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뉴스>>불멸의 발자취
적들의 포화를 뚫고나온 전투의 나날들
2006년 07월 31일 09:42 【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전투영웅 고광동

1926년 8월  5일,  고광동은 경상북도 안동군  월곡면  주진동의 한 빈곤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1937년 겨울,  고광동은 정든 고향을 떠나 서란현 대일향 하대툰에 이주, 11살 어린 나이에 벌써 지주집의 소를 먹이고 나무를 하면서 등허리  휘도록 일했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1945년 12월,  전송(田松)부대가 서란을 해방, 1946년 1월 고광동은 서란현보안퇀에 가입했다. 후에 동북민주련군 제1종대 38군 3사 7퇀 3영 9련으로 편입, 1948년 부대는 중국인민해방군 38군 114사 304퇀으로 편입되였는데 이때 고광동은 선후로 반장, 부패장, 패장을 담임하였다. 참군한  5년동안 고광동은 동북에서부터 해남도까지 100여차례의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두번이나 적의 또치까를 폭파하였고 3차나 《전투영웅》칭호를  수여받았다.

1946년 겨울, 부대는 명령을 받고 서란 서남쪽의 토비를 숙청한 후 구태현으로 전이하여  기탑목(其塔木)에 있는 한개 영의 국민당군대를 공격하였다. 기탑목에 주둔하고있는 부대는  국민당왕패(王牌)군으로서 미군식 군사장비를 갖추었을뿐만 아니라 훈련에 소질이 있고 사상이 완고하고 작전에 용맹했다. 적군은 저마다 몸에 수류탄을 묶고 아군의 진공을 저애하려 시도했다. 전투는 아주 치렬하였다.

고광동이 소속된 반은 전  퇀의  《전투모범반》으로 전사들은 선두에서 적진을 향해 돌격하였다.  적군과 아군은 골목마다에서 판가리전투를 벌였다. 부반장 고광동은 매차 전투에서 모두 용감무쌍함을 보여줬다. 적의 탄약창고를 진공할 때 그는 3명 적군과 육박전을 벌였고 적군 패장 한명을 포로하고 중기관총 한대를 로획하였다. 일주일간의 생사판가리전투를 거쳐 아군은 기탑목전투의 승리를 쟁취하였으며 400여명의 적군을 소멸하고 100여명을 포로하였다. 그번 전투후 고광동은 조직의 비준을 거쳐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후 부대는 장춘을 해방하고 공주령을 공격, 철령을 점령하고 개원을  해방하는 전투에 진입하였다.  고광동은 완강한 전투정신,  기민성과 용감성, 경상에는 절대 화선에서 물러서지 않는 정신으로 부대 지도자들로부터 《동북범》이라고 불리웠다. 1947년 11월,  동북민주련군 제1, 제3, 제6 종대는 련합작전하여 사평에 도사리고있는 국민당 신1군, 신6군을 향하여 총공격을 개시했다.  국민당은 사평성밖에  견고한 봉쇄선을 설치, 전투는 극히 간고하였다. 총공격이 시작된 후 고광동이 소속한 사는 진공저애를 받았다. 한  또치까의 방어가 상상밖으로 견고하여 대포와 각종 중경기관총 화력을 집중하여도 방어를 뚫지 못해 아군은 손실이 막대하였다. 지휘소에서는 3개 종대에서 용감하고 경험있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6명 당원을  선발하여 폭파조를 조직하였다. 사부에서는 고광동을 선발하였다. 6명 폭파조 전사중  고광동은 유일하게 동북적 전사였고 그 외는 모두 남방에서 온 전투경험이 풍부한 로전사들이였다. 그들은 《당과 인민의 위탁을 저버리지 않고  견결히 임무를 완성하겠습니다!》라고  당기앞에서 선서했다.

포연이 자욱한  어둠을 빌어 폭파조 6명 전사들은 사람마다 80근씩 되는 폭파약을 메고 중화력의  엄호하에 철조망을 끊고 적의 전호를 지나 또치까에  접근하였다. 홀연 적의 또치까 좌측 엄페된 곳에서 한줄기의 총알이 날아왔다. 도화선을 당기려던 두명 전사가 쓰러졌다. 적의 엄페된 화력망이 또치까에 접근하는 폭파조의 길을 봉쇄하였다.

《엄호하시오. 제가 가서  폭파하겠습니다!》

고광동의 웨침소리에 전우들은 일제히 화력을 집중해 수류탄을 뿌렸다.  고광동은 포복전진하여 도화선에 불을 달았다.

  《꽝!》

천지를 진감하는 소리와 함께 적의 또치까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500근이나 되는 폭파약의 위력에 고광동을 엄호하던 3명 전우들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고광동은 도화선을 당기고  몸을 돌리는 순간 적들이  파놓은 구뎅이에 빠졌다. 구뎅이에 빠진 고광동은  거대한 진동소리에 정신을 잃었다. 그가 깨여났을 때 머리에서는 아직 피가 흐르고있었다. 그는 옷을 찢어 머리를 동이고는 구뎅이에서 기여나왔다. 이번 전역에서 해방군은 적군 5000여명을 소멸하였다.  민주련군총부에서는 고광동에게《전투영웅》칭호를 수여했다. 

1948년  9월,  동북야전군은 중앙군위의 통일적인 포치하에 료심전역을 조직하였다. 고광동은 저명한 흑산저격전에  참가하였다. 흑산은 지리위치가 중요하여 심양의 적들이 금주를 지원하는 필경도로였다. 금주가 아군에게 공략된 후 황망히 관내로 도주하며 금주를  지원하는  료요상(廖耀湘)부대는 흑산을 점령하고 첩첩으로 되는 포위를 돌파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영구를 통해 해상으로 도망하려고 시도하였다. 때문에 흑산은 적아 량군이 필연적으로 쟁탈하는 전략요충지였다.  적군의  한개 퇀이 흑산의 유리한 진지를 차지하였고 게다가 화력이 맹렬하여 아군은 여러차례 진공하여도 성공하지 못했고 손실이 아주 컸다. 만약 빠른 시간내에 흑산을 공격못하면 이번  저격임무는 실패할뿐만 아니라 후과는 상상도 못할 일이였다.  퇀에서는 고광동이 소속한 련대에 진지를 공격할 명령을 내렸다. 부패장인 고광동은  기발한 생각을 내놓았다.  어둠을 빌어 적진에 진입하여 기회를 타 적들을 기습하고 교란시키자는것이였다. 상급에 청시한 후 련에서는 고광동의 요구에 동의하였다.

캄캄한 야밤  고광동은 적군의 련급 군관차림을 하고 어둠의 엄호하에 적의 진지에 진입하여 적군 련장의 신분으로 초소에 혼입,  기민하고 용감하게 3명의 《혀》를 잡아 련부에 돌아와 심문했다. 심문을 통해  적군부대의 번호, 련급군관 이름, 구령 등을 장악한 고광동은 하루밤사이에 적의 군영을  여러  번 드나들었다. 이른 새벽 아군은 흑산에 주둔하고있는 수비군을 향하여 대규모적인 진공을 하였다. 금주가 아군에게 점령되면서 독안에 든 쥐신세가 된 적군은 사기가 저락되여 추호의 전투력도 없었다. 이미 적의 진지에 진입한 고광동은 《빨리 후퇴, 빨리 후퇴!》  하고 소리높이 웨쳤다. 적군의 패장이 《이건 누구  명령이야?》하고 묻자 고광동은  침착하게 《퇀장의 명령이야, 빨리 후퇴》라고 말했다. 적군은  후퇴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뿔뿔이 도망쳤다. 아군은  승승장구로 진군하여   흑산진지를 탈취하였다. 흑산저격전의 최후 승리를 취득한 후 군에서는 일당백영웅 고광동에 대한  미담이 전해졌다. 그는 또 《전투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동북이 해방된 후 고광동이 소속된 38군은 비밀명령을 받고 관내에 진입하여 화동해방군과 함께 천진을 해방하는 전투에 뛰여들었다. 고광동이 소속된 련대는 천진을 해방하는 선두부대였으며 주공임무를 담당하였다. 고광동의 패는 전 련의 돌격패(尖刀排)였다. 천진을 수비하는 적군 진장첩은 완강하게 저항하며 천진성주위에 너비 20메터,  깊이 1장(丈)의 호성하를 울타리로 삼고 화력을 집중하여 해방군의 진공을 가로 막으려 하였다.

1949년 1월,  해방군은 천진성을 향하여 총공격을 개시했다. 적의 진지는 삽시에 포화속에 휩싸였다. 돌격나팔소리와 함께 천군만마가 사태처럼 적군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고광동의 돌격패가 천진시교 전력청사에 접근할 무렵 갑자기 3층에서 몇대의 기관총이 총구멍을 내밀더니 아군을 향해 불질, 십여명 전사들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삽시에 호성하는 선렬들의 붉은 피로 물들여졌다.

적들의 화력망을 까부시지 않으면 아군은 막대한 손실을 초래할것이였다. 폭파를 책임진 전우들이 련이어 적들의 총탄속에 쓰러졌다.  이 긴급한 관두에 고광동은 또  20킬로그람되는 폭파꾸레미를 메고 아군의 공병들이 부설한 부교(浮橋)를 지나 적군의 밀집한 포화를 뚫고 앞으로 돌진하였다. 전우들의 엄호하에 고광동은 신속히 청사의 2층에 올라섰다. 도화선을 당기는 순간 고광동은 몸을 날려 호성하에 뛰여들었다.

하늘땅을 뒤흔드는 폭파소리와 함께 적군의 화력망은 금방 벙어리가 되였다. 하늘로 날아난 폭발물들이 고광동의 머리와 왼쪽다리에 들씌워져 그는 지각을 잃었다. 후에 그는 전우들에 의해 구원되였다. 천진을 해방하는 전투에서 고광동은 세번째로 《전투영웅》칭호를 수여받았다. 

북평(북경)이 평화적으로 해방된 후 고광동이 소속된 38군은 하복성 고안(固安)현에서 40일간 훈련, 군부에서 소집한 공로축하대회에서 고광동은 《전투영웅훈장》을 수여받았다. 1949년 여름, 해방군 38군은 47군과 합작하여 의창(宜昌)전역을  개시하였다. 의창성외의 한 산봉우리를 공격하는 전투중 고광동의 한개 패는 적군과 격전을 벌였다. 우리 포병부대의 엄호하에 고광동은 전사들을 인솔하여 사면으로 산봉우리를 향하여 포위진공하였다. 하루도 안되는 전투를 통하여 아군은 산봉우리를 점령하였고 적의 또치까 하나를 까부셨으며 30여명을 포로, 10명을  격사하였다. 1950년 4월,  고광동은 전우들과 함께 운남의 건수(建水),  하구(河口)를 해방하는 전투중 35명을 포로,  10명을 격사, 권총 35자루를  로획하였다. 의창, 건수, 하구 전투가 끝난 후 부대에서는 고광동에게 대공 1차를 기입했다.

1950년 6월, 중앙군위 명령에 따라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에 나가 참전하였다. 고광동은 조선중앙보위군 직속 603부대에 편입되여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중국해방전쟁중 여러차례 부상을 입어 왼쪽다리가 잔페로 되여 륙군병원에 호송돼 치료를 받은 후 1950년 10월 17일 부대에서 제대되여 집에 돌아와 농업로동에 종사했다. 

복원후 35년간 그는 생산대대 당지부서기, 대대무장위원 직무를 담당하였으며 농사일에도 군인다운 잽싼 솜씨를 보여 공사와 대대에서는 그를 《강철사원》이라 불렀다. 그는 선후 5차나 서란현 로력모범대회에 참석하였으며 《로력모범》칭호를 수여받았다. 

올해  81세 고령인 고광동은 여전히 충만된 열정으로 여생을 보람차게 보내고있다.

  래원: 길림신문 (편집: 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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