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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칼럼

‘소힘줄 언니’의 칠전팔기 집념

2021년 11월 25일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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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전 400원을 꾸어 시작한 보따리장사로부터 지난해에 600만원의 년간매출액을 올리기까지 매하구시만보성식품유한회사 리희복(50세, 조선족) 리사장의 창업이야기는 파란만장했다.

소힘줄, 명태반찬으로 성공가도를 달려온 것도 모자라 이제는 배추김치를 비롯한 조선족밑반찬을 만드는 법까지 배우러 매하구에서 직접 연길을 찾은 리희복, 리금륭 모자를 21일에 만났다.

식당종업원이였던 리희복씨는 당시 소힘줄반찬 장사를 해보지 않겠냐는 고객들의 제안으로 1994년부터 매하구와 연길을 오가면서 소힘줄반찬 도매장사를 하다가 1998년에 명태반찬을 생산하는 식품가공부를 앉히게 됐다.

“반찬을 만들다 지쳐서 그대로 누우면 그곳이 바로 침대가 되였죠.” 35평방메터의 친정부모집에서 먹고 자고 반찬을 만들며 판매했으니 가정식 공방과 다름없었다고 리희복씨는 지난날을 돌이켜봤다. 주문이 많을 때에는 친정부모와 남편까지 넷이서 ‘교대근무’를 해가며 새벽 4시까지 밤샘작업을 해야 했단다.

2000년대에 들어설 쯤 리희복씨는 60평방메터나 되는 가게 두 곳을 더 차리게 되고 2, 3명씩 일군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그무렵 그녀의 주변에는 아빠트로 이사를 가는 이들이 많아졌다. “우리도 언제 쯤이면 자기의 집에서 살 수 있을가?”고 종알대는 어린 아들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리희복씨는 2005년에 드디여 260평방메터에 달하는 주택을 구입하게 됐다. 그러나 집을 장만하고 나서 그녀는 고비를 겪게 됐다.

“고추장을 만드는 법까지 전수하고는 저를 알아보지 못하시더라구요.” 친정어머니의 건강상황이 좋지 못했던 것이였다. 2007년에 안타깝게 어머니를 떠나보낸 뒤 리희복씨는 좌절감에 사업을 접으려고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다년간 친자매처럼 지내온 지인이 다가왔다. 연길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던 지인은 리희복씨에게 소힘줄반찬 제작비법을 전수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리희복씨가 한동안 주저하는 마음을 내비치자 그는 어느 날 식재료와 설비들을 싣고 매하구로 찾아와 사흘간 곁에 머무르면서 직접 비법을 전수해주었다. 지인의 남다른 정성과 가게에서 주문전화를 받으랴 거스름돈을 정리하랴 분주하게 움직이는 아버지를 보고 리희복씨는 결국 재기를 결심하게 됐다.

리희복씨의 식품가공공장은 2015년에 식품유한회사로 승격하게 됐다. 회사의 경영은 쉽지 않았다. 전보다 운영비용이 10배로 늘어난 반면 매출액은 제자리걸음이였으니 말이다. 돈을 꿔가며 일군들의 월급을 결제해주는 등 회사는 도산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다.

“마치 수렁에 빠졌는데 아무도 저를 구할 수 없는 듯한 기분이였습니다.” 리희복씨는 당시의 무기력함을 이같이 비유했다. 바삐 돌아칠 때는 그나마 힘든 것을 잊다가도 잠시라도 숨돌릴 틈이 생기면 곧바로 눈물이 나군 했단다.

한편 절망 속에서도 리희복씨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15그람의 규격에 판매단가가 1원인 소힘줄반찬과 3원 50전인 명태반찬만 생산, 판매해오던 데로부터 2017년부터는 이 두가지 반찬과 관련된 상품규격 및 조리법을 증가했다. 아울러 언변에 능치 못했던 그녀는 화술공부에도 매진하면서 기업가들을 상대로 한 모임에 적극 참가하는 등 인맥을 폭 넓혀갔다.

이렇듯 조금씩 수렁을 헤쳐가던 중 2019년 6월에 회사의 생산작업장에 화재가 발생하게 됐다. 올리뛰고 내리뛰며 바삐 돌아치는 일군들을 보면서 당시 리희복씨는 다친 사람이 없었던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 오히려 심리적으로는 평온했단다.

리희복씨의 인생그라프는 다시 상승선을 긋게 된다. 그해 회사에서는 500만원의 년간매출액을, 이듬해에는 600만원을 창출했다. 끈질긴 성격, 이른바 ‘오뚜기 정신’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올 수 있었다고 그녀는 피력했다.

“장차 배추김치를 비롯한 조선족밑반찬 생산과 판매에로 업무를 확장할 계획입니다.” 리희복씨가 아들 리금륭씨와 함께 연길로 견학을 온 까닭을 터놓았다.

1994년에 갓 돌이 지난 리금륭씨를 등에 업은 채 보따리장사를 뛰기 시작한 리희복씨, 2013년 9월에는 자신의 힘으로 아들을 미국류학을 보내기까지 했다. 경영학 학업을 마치고 2018년 12월에 귀향한 리금륭씨, 회사 경영을 둘러싸고 어머니와 가끔 의견 충돌도 있지만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이들 모자의 모습은 어쩐지 든든해보였다.

래원: 연변일보(편집: 임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