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철부(李鐵夫)는 왕명의 《좌》경모험주의를 반대해 나섰던 조선족의 뛰여난 혁명가로서 30년대에 중공하북성위원회 서기, 천진시위원회 서기 등직을 력임하였었다.
리철부는 원명이 한위건인데 1901년에 조선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태여났다. 일찍 1926년에 그는 조선공산당재건사업에 참가하였고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였다.
1928년 2월에 그는 일제의 사나운 검거선풍을 피하여 상해에 간후 그해 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북평(북경), 천진 일대에 파견되여 당의 지하사업을 하였다. 이때로부터 그는 자기 이름을 리철부라고 고쳐불렀다.
당의 지하사업에서 불굴의 투지, 높은 리론수준과 사업능력을 과시한 그는 1931년에 북평반제동맹당 단서기직을 맡았으며 1932년부터 선후로 중공하북성위원회 선전부장, 조직부장직을 담임하였다. 그는 사업의 필요로 국민당국 중장이며 북경경찰총감인 장벽의 녀동생이며 공산당원인 장수암과 결혼하고 안해의 특수한 사회관계를 리용하여 사업을 벌려나갔다. 그는 장수암의 조카들인 장결청(팽진의 부인), 장문송(해방후 원 교육부 부부장) 등을 혁명의 길로 이끌었다.
30년대 전반기에 왕명의 《좌》경모험주의로선으로 하여 화북지구의 당조직들은 련이어 엄중한 파괴를 받았다. 중공하북성위원회 선전부장인 리철부는 《당내문제에 대한 몇가지 의견》, 《<좌>경기회주의 반동성》 등 10여편의 의견서와 글을 써서 성위원회에 보냈다. 그는 《좌》경모험주의가 당을 《위기》에 빠뜨리고있다고 지적하면서 당의 7차대회를 열고 《당을 위기에서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런 정당한 주장은 오히려 《당의 로선을 반대하는》, 《당과 공존할수 없는》 《철부로선》이라고 비난받게 되였다. 이리하여 리철부는 《반우경투쟁》의 주요한 대상으로 되였으며 조직관계마저 단절당했다.
순금은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리철부와 장수암은 계속 로동자, 학생, 사무원들속에 들어가 구국회를 조직하고 사업을 밀고나갔다. 1936년 봄, 중공중앙 북방국주재 대표인 류소기가 천진에 왔다. 그는 1935년 12월의 와요보회의정신에 따라 리철부와 장수암의 조직관계를 회복시켜주고 리철부를 중공하북성위원회 서기 겸 천진시위원회 서기로 임명하였다.
1937년 5월, 중공중앙은 연안에서 당의 전국대표회의와 적점령지역사업회의를 열었다. 리철부는 적점령지역의 대표로 연안에 가서 모택동주석의 접견을 받았다. 당중앙은 그의 결핵병이 심한데 비추어 그를 연안에 남아 사업하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회의가 끝난후 리철부는 인차 앓아눕게 되였는데 치료에서 효과를 보지 못하고 7월 10일에 37세를 일기로 불행히 서거하였다.
연안에서는 리철부의 추도회를 성대히 열고 그를 추모하였다. 그후 연안정풍때 모택동은 리철부를 왕명《좌》경모험주의로선을 반대한 화북지구의 우리 당의 《수령》이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1945년 4월에 당의 제7차대회를 앞두고 중공중앙판공청에서는 리철부의 묘지에 대리석비석을 세웠는데 비석에는 《조선공산당창시자의 한사람이며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이며 중공하북성위원회 서기인 리철부동지의 묘》라는 글이 새겨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