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시 공원다리서쪽 3.5킬로메터 되는 곳에 위치한 마을이 90여세대 조선족이 사는 와룡동이다. 와룡동은 오늘날 연길시 소영진 민흥촌 제3, 4 촌민소조를 말하는데 마을서쪽에 구불구불 뻗은 산들이 마치 룡이 뒤틀고 누워있는듯하여 생겨난 지명이다. 이곳은 조선 함경북도의 가난한 농민들이 들어와 개척한 마을로서 1883년경에 이르러서는 80여세대가 사는 큰 동네로 되였다.
1907년, 연길시 서쪽교외의 와룡동에 제자들이 사은의 정을 새겨놓은것이다. 당시 번성했던 학교는 1920년 경신년 대참변때 불타버리고 현재는 비석만 외로이 남아있다
그러나 연길에서 무엇보다 자랑스럽다고 느껴지는것은 “사은기념비”이다. 민주촌 산비탈, 화강암에 “사은기념비(師恩記念碑)”라 한자로 씌여진, 높이 1.87메터의 비석이 있는데 이는 조선족 근대교육의 한페지를 기록한 창동학원의 제자들이 스승의 은혜를 기념하여 세운것이다.
옛날 와룡동 창동학원이 바로 이곳에 자리잡았었다. 지난 세기초 룡정의 명동학교와 더불어 연변 조선족 근대교육의 요람으로 불리우며 조선족교육사에서 찬란한 교육의 한페지를 기록한 창동학원은 남성우, 리병휘, 오상근 등 반일지사들의 창의로 세워졌다.
1907년, 기독교인 오상근, 리병휘, 남성우 등이 반일민족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최병균 등 12명으로 구성된 학교후원회의 도움으로 창동강습소를 설립하였다. 1910년에 중학부를 부설하고 학교이름을 창동학원으로 개칭하였다. 이 학교에는 조선, 로씨야 연해주일대에서 온 학생들도 있었다. 이 학교 중학부에서는 십여년동안에 200여명의 학생을 육성하였는데 많은 항일투사들이 배출되였다.
창동학교에는 또 간도국민회의 외곽단체인 간도대한청년회본부가 설치되였었다. 그리고 창동학교의 많은 교원과 학생 및 졸업생들이 철혈광복단에 참가하여 희생적으로 싸웠다. 1920년 동량리어구에서 일본조선은행권 15만원을 탈취한, 유명한 "15만원 탈취사건"의 골간들인 림국정, 최봉설, 한상호 등 반일지사들은 와룡동출신이며 일찍 광주에 류학하였다가 광주봉기에 참가하였고 북벌전쟁이 실패하자 연길로 돌아와 중공연길구위 서기로 사업하다 희생된 조기석도 와룡동출신이였다.
1920년 경신년 대참변때 학교는 완전히 불타버리고 교원들은 뿔뿔이 헤여지고말았다. 그후 1935년 9월 이 학교의 졸업생인 정세환 등은 애국지사인 오상극, 리연휘, 남성우 등이 신식학교인 창동학교를 세워 많은 애국인재를 양성해준데 대한 보답으로 이곳 와룡동에 사은의 정을 안고 "사은기념비(師恩記念碑)"를 세웠다(연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