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벌전쟁이 실패한후 중국공산당은 국만당반동파의 도살정책에 반항하여 남창봉기와 추수봉기에 뒤이어 1927년 12월에 광주에서 또 한차례의 봉기를 일으켰다.
광주봉기의 주요한 책임자의 한사람인 엽검영이 거느린 원 국민혁명군 제4군 교도퇀의 제2영 제5련은 80여명의 조선족들을 위주로 하여 구성되였다. 박영, 박근만, 박근수, 박건웅 등 이름난 혁명가, 포병능수들이 이 5련에 있었으며 김규광이 이 5련의 당책임을 맡고있었다. 그리고 황포군관학교 특무영의 3개 련 300여명전사들도 봉기에 참가하기로 되였는데 제2련은 최석천을 련장으로 한 150여명의 조선족들로 구성되였다. 황포군관학교의 포병전문가 리빈, 학교 부관 리계 등 조선족혁명가들이 이 특무영의 사업에 많은 지지를 주었다.
봉기를 앞두고 국제공산당에서도 쏘련에 있던 많은 조선족군사지휘원과 군사기술인재들을 광주에 파견하였다.
1927년 11월 26일, 중공광동성위원회에서는 광주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봉기군총지휘부를 결성하였는데 모스크바군관학교 포병과 졸업생인 양도부(양달부)와 중공당원이며 황포군관학교 교관이였던 김산을 봉기군 군사총지휘인 엽정의 번역 겸 군사참모로, 모스크바홍군대학 졸업생인 리용을 교도퇀 지휘관 엽용의 군사고문으로, 황포군관학교 제3기 졸업생인 리빈을 광주봉기 북부전선의 지휘원으로 임명하였다. 모스크바동방공산주의로동대학 졸업생으로서 중공당원이며 황포군관학교 교원이였던 오성륜, 로씨야공산당원이였던 박영, 황포군관학교 제4기 졸업생인 박건웅 등은 소부대를 거느리고 몇몇 군벌두목들을 생포할 특수임무를 맡았다. 이렇게 광주봉기에는 적어도 250여명의 조선족용사들이 참가하게 되였다.
12월 11일 새벽 3시 30분, 광주봉기의 시작을 알리는 세방의 포소리가 울렸다. 엽정장군의 군사참모들인 양도부와 김산은 명령에 따라 교도퇀 제2영 5련을 위주로 한 200여명 전사들을 거느리고 적 2개 퇀 2,000여명이 주둔하고있는 사하진으로 진군하였다. 사하진전투가 시작되여 10분만에 적 30여명이 쓰러지고 600여명이 투항하였으며 한개 퇀이 의거하였다.
엽용의 군사고문인 리용은 교도퇀 1영과 로동자적위대 및 결사대를 거느리고 국민당반동파의 완고한 보루인 광주공안국을 들이쳤다. 반시간도 못되여 적 1,000여명을 포로하고 감옥문을 짓부신후 6명의 조선족을 망라한 2,000여명의 혁명자들을 구출하였다.
북부전선에서 리빈은 소부대를 거느리고 적의 몇몇 거점을 짓부신후 적의 군용비행장을 습격하여 비행기 10대를 몽땅 파괴해버렸다.
광주경위퇀을 개조하여 봉기에 참가시키기 위해 파견된 김형평과 문손적은 전우들과 함께 퇀참모장 등 10여명의 완고분자들을 처단하고 경위퇀 포병대장이며 조선족인 민승재등과 함께 경위퇀의 한개 련을 봉기군에 가담시켰다.
최석천이 거느린 황포군관학교 특무영 제2련은 반동민단의 저항을 물리치고 사하에로 진군하여 동부전선을 경계하는 임무를 맡았다.
봉기가 일어난 그날로 광주시가지를 거의 점령한 봉기군은 뒤이어 광주쏘베트정부창립대회를 서과원에서 열었다. 김규광, 김산 등 10여명의 조선족대표들도 이 대회에 참석하였다. 김규광은 쏘베트정부 반혁명숙청위원회에서, 김산은 로농무장부에서 사업을 보았다.
봉기에서 호되게 얻어맞은 국민당반동파는 영국,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침략세력과 야합하여 12일부터 봉기군을 향해 덮쳐들었다 주강일대에 정박했던 일본포함은 적들의 상륙을 엄호하여 봉기군진지를 향해 포사격을 해댔다. 많은 조선족용사들이 이 반격전에 뛰여들었다. 리빈과 조선족포사격수 유평이 이 전투에서 영용히 희생되였다.
12일 저녁, 봉기총지휘부에서는 유생력량을 보존하기 위하여 해륙풍쏘베트지역으로 철거할것을 전군에 명령하였다. 그러나 철거명령을 받지 못하고 계속 혈전을 벌린 부대들도 있었는데 박영이 거느린 조선족용사 60여명을 망라한 200명의 봉기군은 령남대학부근에서 적의 겹겹한 포위속에서 련속 5일간 굶으며 혈전하였다. 전투에서 박영 등 120여명 전사들이 영용히 희생되였다. 조선족용사 50명을 망라한 80여명 봉기군이 적에게 체포된후 집체도살을 당했다. 용사들은 《중국공산당만세!》를 높이 웨치며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사하를 지키고있던 황포군관학교 특무영의 조선족용사 150여명은 적 2개 퇀의 발광적인 진공을 피로써 막아나섰다. 그들은 자기보다 6~7배나 더 되는 적들과의 육박전에서 거의 전부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12월 13일, 살아남은 양도부, 김산, 오성륜 등 조선족용사 15명은 기타 봉기부대와 함께 광주를 떠나 해륙풍쏘베트지역을 향해 진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