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벌전쟁이란 1926년부터 1927년사이에 국공합작으로 이루어진 10만 《국민혁명군》이 광동성을 근거지로 오패부, 손전방, 장작림을 대표로 한《북양군벌》을 토벌한 전쟁을 가리킨다.
1926년 5월에 공산당원 엽정을 퇀장으로 한 국민혁명군 제4군 독립퇀은 북벌군의 선발대로 되여 오패부가 둥지를 틀고있는 호남성으로 진군하였다. 중국공산당이 직접 장악한 이 독립퇀은 1925년 11월에 주은래의 지도밑에 광동에서 조직되였는데 조선족 160여명이 조선족혁명가 양림을 영장으로 한 제3영에서 한개 련을 구성하고 있었다. 양림은 당조직의 지시에 따라 북벌의 길에 올랐다.
7월 1일, 광동혁명정부는 《북벌선언》을 반포하고 7월 9일에는 10만 북벌군이 세길로 나뉘여 북벌전쟁을 시작하였다. 국민혁명군 제2군, 제3군, 제6군, 제8군에 편입된 조선족용사들을 혈전의 길에 올랐다. 그들의 인수는 몇백명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거의 군관학교나 대학을 졸업한 전문인재들이였다. 제2군의 포병련장 강파, 제6군의 포병영장 리검운, 부영장 권준, 부관 안동만, 제6군 55퇀 기관총련의 소좌교관 김준섭 등이 대표적인물이였다.
1926년 8월에 북벌군은 오패부의 2만여명의 주력부대가 지키는 《철옹성》이라고 불리우는 호북성 정사교와 하승교를 공격하였다. 북벌군은 정사교를 12번이나 공경하였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때 제4군 독립퇀 소좌교관 김준섭의 소속부대가 전투에 뛰여들었다. 김준섭은 기관총련을 지휘하여 불벼락으로 적의 화구를 벙어리로 만들어버렸다. 엽정독립퇀의 여러 민족 용사들은 우회작전하여 우익으로부터 덮쳐들어 적 1천여명을 소멸하고 2,400여명을 포로하였으며 계속 작전하여 8월 27일에 끝내 정사교를 점령하였다. 이때로부터 엽정독립퇀은 《철군》이라고 불리게 되였다.
9월초부터 11월초까지 사이에 강서성을 해방하는 일환으로 되는, 치렬한 남창쟁탈전이 세차례나 있었다. 각 군의 조선족용사들도 이 혈전에 참가하였다. 남창을 탈취한 북벌군은 손전방군벌군의 보복공격을 받게 되였다. 이 남창보위전에서 제6군 포병영장 리검운 등 조선족용사들이 진지를 사수하면서 높은 명중률로 적의 진공을 련속 물리쳐 전군에 소문을 떨쳤다. 제2군의 포병련장 강파를 비롯한 많은 조선족용사들이 이번 전투에서 나젊은 생명을 바쳤다.
11월초, 제3차남창공격전이 벌어졌다. 제6군의 소좌교관 김준섭의 소속부대는 락화역을 공격할 임무를 맡았다. 일찍 쏘련에서 군관학교를 다니며 기관총전문과를 전공한 김준섭은 기관총련을 지휘하여 적의 화력을 련속 압제하여 전투의 진행을 보장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김준섭은 복부에 적탄을 맞고 영용히 희생되였다. 남창성이 점령된후 제6군에서는 성대한 추도회를 열고 김준섭을 추모하였다. 지금 남창시혁명렬사기념관에는 김준섭의 영웅사적이 전시되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