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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땅 대신 천여컬레 이야기 남긴 조선족 “호메로스”
2008년 04월 22일 09:13 【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청명날 국화꽃을 안고 민간이야기대왕인 황구연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간밤에 소리없이 내린 눈이 비석대돌을 엷게 덮었고 온화한 느낌을 주는 묘지의 음지쪽에도 흰눈이 소담하게 덮여있었다. 묘소앞에 세워진 대리석비석에는 “민담구술가 황구연지묘”라는 묘지명이 씌여있다. 바로 이 묘지속에 우리 조선족의 “호메로스”로 불리우는, 중국 10대 이야기대왕의 한분인 저명한 민담구술가 황구연선생이 조용히 잠든지 20년이 넘는다.

황구연선생이 생전에 살았던 룡정시 팔도향 룡수평촌은 그림처럼 아름다운 고장이다. 북으로는 병풍산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동으로는 유구한 전설이 깃들어있는 삼형제산을 굽이돌아 구수하 맑은 물이 흐르고있다. 룡수평촌은 지금은 행정적으로 로동촌으로 돼있지만 촌민들과 린근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아래마을 룡수평”이라 부르며 마을입구에도 “하룡수평(下龙水坪)”이란 지명패쪽이 세워져있었다. 40여호가 살고있는 오붓한 마을은 말이 40여호이지 지금은 빈집이 많고 젊은이와 녀성들이 돈 벌러 외국으로 나갔거나 외지로 나가 마을은 예전에 비해 많이 조용하고 한산하다고 한다.

◎ 신동 황구연

1909년 2월 27일 조선 경기도 양주군의 한 선비의 가정에서 태여난 황구연선생은 리조초기 이름난 정승이였던 황희정승의 22대손이라고 한다. 그는 다섯살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슬하에서 천자문을 배웠는데 그때 벌써 어쩌면 그의 총명과 뛰여난 이야기재주가 싹트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황구연이 다섯살때 한번은 할아버지가 손자의 손을 잡고 마을앞 논뚝길을 걸어가는데 인기척에 개구리들이 놀라 논판으로 뛰여드는것을 목격하였다. 할아버지가 “얘, 구연아, 저 개구리들이 네가 무서워 도망치는구나”고 하자 황구연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아니예요. 발가벗은 개구리들이 부끄러워서 물속에 숨는거예요.” 하고는 깔깔 웃었다. 손자의 엉뚱한 대답에 할아버지는 이번에 “옳거니, 헌데 저 하늘에서 종다리는 저렇게 울어도 눈물이 보이지 않고 들판에 활짝 핀 꽃들은 웃어도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웬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황구연 왈 “종다리는 우는게 아니구요, 신나서 노래부르니 눈물이 있을리 없구요. 미녀의 웃음이란 대소가 아니라 미소이니 어찌 소리가 있겠사옵니까?”

일곱살부터 서당에서 《론어》,《맹자》, 《춘추》 등 한학을 익힌 황구연은 당시 서당 훈장이였던 리련선생으로부터 많은 민담과 설화들을 전해들었다. 학식이 깊고 명성이 높은 리련선생은 력대 명인이야기, 력사이야기, 신화, 전설은 물론 중국의 《사서》, 《삼경》까지 구수하게 강의하였다고 한다. 리련선생의 이같은 옛말전수가 후날 황구연으로 하여금 “민간이야기대왕” 으로 거듭날수 있는 밑거름이 되였던것이다.

중학교때 학생운동을 지지한 연고로 퇴학을 맞고 서울중등농업학교에 입학한 황구연은 그후 중국 룡정으로 건너와 룡정측량학교와 룡정경찰학교를 졸업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풍부한 경력을 쌓았다. 룡정에서 3개월간 경찰로 일한 그는 화룡 투도파출소 소장으로 부임하는 길에 임명장을 찢어던지고 조선으로 나갔으나 체포령이 내려 다시 중국 흑룡강성 동경성과 길림 사평지구에 피신하였다. 그곳에서 농업기술자로 일하다가 해방이 되자 다시 룡정시 팔도향 룡수평에 돌아와 농사를 지으면서 당시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이였던 주덕해의 농업고문으로, 토지개혁때에는 측량을 책임지고 토지를 분배하기도 하였다.

◎ 옛말대왕 황구연

어쩔수 없이 피신하여 떠돌이생활을 하는 과정에 황구연은 여러 지방에서 류전되고있는 민간이야기들을 듣게 되였고 그는 그 이야기들을 다시 자기의것으로 만들어 더욱 생동하게 구연하는 예술적재능도 갖고있었다.

중학교와 대학교에서 황구연을 력사교원, 농업교원으로 초빙했으나, 마다하고 1987년 12월 15일 타계할 때까지 평생 농촌에서 농사일을 해온 그는 동네에 나가면 곧잘 이야기판을 벌렸는데 사람들은 그의 구수한 옛말에 매료되여 날 새는줄 몰랐고 린근 동네에서까지도 그를 “옛말대왕”, “황대포” 라고 친절하게 불렀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아마 우리 시아버님 옛말을 안 들어본 사람이 없을겁니다.”

처녀시절 한마을에 살았던 둘째며느리 리영순(72살)은 아직도 시아버님의 구수한 옛말이 귀전에 익숙한듯하다. 그런데 황구연로인은 “문화대혁명”때 잡귀신으로 몰리여 투쟁을 받은 이후론 아예 옛말을 입밖에 내지 않고있었다.

황구연선생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김재권선생이다. 지난 세기 50년대부터 민간문예유산을 수집해온 김재권선생은 1980년대초까지 아직 연변에서 대량의 민간이야기를 보유한 “옛말군”을 발견하지 못해 무척 안타깝고 초조하였다. 그러던중 1983년 7월 룡정시 팔도에 살고있는 친척으로부터 팔도진 룡수평에 옛말을 잘하는 로인이 살고있다는 말을 듣고 한달음에 그 로인한테 달려갔다. 그 로인이 바로 황구연로인이였다.

당시 연변민간문예가협회 부주석겸 룡정시문련 주석으로 사업하던 김재권선생님을 비롯한 수집조일행은 밤새 뜬눈으로 지새우며 어떻게 하면 황구연로인의 이야기끈을 풀수 있을가 고민했다.

이튿날 황로인을 찾아뵌 김재권선생님은 우리 민족 후대들에게 우리력사를 가르치고싶지만 마땅한 력사책이 없고 력사지식이 옅어 황로인한테 가르침을 바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는 단지 개인이나 선생님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200만 우리 겨레들을 위해서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여러차례 설복한 끝에야 황구연로인은 마침내 이야기끈을 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말문이 열리기 시작한 황구연의 민간이야기는 흘러도 흘러도 마를줄 모르는 샘물처럼, 캐도캐도 끝없는 만년광산처럼 매장량이 풍부하였다.

◎ 조선족 아라비안나이트

황구연로인은 아침부터 저녁 12시까지 꼬박 일주일간 100여컬레나 되는 이야기를 구술했지만 한컬레도 중복되는것이 없을 정도로 기억력이 뛰여난 사람이였다. 그렇게 그는 5년동안 무려 1070컬레에 달하는 이야기를 구술하였다. 연변대학 문학박사인 김호웅교수는 “아랍민족에게는 《아라비안나이트》라고 하는 천하루밤이야기가 있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1070컬레나 되는 황구연이야기가 있다”고 자랑스레 말한다.

황구연선생이 구술한 이야기중에는 우리 겨레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되는 “단군”, “고주몽”, “왕건”, “리성계”와 같은 신화와 전설이 있는가 하면 “선덕녀왕”, “박문수”, “정몽주”, “솔거”, “황진이” 등 사화, 력사인물과 명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으며 장기간 로동인민들속에서 전승된 “파경노”, “김선달”, “천생배필” 등 환상적인 이야기, 생활세태담, 인물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이밖에 동물담, 우화, 우스운 이야기와 시조, 판소리도 있으며 겨레들이 중국 동북땅에 와 개척한 이민사와 개척사, 향토전설 및 해방후에 새로 생긴 새 이야기도 있다. 이 민간이야기들은 민담집 《천생배필》, 《파경노》, 《황구연이야기집》으로 묶여 일찍 출판되였고 일전에는 열권으로 된 《황구연전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판되였다.

“천경땅을 물려주기보다 한권의 책을 물려주는것이 낫다”는 황구연선생님, 후세에 《아라비안나이트》와 같은 천여컬레의 귀중한 이야기를 남긴 그는 이제 조용히 옛집이 바라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잠들었지만 그의 이야기속에 담겨있는 지혜와 심오한 생활철리들은 여전히 우리 후대들에게 깨우침이 되고 이끔이 되고있다(강정숙기자).

주민간문예가협회 일군들과 함께(1984년)
민담을 수집하는 작가들(1985년)
  래원: 연변일보 (편집: 김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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