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뉴스>>불멸의 발자취
획기적인 력사를 남긴 《오가황회의》
2006년 09월 01일 13:38 【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지금으로부터 61년전인 1945년 11월 10일, 현재의 심양시 우홍구 오가황조선족중심소학교 운동장에서는 한차례 력사적인 모임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조선의용군 전체 군인대회였는데 이 회의에는 조선독립동맹 간부들과 심양에 집결해있는 조선의용군 전체 군인 2천여명이 참가했다. 이 회의는 조선의용군이 조직한 첫 전체 군인대회인 동시에 연안군정학교 본교와 각 분교의 졸업식이기도 해 자못 의의가 컸다. 또한 이 회의에서는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이 조선의용군 전체 군부대와 일부 동맹인원들이 계속 중국에 남아 해방전쟁에 참가한다고 선포함으로써 조선의용군의 신분, 성격, 임무가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한 력사적의의를 띤 중요한 회의였다.

일전 기자는 60여년전 이 회의에 직접 참가했던 로의용군전사 최강(84)로인을 만나 당시 오가황에서 있었던 의용군 전군회의와 그 시대적배경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팔순을 넘긴 최강로인은 당시의 정경을 생생히 기억하고있으며 자신이 직접 집필한 저서 《조선의용군사》에서 당시의 일을 소상히 적고있다.

1945년 6 월 21일 오끼나와전투에서 일본군의 조직적인 저항이 끝나자 일본 본토에 대한 미국공군의 폭격이 가열되면서부터 일본군의 전세는 기울어져가는 조짐을 보였다. 다급해진 일본은 쏘련을 통해 련합국에 투항할 의사를 비쳤다. 그러는 사이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고 2일뒤인 8월 8일에는 쏘련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8월 9일에는 다시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두개의 원자폭탄과 8월 9일 쏘련 100만 대군의 동북지역 일본군에 대한 진공은 일본의 투항을 1년 앞당긴 결과가 되였고 수십만 군인의 살상을 막는 역할을 했다. 중국인민들의 약 8년간의 항일전쟁과 조선인민의 36년간의 반일반식민지투쟁은 처참했던 2차세계대전과 함께 일제의 무조건항복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정세는 인민들의 념원과는 달리 변해갔다. 1945년 8월 미국과의 약속에 따라 대일전에 참가한 쏘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조선에 진입해 남쪽으로 계속 진출, 8월 12일에는 청진에 상륙하고 16일에는 원산상륙작전을 벌였다. 이때 미군은 가장 가까운 부대가 조선반도에서 6000마일이상 떨어진 오끼나와(沖繩)에 주둔하여 조선반도에 상륙하는데 상당한 시일을 필요로 했으므로 조선반도전체가 쏘련군에 의해 장악되는것을 막기 위해 《3.8선》을 경계로 한 분할점령을 쏘련에 제의했다. 이에 쏘련은 1개월전 포츠담회담에서 미국, 영국, 쏘련 3국의 수뇌가 한국의 신탁통치필요성과 분할점령에 대해 인식을 같이했고 또한 미국의 량해를 받아야 일본 호까이도(北海道)의 일부를 쉽게 점령할수 있었기때문에 미국의 제안에 동의, 이미 서울까지 진출해있던 일부 쏘련군을 《3.8선》이북으로 즉각 철수시켰다. 그리하여 북쪽에는 쏘련군이, 남측에는 미군이 진주, 각각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을 받았으며 군정을 실시하였다. 처음 《3.8선》은 일시적으로 획정한것이였으나 1948년 남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결국 실질적인 국경선이 되고말았으며 1953년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3.8선》대신 《휴전선》이라는 군사경계선이 설정되여 남북의 분단이 고착화되고말았다. 

항전승리후 국내에서는 중국공산당은 인민들의 념원에 따라 평화, 민주, 단결을 주장했지만 국민당은 전면내전을 획책했다. 중국공산당과 팔로군은 앞질러 동북으로 진군해 중요한 도시와 농촌을 해방시켰다. 1945년 9월 심양에서는 팽진을 서기로 한 중공중앙 동북국이 성립되고 10월 31일에는 림표를 사령원으로 한 동북인민자치군 총사령부가 성립되였다. 국민당은 《8.15》직후 동북행정위원회를 설립하고 10월 12일 웅식휘(熊式輝)를 장춘에 파견해 쏘련점령군 사령 말리노브스끼와 중쏘협정에 의한 동북접수문제를 토의하는 한편 접수관원을 심양, 장춘, 할빈 등지에 파견해 위만주국의 잔여세력들과 결탁해 사회질서를 교란했다. 또한 두률명을 동북보안사령장관에 임명해 금주와 심양을 진공하도록 했다. 한편 동북에 진군한 쏘련홍군은 중쏘협정에 의해 철수를 서두르고있었다.

이에 앞서 1945년 4월 중국공산당 제7차대표대회가 연안에서 개최되였다. 이 회의에서 모택동은 《련합정부를 론함》이란 정치보고를 진술했고 주덕은 《해방구의 전장(戰場)을 론함》이란 보고를 진술했다. 이 보고에서 주덕은 조선독립동맹에 특히 감사한다며 그들의 숭고한 국제주의정신은 우리들에게 극히 가치있는 방조를 주었다고 평가했다.

1945년 8월초 주덕총사령의 명령에 따라 진수군구당위서기 림풍이 인솔하는 2천여명 간부들이 동북으로 진군하게 되였다. 이와 함께 조선의용군은 《동북으로 진군하여 그곳의 200여만 조선동포와 결합하여 조선으로 진군하라》는 주덕총사령의 명령을 받게 되였다. 이리하여 9월 2일 연안에 있던 조선의용군사령부와 조선독립동맹총부,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약 300여명은 총사령 무정, 부총사령 박효삼, 박일우의 인솔아래 함께 연안을 떠나 북상의 길에 오르게 되였다. 이들은 황하를 건너고 만리장성을 넘어 승덕을 거쳐 심양에 도착, 태항산과 진찰기 등 지역의 조선의용군과 륙속 합류했다. 이들은 심양에 도착한후 오가황, 대석교 등 마을에 주둔해있었고 사령부는 심양시내 태원가 모 은행(현재의 금성호텔)에 두었다. 앞서 조선의용군 선견종대 약 1천여명은 9월말 조선 신의주에 입국했으나 쏘련홍군은 《포츠담협정의 관련 규정》을 리유로 그들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을뿐아니라 그들의 무장까지 해제했다. 이들은 할수 없이 다시 심양으로 돌아왔다.

1945년 11월 7일 심양역전 광장에 새로 세운 쏘련홍군 심양해방기념탑 제막식이 검열식과 함께 성대히 진행되였다. 제막식에는 쏘련홍군과 국민당, 동북자치군(즉 팔로군), 조선의용군 대표들이 참가했다. 제막식에서 쏘련홍군 사령원의 연설에 이어 중국공산당 동북국이 임명한 료녕성주석 장학사(장학량의 동생)의 연설이 있었다. 이 행사가 있은 후 3일째 즉 11월 10일 조선의용군은 오가황조선인학교(현재의 우홍구조선족오가황중심소학) 운동장에서 조선의용군 전체 군인대회가 개최되였다. 이 회의에는 심양에 주둔하고있는 조선의용군 전체 장병들과 조선독립동맹간부들이 참가했다. 

이 회의는 조선의용군이 처음으로 개최하는 전군대회였고 또한 연안조선인군정학교 본교와 각 분교의 졸업식이기도 했다.

이 회의에서 무정총사령은 중요한 연설을 하고 몇가지 결정을 선포했다. 결정에 따르면 조선독립동맹 로간부들 70여명은 조선으로 들어가고 부분 조선독립동맹부대원들과 조선의용군부대는 계속 이곳에 남아있게 되였다. 오가황회의에 참가했던 부대는 후에 동북국과 동북인민자치군의 지시에 따라 남만지구 조선의용군 제1지대로 개편되였고 지대장에 김용, 정치위원 방호산, 참모장에 안빈이 임명되였다. 이들은 동북지역 조선인을 보호하고 그들을 발동해 무장대오를 확대하고 국민당반동파의 내전시도에 대응할 준비를 하게 되였다. 새로 개편된 조선의용군은 북만지역에 지대장 리상조, 정치위원 주덕해가 인솔하는 제3지대, 동만지역에 지대장 리익성, 정치위원 박훈일이 인솔하는 제5지대(제5지대는 연길에로 이동시 길림 화전지역에서 박훈일을 지대장 겸 정치위원으로 한 제7지대를 조직했음)가 있었고 이외에 지대장 채국반(김호), 정치위원 리명이 이끄는 압록강지대(1946년초 한개 대대가 귀국하고 송춘석이 이끄는 한개 대대가 제1지대와 합병했음), 대대장 한청이 이끄는 영구지역 독립대대(1946년 5월 료녕군구 제4군분구 기간퇀 3영으로 개편됐다가 그해 11월에 차균섭의 인솔하에 리홍광지대에 합병되였음), 퇀장 현동명, 정치위원 리홍원이 이끄는 개원지역 조선의용퇀(1945년 9월 팔로군이 철령에서 조직한 부대로서 1946년초에 제1지대에 합병되였음) 등이 있었다. 당시 연안군정학교 분대장으로 있던 최강씨는 사령부의 지시에 좇아 정치지도원의 신분으로 한국국민당 피난민경위부대 1개 중대를 접수해 1지대 9중대로 개편시켰다.

새로 개편된 조선의용군 각 지대는 항일전쟁시기의 군칭을 한동안 보류하고있었으나 더는 조선독립무장대오가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조선인무장대오로 국민당반동통치를 뒤엎고 중국인민의 민주공화국을 건립하기 위해 투쟁하는 무장대오로 되였다. 즉 새로 개편된 조선의용군 각 지대는 동북민주련군 각 군구에 소속되면서 조선의용군사령부는 취소되였으며 각 지대는 당지 군구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게 되였다. 

한편 오가황회의후 계속 동북에 남게 된 조선독립동맹조직은 방호산을 주임으로 하는 동맹 남만공작위원회와 주덕해를 주임으로 하는 북만공작위원회를 각각 조직했다(동만지역에는 이미 연변민주대동맹대가 있었고 조선의용군 제7지대가 길림서 조선독립동맹을 조직했음). 상기 두 공작위원회는 실제상 조선독립단체가 아니라 동북지역 100여만 조선인의 군중조직으로서 중국공산당의 령도아래서 조선인대중을 발동해 전투부대를 지지후원하는것이 주요임무였다. 1946년 3월 두 공작위원회는 명칭을 동북조선인민민주련맹으로 바꾸면서 조선의용군의 군정통일에서 리탈해 당지 위원회의 직접적인 령도를 받게 되였다.

1946년 2월 동북국은 조선의용군을 리홍광지대로 개칭하고 원 통화지대를 양정우지대로 개칭, 2월 23일 통화시내의 한 영화관에서 성립대회가 열렸다. 1946년 12월 리홍광지대는 또 동북민주련군 독립4사로 개칭되였고 1948년 11월에 다시 중국인민해방군 보병 제166사로 편성되였다.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통화《2.3》폭동을 평정전투, 4차 림강보위전, 장춘해방포위전, 료심전역과 심양 해방 및 위수 등 수많은 전투임무를 출중하게 완수하고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래원: 료녕조선문보 (편집: 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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