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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들 고향은 경상도꾸마》
조상의 숨결 살아숨쉬는 삶의 터전으로 가다-태양편
2007년 10월 19일 09:45 【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1 -《태양촌은 마 연변의 섬이라카이》

왕청현 천교령진 태양(太阳)촌—찾아 갈 때가지만 해도 촌명이 만세소리가 지동치던 지난세기 70년대 냄새가 나는것 같아서 원래의 촌명이 못내 궁금했는데 알고보니 개척시기부터 지어진 이름이란다. 지리적으로 당양지지에 자리잡고 따스한 해살이 비껴든다고 지었다는 태양… 광활한 동북의 어느 촌인들 따스한 해볕이 무심할가 하는 가벼운 항의가 흘렀으나 연변의 추락취명의 문화를 엿보면 태양촌이란 촌명도 홀대할수 없는 연혁을 가지고있는것이 틀림없다. 더구나 태양촌도로 입구에 자리잡은 신선동과 남산의 인형같이 생긴 애기바위의 토템을 상기하면 태양촌의 땅과 하늘은 넓고 공활했다.

우리가 태양촌으로 고대일무렵은 정오의 태양이 태양촌 상공에 멈추어서서 늦가을의 강렬한 빛을 발사하는 점심무렵이다. 연길과 태양촌간의 거리를 계산하고 아침일찍 출발했는데도 연도에서 한개 시와 한개 현 소재지풍경을 스쳐지나는 과정이 있어서 거리가 꽤 나왔다.

마을 입구의 세멘트도로로 벼를 박아실은 소수레가 흔들흔들 춤추며 들어갔고 우리를 등진 농부의 등짝뒤로 이랴 끌끌- 소를 재촉하는 탄성같은 석쉼한 소리가 시름없이 흘러나왔다. 태양촌의 촌민들이라고 짐작하고 차를 세우고 촌장댁을 물었더니 《촌쟁은 마 콩싣꺽질 할게라요 》 좋게 대꾸하다가 촌장이 소수레를 몰고 다시 나가는것을 지켜보고는 우리를 대신하여 《어이-손님덜이 찾아왔구마》 하고 선통해주는 친절도 보였다.

주귀룡촌장(51세)과 수인사를 나누고 이번 걸음의 의제를 간단하게 전하고 먼저 로인회관에서 로인들과 만나고싶다는 의향을 내비쳤더니 두말없이 우리를 로인회관으로 안내했다. 멀리에서의 조망과 달리 늦가을의 태양촌은 약간은 적요했다. 모두가 가을 걷이로 밭으로 나갔는지 거리에는 닭이 우는소리만이 들리고 인기척이 없었다. 주촌장은 태양촌의 일반정황들을 간단하게 요약했다. 40여호에 이제 80여명도 되지 않는 촌민만이 남았는데 그만큼 일손이 적어서 탈곡시기도 왕년보다 많이 늦추어진다고 했다. 주촌장의 소개를 듣고 다시 살펴보니 창문과 출입문까지 탄자로 봉한 집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집들은 온근 식구가 외지로 떠났거나 외국으로 돈벌러 나가면서 비운 집들이다. 촌장의 부연 설명이 없어도 촌거리를 한바퀴 활보해보면 촌의 실정들을 대개 읽을수 있다. 마을에는 대개 늙어서 세거를 고집하는 늙은이들과 로약자, 그리고 조건이 되면 이제 외국으로 나갈 후보자들만이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처와의 접목을 거부하고 연변의 섬이라는 문화적인 특색명칭에 손색이가면서 태양촌도 이제 관습적이고 배타적인 진영을 허물고 대처와 접목하면서 진통을 겪고있었다.

가을이 풍요의 계절이라는것은 농촌에서만이 만끽하는 시각적인 감각이다. 지붕에서 말리우는 옥수수가 노랗게 눈을 부셨고 앞산돈들락밑에서 장꿩이 꺼껑-울어댔다. 다시한번 농촌의 농번기를 무시하는 기자들의 렴치없는 걸음이라고 확인했지만 령혼이 살아있다는 이런 촌에는 얍삭한 렴치타령은 금물이다.

《태양촌은 마 아직도 연변속의 섬이라카이》지금도 태양촌의 촌민들은 긍지인지 서글픔인지 모르는 이 말을 잘한단다.

2-《지들은 일본늠마들한테 쏙아서 왔구마이》

촌에도 년륜이 있다면 태양촌은 올해로 70년륜을 자랑한다.

지금으로부터 70년전인 1937년 2월. 경상도, 안동, 예천, 문경, 상주 등지에서 218호의 세대들은 《개척이민》행렬에 편재하여 만주로 향하는 쿠리한 렬차를 탔다. 농부들의 추레한 옷과 땀으로 쉬치한 냄새가 진동하는 렬차는 동북땅을 향해 조선을 떠났다.

대개 동북으로의 이주는 크게 세갈래인데 그중 한갈래가 동변도(연변지역)로 향하는 갈래다. 이 갈래의 첫 역이 도문인데 이들은 동변도에 도착후 그 길로 천교령까지 도착했다. 호박이 집채만하고 옥수수가 크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는 동북땅으로 기아를 이기기 못하고 잘살기 위해서 《만선척식유한주식회사》의 감언에 속아서 고향을 등진것이다. 조선북부의 개척민들이 월경과 동북으로의 이주가 산발적이라면 1930년대후반기의 조선남부(한국)의 이민은 대개 《개척이민》 성격을 띤다.

《개척이민》이 거론되면 일본본토에서의 대륙정책을 알아야 하고 그 대륙정책의 주요구성부분인 100만세대 이민계획을 상식적으로 알면 이민륜곽을 더듬는데 유리하다. 일본본토에서의 대동북 이민은 1914년부터 본토인들을 대상하면서 발단이 되였는데 그후 1932년에 일본 63차림시의회에서 제1차만주이민계획이 채택되면서 본격화했다. 4년이 지난 1936년 100만세대 이민계획이 작성되면서 대규모화했는데 그해 새로 조직된 히로다내각도 이 100만이민계획을《7대국책》 하나로 확정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이 방대한 계획을 추진하기 위하여 《만주척식주식회사》를 《만주척식공사》확대, 이미수송, 금융수속, 이민물자구매, 토지와 대부금 제공 …등등 구체 실무를 추진하게 하였는데 이 시기 만주이민령도기구인 《척식위원회》설치된다. 이들은 정부에서 추진한 개척단은 갑종이민으로 하고 자원적으로 조직된 민간개척단은 을종이민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 100만이주계획중에는 《재만조선인지도요강》도 있는데 조선총독부와 손을 잡고 조선농민들을 동북으로 이주시켜 《만주농업, 일본공업》을 꾀했다. 이렇게 조선남부의 농민들이 륙속 만주로 들어왔는데 태양촌에 정착한 이들은 이런 배경을 뒤에 업고 들어온것이다.

《말두마소 여기루 들어서니까 어찌나 추운지 그저 덜덜덜 떨기만 얼어 죽는가 했다카이.》

로인회관에서 김건분(이민1세 78세) 안로인이 그 당시를 회억하면서 진저리를쳤다. 경산도영주군 당삼면이 고향인 김건분 안로인은 8살에 태양촌으로 들어왔는데 아홉식구가 건너왔다 했다. 대부분 허술한 삼베옷과 무명옷으로 대충 몸을 감싼 이주들은 동북의 살인적인 추위와 억척으로 둘러막힌 주변의 산발들을 둘러보면서 잘못 왔다는것을 직감했지만 이미 내친걸음이라 어쩔수도 없었다.

《지덜이 건너올적만혀두 이 태양촌에는 맨 울로초들만이 박아섯는디 그 울로초밑은 쬐다 얼음판이구 거기에 새초를 대충 펴구 고애짓고 다덜 함께 살았구마.》

도문시 량수친정암촌 충청도이주민들은 움막집을 《코야》라고 불렀는데 경상도 이주민들은 《고애》라고 부렀다.이부자리도 없어서 얼음우에 마른검불을 대충깔고 일본인들이 제공해준 헌 천으로 지금의 비밀하우스모양으로 지은 림시거처를 《고애》라 했는데 너무 추워서 사이사이에 토난로를 놓아서 난방시설로 사용했다는것이다. 고향이 문경세재하칠구라는 장석기할아버지(이민1세 72세), 고향이 경상도 안동군 길암면 오락동이라는 김분석할머니(이민1세 73세) 안동군 길암면 명기동각골이 고향이라는 김무호할아버지(이민1세 73세) 들이 하는 이야기는 거개가 이주당시에 대한 아프고 괴로운 기억뿐이였다. 그중에서 김동분할머니(이민1세 78세)의 사정이 안타까왔다. 15세에 시집와서 광복 이듬해 17세의 꽃다운 나이로 남편(서타강)을 토비들에게 잃었다. 광복 이듬해 신선동, 태양촌, 상수, 빠인골 일대에는 조선의용군들이 들어온다는 소식들이 흘렀다. (광복후 연변에는 4갈래의 부대가 들어왔는데 그중 한갈래가 관내로부터 진주한 조선의용군 제 5지대다.팔로군 총부의 직속령도를 받던 조선의용군은 주덕총사령의 제6호 명령을 받고 동북에 진주한 후 심양에서 1,3,5 3개 지대로 편성하고 부사령원이며 정치위원인 박일우가 제 5지대를 이끌고 연변에 진주했다.)

어느 날인가 조선의용대가 남산까지 도착했다는 희소식을 접한 이 일대 조선인들이 환영차로 마중나갔는데 의용대가 아니고 마희산토비들이였다. 이들은 의용대를 환영하는 조선인들에게 즉석에서 무차별사격을 가했는데 당시 5명이 즉사했다. 그중에 김동분할머니 남편이 있었다.태양촌 사람들은 지금도 마희산토비를 《마토비》라고 불렀다.

이시기부터 태양촌이란 촌명이 탄생했다. 경상도이주민들은 그해 봄이 되자 쪽지게를 지고 신개지풀이에 나섰다.화전밭을 일군다, 화대기를 일군다는 등 다양한 말로 풀이되는 신개지풀이는 말그대로 고역중의고역이였다. 더우기 역축도 없이 맨손과 지게 하나로 신개지를 일군다면 이들의 말대로 손톱을 깎을 날이 없고 등이 휜다. 공출도 심했다. 그런데다 안전촌과 집단부락을 만드는 부역에 나서야 했는데 이들은 태양촌 사면에 떼를 등짐으로 날라 토성을 쌓았고 토성외곽에 호성하를 파고 거기에 다시 뾰족한 목책도 둘렀다. 태양촌 남동쪽에는 태양촌사람들에게 《써우지 탑》이라 두루뭉실하게 불리우는 무선전화발사탑이 서 있는데 그 자리에 망루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을 구획에 따라 지었지만 개개의 집들은 모두 길에서 방문이 보이도록 제전식으로 지었다고 했다. 감시가 편리하다는 조건이였다. 공출과 부역이도 심했다. 하지만 일견에는 모두가 한족식 맞배지붕이였는데 주촌장의 설명에 의하면 원래는 조선식이였는데 후에 기와를 바꾸면서 기와를 얹기 편리하게 맞배지붕으로 신축했다고 했다. 하지만 집구조는 모두가 전형적인 함경도식이다. 그리고 말투는 전형적인 경산도북부지역의 억양이다.

원래 동신향 관할행정촌으로 되였다가 후에 소형향진을 취소하고 행정관할구역을 넓히면서 천교령진 행정관할소속으로 된 신선동, 툰지구, 태양, 상수, 빠인골 등지는 모두가 집단이주민들이 개척한곳이고 조선인들의 집성촌이였지만 현재는 태양촌만이 홀로 집성촌으로 남았다.

태양촌은 지금까지 초기이민들이 지켯던 민족집단적인 무형의 관습이 경상도생활습관과 마을운행기제를 고착시켰는데 그것은 배타성과 족장적인 관습이 아니라 타관땅을 개척했던 소집단체의 의기의 투합이고 결성으로 해석할 일이다.

태양사람들은 지금도 지주와 부농의 개념에 대하여 삭막하다. 태양촌에는 지주도 부농도 없었다. 가근방에서 딸가진 부모들이 태양으로는 시집안보낸다는 말이 류전될만큼 태양촌사람들이 일본새가 억척하기로 소문이 났다. 그런데다 남도사람들 특유한 강잉한 성격까지 가세하여 지금까지 알뜰한 경상도혈통을 유지하고있는지도 모른다.

박물관에서조차 볼수 없는 상여와 상여집은 아직도 태양촌에 건재하고있다. 문화대혁명시기 주촌장부친이 분김에 상여집을 불에 태운후 태양촌사람들은 다시 상여를 만들었고 마을뒤에 자그만한 상여집을 따로 만들고 지금도 보전하고있다. 주촌장을 따라 상여집을 가보고 난생 처음으로 상여를 보면서 우리 민족의 민속과 상례법에도 령혼이 숨어 있다는것을 느꼈다.

아직도 건재하고있는 태양촌의 민속습관과 집성환경에 대해 길림성과 왕청현 관계부처에서도 고찰하였고 왕청텔레비죤방송국에서는 《문화력사의 고장》이란 전문프로까지 제작하면서 민속촌건설방안도 모색중이라고 한다.

3《지들 입쌀은 태양표라카이》

논이 있는곳이면 조선사람들이 있고 조선사람들이 사는곳에 논이 있다는것은 이제 통설로 자리잡은지 오라다.

태양촌의 논은 이주후 해마다 괭이와 지게로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서 130헥타르까지 논밭으로 만들었는데 이 몇년간 해마다 파답하면서 이제 40여헥타르밖에 안된다. 일군들이 외지로 나가면서 로동력의 하강, 인구의 급감이 그 원이이라고 올해까지 4년차로 련임하는 주촌장이 밝혔다.두호에서 평균 1.5명이 로무로 출국했거나 남방 대도시로 나갔다면 태양촌의 인력자원은 이제 날로 고갈되고 인력후보들도 전무한 형편이다. 이런 형편에서 이제 태양촌의 유일한 출로는 태양표록색입쌀에 있다. 실제로 왕청현정부에서도 작년에 30만원을 충당하여 촌에 쌀가공소도 건설하고 태양촌의 특수한 토질과 수질에 알맞는 록색벼를 생산하도록 정부차원에서 부추긴다고 했다

태양촌은 지리적으로 산간지대에 위치하고 오지에 속하지만 소추수수입도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우중충한 산도 태양촌민들의 부의 창출에는 무척 린색하다.하지만 산에 의거하지 못하면 벌에 이거할수도 있다. 태양촌 사람들이 손수 개척한 경작지만도 200헥타르에 달한다. 태양촌은 뒤벌이 산간지대로서는 대단할만한 평원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무자위 논밭이 질서있게 누워있다. 그만큼 땅의 혜택을 받고있는데 그것이 바로 태양산입쌀이다. 하지만 현재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모내기철 하루의 일당 고용비용이 70원을 웃돌고 가을도 마찬가지 사정이라면서 이제 절실하게 필요되는것이 모내기기계와 소형수확기라고 주촌장은 념원한다. 태양입쌀은 가근방에서도 소문이 있는것만큼 질이 좋고 찰지다. 이것이 다시 록색으로 진정한 태양표로 거듭 탄생하기엔 아직은 초창기에 있지만 이제 왕청은 물론 연변지역, 타지역에까지 태양표로 출시할 날이 있을것이다. 그때를 고이 기대해 본다(최호, 최국철기자).

  래원: 연변일보 (편집: 김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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