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이였던 왕진은 《정률성동지를 추모하여》란 글에서 《정률성동지는 현대중국에서 섭이, 선성해의 뒤를 이어 나온 걸출하고 우수한 작곡가이며 중국무산계급혁명음악사업의 개척자의 한사람》이라고 하였다.
조선족음악가 정률성(鄭律成)은 1918년 8월에 조선 전라남도 광주군에서 태여났다. 1933년 5월에 그는 중국에 와서 《의렬단》이 남경에다 꾸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들어가 학습하면서 반일비밀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타고난 천성으로 성악공부도 하고 바이올린과 피아노도 배웠다.
1937년 10월에 그는 연안에 들어가 로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문학학부의 동창생인 막야더러 혁명의 정열로 넘치는 가사 《연안송》을 쓰게 하고 거기에 곡을 달았다. 이렇게 불멸의 송가인 《연안송》이 세상에 고고성을 울렸다. 이 노래는 연안으로부터 각 항일전선에, 지어 멀리 동남아세아나라에까지 보급되였으며 수천수만의 청년들을 항일투쟁에로 불러일으켰다.
1938년 8월에 로신예술학원을 졸업한 그는 연안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 배치되여 사업하게 되였다. 이듬해 1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그는 전우 공목과 함께 《팔로군군가》, 《팔로군행진곡》, 《팔로군과 신사군》등 8수의 가사로 된 《팔로군대합창》 가사를 창작하고 자신이 직접 작곡하였다. 《팔로군행진곡》은 해방전쟁시기에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되였고 후에는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확정되였다.
1942년 8월, 정률성은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의 교무장으로 임명되여 태항산근거지로 갔다. 1945년 8월, 일제가 투항한후 정률성은 조직의 결정에 따라 한때 조선에 가서 사업하였다. 그는 조선인민군협주단 단장책임을 맡았다. 그는 인민군장병들을 승리와 영광의 한길로 고무하는 영생불멸의 노래인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하였다. 이 노래는 후에 《조선인민군 군가》로 되였다.
1950년 10월에 중국에 다시 온 정률성은 1951년에 또다시 가렬처절한 조선전선에 나가 《중국인민지원군행진곡》을 창작하였다. 전투기백으로 차넘치는 이 노래는 중조 두 나라 인민들을 승리에로 고무하였다.
그후 정률성은 북경에 돌아와 북경인민예술극원과 중앙악단에서 작곡가로 활약하였다. 그는 새 생활창조와 생기가 들끓고있는 공장, 농촌과 부대로 다니며 수십수의 노래를 지었다. 《4인무리》의 압제와 타격을 받을 때에도 그는 송백같은 굳은 절개로 모택동의 시사에 곡을 다는 작곡사업을 계속하였다.
1976년 12월 17일, 《천재적인 작곡가》로 불리우던 정률성은 뇌출혈로 심장이 고동을 멈추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58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