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건교 60돐 및 학교사연구회15돐을 기념하여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는 어언 60년의 년륜을 새겨왔다.
정치군사교육을 위주로 군정간부양성을 목표로 한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는 2년 푼한 사이 학교를 여덟번이나 옮겨야 할 정도로 이동작전한 특수부대이기도 했다.
건립초기 화전에서 연길로 이전해오자 왕청―녕안 일대의 토비들이 국민당군과 합세하여 기염이 아주 창궐하였는데 분교에서 그 주력군을 섬멸하였다. 그 잔여력량들을 전멸하고 인민의 재산과 왕청―목단강교통운수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길림분교는 상급에서 지시한 경비2려의 번호로 라자구, 로흑산에까지 진입하여 그 곳에 잠입한 300여명 토비들을 투항시켰거나 해산시켜 왕청, 동녕 일대 토비를 진압, 토비숙청임무를 완수했다.
전 동북적으로 토지개혁운동이 일던 1946년 겨울 상급의 지시에 따라 길림분교의 간부, 학생들을 연변지구 공작단으로 연변, 길북, 돈화지구의 토지개혁운동에 참여시켜 반동악패지주를 청산하고 토지와 생산도구, 불량재산을 몰수하여 빈고농에게 분배해주는데 크게 협력하였을뿐만 아니라 식량이 긴장하던 그 시기 량식징수, 전시근무를 잘하여 든든한 후방건설에 한몫 하였다.
길동지구에 갑자기 식량이 긴장하던 1946년 여름, 학교에서는 농회를 통하여 백성들한테서 식량을 사고 꾸고 모아 전선에 호송하는 공작대를 내와 공급처를 협력하게 되였는데 예서 학원들은 선전원이 되고 국민당군과 생명위험을 무릅쓰고 무장투쟁을 벌이기도 하면서 한개 소조는 전문 량식을 징수, 징구하여 전선으로 보내고 한개 소조는 식량을 기차로 북만근거지인 할빈과 수분하로 수송하여 보관하게 하였다. 또한 해방구의 감조감식, 농업생산추진사업을 도와나섰는데 4개월간의 간고한 전투를 거쳐 소임을 완수하여 길림성정부와 길림군구의 표창을 받았다.
학교가 연길로 철거할 때 학원들은 화전에서 돈화까지 10일간을 보행했다. 학교는 초기 아무런 시설이 없었다. 엄한에도 빈 교실이나 원 일본군 군영같은데서 벼짚을 깔고 마루에서 자던 일, 일본군들이 버리고 간 사료를 먹던 일, 나무밑에서 강습을 받으며 말 그대로 풍찬로숙하던 일, 자체로 양돈하고 황무지 개간, 피복공장건설로 생산자구하던 일, 령하 30도도 넘는 엄한에 빙상에서의 훈련…
길림분교는 리론과 실천을 결부하는 교육방침을 견지하여 교수학습외 근거지를 공고히 하고 전 중국을 해방하는 중요한 요소로 되는 군정간부를 양성, 수송해주는 사명을 훌륭히 완수하고 군사학원의 정규화 건설과 발전에서도 귀중한 경험을 쌓았을뿐만 아니라 직접 토비숙청, 토지개혁, 량식징수저비, 전시근무봉사, 대 생산에 참가하여 《학습, 전투정신, 간고분투, 무사공헌, 희생정신》의 군정대학정신을 축조하였다.
《군정대학정신》은 오늘 날중국인민해방군 대련륙군학원의 가장 귀중한 재부로, 특색적인 전통교풍으로 정립, 계승되고있다.
력사자료를 진실하게 기록, 재현하고 《군정대학정신》을 더 잘 계승발양하기 위하여 군정대학 길림분교 학교사연구회가 설립된지도 15년이 된다. 15년간 연구회에서는 학교사연구세미나를 5차례 진행, 직접적인 답사, 방문과 력사자료수집을 통하여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사에 관한 회억록을 중문과 우리 말로 펴냈으며 300여편 문장, 사진 100여편이 수록된 학교사보관서류를 32책으로 정리해내여 연변조선족자치주서류관에 무상으로 교부, 보관시키여 력사적 공백을 메웠다. 또한 연변조선족자치주렬사릉원, 항일렬사, 항미원조렬사기념관에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력사전시대를 특설했고 룡정 옛터에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혁명렬사기념비를 수건하였는가 하면 혁명가곡 470여수를 수집한 가곡집을 만들어냈으며 새일대관심소조를 내와 혁명전통교육에도 힘 다 하고있다.
빈곤학생장학금을 설치하여 100여명 학생에게 조학금을 발급하였으며 빈곤농촌지원, 외국에 나가 있는 학우, 유지인사들과도 적극적인 교류를 진행하면서 로《군정대학》의 여열을 바쳐왔다. 길림분교 학우들은 인젠 거의다 고래희의 로인, 많은 이들은 이미 고인이 되였지만 이들의 영광스러운 력사와 《군정대학정신》은 60년, 600년…길이 빛날것이리라.
일찍 1992년 조남기상장은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력사에 대하여 《영광스러운 력사 영웅의 시편》이란 제사를 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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