동하다.

우리 민족의 경우 경조사에 쌀과 음식, 술, 옷감 같은 물품을 보내거나 일손을 돕는 등 방식으로 서로를 챙기는 '부조'의 오랜 전통이 있다. 서로 의지하고 돕는 ‘상부상조’에서 유래한 부조문화에는 소박하지만 진실된 나눔의 미덕과 정의 의미가 담겨있으며 '두레', '품앗이', '계' 등 기타 공동체문화와 더불어 자랑스러운 우리네 미풍량속이기도 했다. 대단한 재물이 아니여도 감사하게 받았고 어려운 형편에 서로 도움을 주고 같이 웃고 울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했다. 그 옛날 물이 귀했던 제주에서는 경조사에 물을 길어다주는 것으로 부조를 하는 '물부조'도 있었고 동네 아낙들이 쌀 한말씩 건네는 '쌀부조'도 있었다고 한다. 불과 몇십년전 우리도 결혼식에 돈을 모아 '꽃소래'를 부조하고 도시의 친척 잔치집에 쌀주머니를 이고 다녔던 때가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순수하고 아름답던 우리네 부조문화가 마음의 차원을 넘어 돈에 집착하는 '부담거리문화'로 변해버렸다. "이번 달에는 부조가 얼마얼마 나가서", "쓸데없는 부조가 너무 많아"… 일년에 꼭 몇번씩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도 안 먹는다는 체면" 때문에 부조금을 건네야 하는 우리네 현실.

부조의 명목 또한 많이 번다해진 요즘이다. 결혼, 돌잔치, 회갑, 장례 등 기존의 경조사에 더해서 출산, 생일, 대학입학, 집들이, 개업, 병문안… 게다가 뭐든 다 돈이다. 돈으로만 성의가 인정받는 암묵적인 룰, 유난히 '통'이 커서 같은 민족인 한국사람들마저도 혀를 끌끌 차는 우리네 '부조시장가', 돈을 따지는 게 마냥 "째째하고 부끄러운" 우리네 체면, 그래서 제법 호기로운 씀씀이들. 따지고 보면 옛날처럼 먹을 것, 입을 것이 부족해서 경조사를 치르지 못하는 게 아니다. 도를 넘는 과소비가 '풍요 속의 빈곤'을 불러왔고 허레허식/체면치레가 문제다. 그래서 수시로 날아드는 청첩장에 허리가 휠 지경이다. 아이를 낳으면 계란 몇근, 홍탕 한봉지, 애기옷 한견지 들고 가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주고 집앞 마당 빨래줄에 부조로 들어온 이불、옷감을 걸어놓고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덩실덩실 잔치를 벌였던 회갑연은 다 지나간 옛 이야기.

청첩장 또한 갈수록 가관이다. 직접 찾아와서 성의껏 초대하는 경우가 점점 줄어들더니 급기야는 앞뒤 인사말 다 자르고 마지막 화면에 송금기능을 덧붙인 모바일 청첩장까지 등장, 그런 생뚱맞은 청첩장을 받을 때의 황당함이란.

다른 한편으로 우리네 경조사 부조는 즉시적인 갚음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특징적이다. 즉 오늘 부조한 금액은 후일 같은 류형의 경조사가 있을 때 돌려받으면 되는 것이며 그 때에야 비로소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 사이의 '주고-받고-갚는' 사회적 교환관계가 완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부조를 "다 빚이지" 하면서 언젠가는 받은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갚아줘야 하는 호혜성의 원칙을 고수하며 살아왔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부조고리에 너무나 많은 변수가 존재함으로써 예전과 같은 원만한 마무리가 어렵게 됐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싶이 현재 우리 민족의 반에 가까운 인구가 장기적으로 해외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중 대부분은 국내에 남아 있는 친척친구의 경조사에 참여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친척친구들 자녀의 결혼식 혹은 부모님의 회갑이나 장례에 참석해야 할 상황에 가끔씩 부딪치게 된다. 특히 몇년동안 련락이 없다가 불쑥 나타나서는 경조사에 초대하고 또 훌쩍 떠나버리는 일부 사람들,

그런가 하면 비혼, 만혼, 비출산 등 시대적 변화에 따라 부조만 하고 그 부조에 대한 회수가 적거나 못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으며 특히 회갑을 비롯한 수연례 자체를 아예 생략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우와 같은 여러가지 변수를 고려했을 때 자신의 욕심만을 고집하는 일부 사람들의 무차별한 청첩장 람발은 참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받은 것도, 받을 것도 없는데", 솔직히 사람이기에 서운하고 괘씸한 생각이 들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초대를 받은 이상 모른체할 수도 없는 현실. 그래서 또 련쇄반응처럼 "이제까지 부조한 게 얼만데" 하면서 퇴직전에 자녀들의 결혼을 서두르는/재촉하는 사람들…

부조는 사회적 의무이며 약속이다. 호혜성의 균형을 잃은 교환은 인간관계에 불협화음을 불러오기 일쑤이고 자칫 잘못 처사하면 관계의 단절을 초래하기도 한다. 꼭 문전성시를 이루어야 만이 내 면목이 서는 게 아니다. 부담스러운, 내키지 않는 부조금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정성이 담겨있을 리 만무하다. 꼭 함께 해야 할 사람만 부르고 소박하지만 진정성 있고 따뜻한 경조사를 치르자. 초대받은 사람 역시 적정선에서 무난한 금액을 부조함으로써 추후 상대방이 갚아야 할 '빚'의 무게를 덜어주고 조화롭고 합리한 부조의 순환고리를 만들어가자. 돈보다 정을 나누는 우리네 부조문화의 아름다운 전통을 되살리자.

몇년전 모든 하객들의 부조를 백원으로 선 긋고 그 이상의 금액에 대해서는 일절 사양했던 선배교수님의 회갑연이 무척 인상에 남는다.

말도 많은 요즘 우리네 부조이야기, 이제 그 어떤 거창한 호소보다는 '나'부터 의식을 개변하고 주위에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는 것으로 그 레퍼토리를 바꿔보면 어떨가.

래원: 인민넷-조문판(편집: 김홍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