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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지구의 《연변마을》― 연화조선족향의 어제와 오늘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 연변TV 길림신문 공동취재팀
2007년 11월 29일 11:16 【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60년전인 1947년과 1948년 겨울, 우리 나라 해방전쟁의 가장 긴요했던 시기에 당시 연길현과 화룡현의 734세대 조선족농민들은 당과 정부의 부름에 응해 송눈평원 검은 땅 한자락에 이사해왔다.

고향을 잊지 못한 이곳 사람들은 연길현(지금 룡정시)의 《연》자와 화룡현의 《화》자를 따 연화(延和)라고 이름을 달았다.

연화조선족향. 면적 20여평방킬로메터, 그중 경작지 면적은 500헥타르인데 전부가 수전. 3개 행정촌에 9개 자연툰, 11개 촌민소조 554세대 농호에 2540명인구, 그중 조선족이 95%.

*** 이 민 ***

이민 1세대인 연화향 박철(78세)농민, 자신들이 처음으로 내렸던 흑룡강성 오상시 안가역 플래트홈에서 추억에 잠기고있다.

1948년 음력설이 갓 지난 어느 추운 겨울날, 전쟁의 여운이 아직도사리고있는 동북평원에서 기차가 달리고있다. 차바곤마다 흰옷 입은 사람들과 물함박, 오지단지, 함지, 이불, 궤, 가장기물들로 꼴똑 꼴똑 차 있다.

차바곤 틈새로 찬바람이 들어오건만 사람들 얼굴마다엔 희망이 서려있다. 이들은 한창 검은 땅이 끝없이 펼쳐진 곳으로 새로운 생활을 찾아가고있었다.

유수시에서 동북쪽으로 나가면 흑룡강성 오상시 경계와 마주한 곳에 나림하라는 강이 흐른다. 1945년이전, 이 강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은 그 곳에서 수전농사를 지어 흑룡강지역 관동군 량식기지로 했다.

그러다가 일본이 투항하면서 수전농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이 곳의 논들은 황페해지기 시작했다.

이 수전들을 다시 부치기 위해 새로 성립된 정부는 수전농사를 잘 하기로 이름난 조선족들을 이곳에 이민시키기로 했다. 하여 연길현과 화룡현의 700여세대 농민들이 이렇게 여러 패로 나뉘여 기차를 타고 이 곳으로 향하고있었다.

차바곤안에서 누군가 일여덜살 돼 보이는 소년을 보고 노래하라고 부탁한다. 뭇 사람들의 요청에 못이기는척 소년은 작은 복판에 서서 목청을 뽑는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그루 토끼 한마리
돗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어스름녘에 작은 역(지금의 흑룡강성 오상시 안가역)에 도착한 기차는 꿀꺽꿀꺽 사람과 가장집물들을 토해낸다.

지휘자는 이 곳에서 하루 묵고 래일 다시 이동한단다. 말이 역이지 허허벌판에 역참건물 하나만 달랑 있을뿐이다.

모두들 그래도 말만 잘 들었다. 땅에 덮인 눈을 치워내고 가져온 이불을 깔고 잔다. 아직 희망이 있었기에 이만한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서였을가?

아침 정부에서 보낸 말파리들이 줄을 지어 왔다. 사람과 가장집물들이 모두 말파리에 올려졌다.

살을 에이는 칼바람이 불었다. 이불 한채를 뒤집어 써도 덜덜 떨렸다. 뒤길은 없었다. 끝까지 앞으로 나가야만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설원을 가르며 수십대의 말파리들이 렬을 지어 달린다. 700여호 농민들의 희망을 싣고.

말파리 대렬이 멈춰섰다. 목적지에 도착했단다. 추위를 막으려 뒤집어썼던 이불을 헤치고 내다보니 역시 허허벌판이다.

지휘자의 말에 따르면 이곳이 그들이 살아갈 곳인데 지금 잠시 집이 없으므로 화신이라는 한족마을에 가서 한세대를 단위로 끼워살라고 한다.

떠나 올 때 들은것은 이곳에 벽돌기와집을 지어놓고 기다리니 가마만 걸면 살수 있다고 하던데... 세워졌다던 벽돌집은 어디 가고 한족집에 가서 끼살이를 하라고?

억이 막혔지만 드넓게 펼쳐진 땅을 보며 가을의 벼수확을 생각하며 참았다.

이들은 그해 정월 대보름을 이곳 한족마을에서 보냈다...

이상은 연화향 리달순(68세) 씨의 회억이다.

기차에서 동요 《반달》을 부르던 꼬마가 바로 리달순로인이다.

*** 개 척 ***

봄, 희망의 계절이다. 눈이 녹으면서 검은 땅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700여호 조선족농민들은 하나같이 억척스레 일했다.

땅을 번지고 물길을 내고 한삽 한삽 논을 일구기 시작했다. 형편이 괜찮은 집에서는 소를 사서 밭을 일군다. 정부에서도 뜨락또르를 보내 수전일구기를 돕는다.

하지만 타민족 마을에서 사노니 말도 통하지 않고 습관도 같지 않아 말썽도 많았다. 그래서 고향 연변으로 되돌아간 사람도 많았단다.

(*1958년에는 조선복구건설을 지원하라는 당의 부름을 받고 200여호가 조선으로 나갔음)

연화향 이화툰 관칠운촌민(61세)은 이렇게 말한다.

《연변으로 다시 이사나간 사람들은 그래도 형편이 괜찮은 사람들이였습니다. 이사갈 돈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였죠...》

고향으로 돌아갈 로자가 없는 대부분 농민들은 눌러 살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한족마을을 떠나 자기 밭과 가까운 곳에 원래 연변에서 한마을에 있었던 사람들을 단위로 부락이 형성하기 시작했다.

말이 부락이지 집이란 그냥 움막에 불과했다. 5,6평방메터 남짓한 곳에 3세대가 살았으니 집이란것은 그냥 자는 기능밖에 못했다.

후에 정부에서 집짓는데 필요한 재목들을 지원해 기능을 제대로 갖춘 집들이 하나둘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루어진것이 지금의 세 개 자연툰이다.

이민하여 온 사람들은 봄, 여름 부지런히 이 검은땅에 땀방울을 뿌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수전농사를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해오던 나림하가 이들의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첫해 여름에 나림하는 조선족 농민들이 심은 잘 여물어 가는 벼들을 다 밀어가 버렸다. 벼농사가 결단났다. 먹을것이 없었다.

다행히 당과 정부에서 이 낯선 땅에 온 사람들에게 구제량을 내주어 겨울을 무사히 나게 했다.

나림하는 다 지어놓은 농사를 망칠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생명도 위협했다. 물을 다스려야 했다.

몇년동안 물길을 바꾸는 이런저런 방법을 대도 소용이 없었다. 뚝을 쌓아야 한다. 이번엔 정부에서 나섰다. 때는 1958년, 정부의 부름을 받고 유수인민들이 나림하 강반에 와서 제방쌓기에 달라붙었다.

성인남성은 물론 부녀, 학생까지도 동원되였다. 가마니며 소래며 삽이며에 흙을 퍼서 올리며 장장 몇년간 물과의 전역을 벌였다. 그리하여 오래동안 이곳 사람들을 괴롭히던 나림하는 잘 길들여졌다.

연화향 이화툰 관칠운촌민(61세)은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때 이곳에 유수현 사람들이 한벌 덮히다싶이 했습니다. 한족들이 이곳에 와서 집을 잡고 살면서 제방뚝을 쌓았습니다. 고생많았지요.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홍수피해는 모르고 살고있습니다》

*** 학 교 ***

연화학교 학생들, 지금 이 학교에서는 50여명 학생들이 남아 우리 말로 공부를 하고 생활하고있다.

연화향 중심지역에 들어서면 가장 눈에 뜨이는 건물은 3층으로 된 학교건물이다.

이 학교의 력사를 살펴보느라면 역시 《소팔아 공부시킨다》는 우리민족이구나를 실감할수 있었다.

이 학교는 1948년도에 설립되였다. 그러니까 이민한 그 첫해에 벌써 학교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자기네들이 들 집은 없어도 먼저 학교부터 지은것이다.

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자라서 또 이 학교에서 38년간 교편을 잡아온 리달순씨는 학교력사를 말하며 감회에 젖는다.

《이 학교는 처음에 그냥 초가집이였습니다. 초가집을 짓는것이지만도 온 연화사람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동원되여 지었습니다 이 학교를 보면 진짜로 우리 민족은 소팔아 자식공부시킨다는 우수한 민족이라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처음에 초가집 빈 바닥에 초짚을 펴고 앉아 모래판에 글자를 쓰며 배웠죠. 연필이라는건 상상도 못했죠. 하지만 학생들 모두가 매우 진지하고 열심히 배웠습니다》

이 학교 전영춘부교장은 이렇게 학교의 번영했던 력사를 되새긴다.

《이전에는 교원들을 보면 기본상 연변사범이나 길림사범을 나온 선생님들이였기에 교원자질이 아주 좋았고 학생들도 지식접수가 아주 빨랐으며 학교도 아주 번영했습니다. 학생들이 많아 6.1절이거나 9.3이면 문체오락활동도 하면서 아주 재미있게 생활했습니다》

고향 연변을 잊지 못한 이 곳 사람들은 9.3 명절이나 8.15로인절을 연변처럼 쇠였다. 출국바람이 불기전까지만 해도 9월 3일이면 명절 옷차림을 한 연화사람들이 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여러 가지 활동을 벌이면서 명절을 보냈다고 한다.

지금 이 학교에서는 근 50명의 학생들이 소학교와 중학교 과정을 공부하고있다.

《학교가 살아야 민족향이 산다》는게 연화향 지도부의 공동한 인식이였다.

학생수는 가엾을 정도로 적었지만 향지도부에서는 학교교육사업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원래의 초가집에서부터 1980년에 벽돌집을 새로 지었고 3층짜리 교수청사는 2002년도 향정부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건설하게 되였다.

《새 학교는 우리 향 지도부에서 지어준겁니다. 향지도부 성원들이 유수시와 장춘시 정부를 찾아다니며 자금을 쟁취해왔기에 이렇게 덩실한 학교도 지었고 우리 애들이 아직도 우리 말로 공부를 할수 있게 되였습니다》 연화향 박철로인(78세)은 향지도부의 소행에 너무너무 고마워하고있었다.

고표준의 컴퓨터실까지 갖추고 있는 이 학교의 조선족아이들은 유치원교육, 소학교와 중학교교육을 전부 우리 말로 받고있다.

학교를 취재하던 우리 취재팀이문득 유치원반에 들어섰을 때 노래공부가 한창이였다. 우연이랄가? 때마침 이 아이들도 《반달》노래를 배우고있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그루 토끼 한마리...》
우리 취재팀의 마음도 뭉클해났다.

*** 웅 심 ***

2006년 연화향의 총 생산액은 2266만원에 도달했고 촌민들의 인구당 수입은 5900원에 이르렀다.

인문우세와 정책우세를 리용한 로무경제도 급속한 성장을 가져왔는바 로무송출인원은 1050명으로서 그중 출국로무송출인원은 350명에 달한다.

향촌민들의 저축액은 2천만원에 달해 호당 저축액이 2만원인셈이다. 2003년에 이미 촌마다 포장도로가 들어섰고 집집마다 유선텔레비죤과 전화가 있다.

연화향이 이토록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데는 당위서기인 리장수를 비롯한 지도부의 로고와 갈라놓을수 없다.

《촌민들의 인구당수입을 높여 연화향의 교육, 문화, 위생, 경제 등 각 방면에서 현실에 부합되는, 장춘지구에서 보다 나아가 전 성에서 비교적 현실에 부합되는 새 농촌, 현실에 부합되는 민족향을, 남들이 봐도 연화향을 깨끗하고 물좋고 돈 잘 버는 그런 민족향으로 건설하려고 생각하고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리장수서기의 웅심이다.

탁자마다 약들로 가득한 리장수서기의 사무실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것은 유수시대상유치사업 특수공로상패였다.

리장수서기는 대상유치사업특수공로패를 받게 된 연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연화향은 솔직하게 말해 교통이 불편하여 누가 여기에 와서 공장을 꾸리려 해도 어렵다. 실제에 부합되지 않는다.

하여 유수시 개발구에 한국 대흥옷공장을 유치하여 복장공장을 꾸렸다. 1만평방메터의 땅에 공장을 세우고 돈을 벌면 리윤을 절반 나누기로 했다. 이 회사는 유수시에서 제일 처음으로 유치한 외자기업이다. 이를 고무 격려하기 위해 유수시는 사상 처음으로 되는 외자유치특수공헌상을 만들어 리장수서기한테 수여했다.

연화향에서는 자신의 실제상황으로부터 출발하여 대상유치사업을 벌여나가고있는데 거기에서 얻은 수입은 향의 각항 건설에 쓰인다고 한다. 이젠 통신, 위생, 신용사 등 기초시설들이 모두 갖추어져 촌민들의 생활에 큰 편리를 도모해주고 있다.

*** 대 계 ***

연화조선족향의 백년대계를 설계하는 리장수서기(가운데)가 물막이 시공현장에서 유수시 왕시비부시장(좌)에게 건설상황을 보고하고있다.

60년전 기승을 부리며 이 땅을 핥던 나림하는 언제부터인가 물이 적어졌다. 물이 많아도 문제, 적어도 문제였다. 봄이 되면 물이 없어서 사원들이 나와서 해마다 돈을 2―3십만원씩 내가지고 돌을 쌓고 물을 막아 그 물을 수전에 사용했다.

하늘만 믿고 비가 오면 살고 비가 안오면 뽐프로 물을 긷고 푸고... 농사에 영향이 아주 많았다. 생산비용을 줄여야 수입을 올릴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고 촌민들은 수십년동안 농사를 이렇게 지어왔다.

수십년동안 나림하를 정복하려했지만 누구나 못해낸 일을 리장수 서기가 하려고 나선것이다.

총 투자 1500만원. 한개 현시에서 봐도 어마어마한 자금을 리장수 서기가 홀로 길림성과 장춘시를 뛰여 다니며 자금을 쟁취해왔다.

연화향은 말할것도 없고 유수시에서 수리공사를 하는데 이렇게 큰 자금을 가져다 놓고 하는 공사로서는 제일 큰 공사였다. 유수시 2007년 12가지 큰 대사중의 하나이다.

나림하 강뚝막기수문공사를 맡은 전문가는 이렇게 긍정한다.

《이 언제공사를 진행하지 않으면 연화향과 부근 향들의 수전농사는 아무런 보장이 없다. 일단 가물기만 하면 물이 없기에 농민들은 아무런 방법이 없게 되는것이다. 때문에 이 공사는 아주 중요하고 그 경제적효과와 사회적효과가 크다.》

공사현장에서 우리 취재팀은 마침 공사건설시찰을 나온 유수시 왕시비부시장을 만날수 있었다. 기자들을 만나자 바람으로 연화조선족향의 사업과 리서기에 대해 말문을 터놓았다.

《이 공사를 완성하면 최저로 이곳 농민들의 농사를 보장할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물거나 홍수가 질 때 큰 문제입니다.》

《부근의 한족향의 촌민들도 연화향의 리서기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사를 벌이고있다니깐 량식과 닭을 리서기집에 가져가고 이름도 남기지 않고 떠난 일도 있습니다. 그들은 리서기한테 감사해 하고있습니다.》

《이는 참 좋은 민심공정으로서 시 당위와 정부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이 공정은 완전히 리서기가 개인노력으로 해온 결과인데 조직에서는 수리부문 등 부문들과 협상을 할 때 좀 방조를 했을뿐입니다. 이는 정부사업에도 실제로 아주 큰 방조를 준 셈입니다.》

연화향을 가장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겠다는 리장수서기의 웅심, 향의 조선족들뿐만 아니라 부근 한족들에게까지 백년대계를 건설해준 리장수서기를 비롯한 향지도부가 있기에 우리는 연화조선족향의 아름다운 미래를 그려볼수 있었다(리홍림 김철 최승호).

  래원: 길림신문 (편집: 김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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