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추악(李秋岳), 녀, 원명은 김금주(金錦珠)이며 장일지(張一志), 류옥명(柳玉明) 등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1901년 조선 평안남도 중락도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리추악은 7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따라 한편으로 공부하면서 한편으로 로동하면서 빈곤한 생활에 모대기였다.
1919년 3월 1일, 조선에서 전민적인 《3.1》반일기의가 폭발했지만 일본침략자의 잔혹한 진압을 받았다. 리추악과 양림은 이 피비린 투쟁에서 서로 지지하고 격려하면서 심후한 감정을 쌓았으며 혁명반려로 되였다. 10월혁명승리의 영향밑에 리추악은 혁명 서적과 간행물들을 탐독하고 혁명리론을 학습하였으며 맑스-레닌주의를 전파하고 민족독립과 조국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혁명의 길에 들어섰다.
1920년초, 양림은 일본침략자의 지명수배를 받아 조선국내에서 계속 활동할수 없었으므로 중국으로 건너왔다. 그후 리추악은 조선에서 4년넘도록 반일투쟁을 견지하였다.
1924년말, 리추악은 적들의 수색과 체포를 피해 조선을 떠나 양림을 찾아 중국 광주로 왔다. 이때로부터 그녀는 중국에서의 혁명활동을 시작하였다.
1925년 2월, 리추악은 광동국민혁명군 동정군의 선전대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가을, 그녀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황포군관학교에서 사업하고 학습하였다.
1927년 8월, 당조직에서는 리추악과 양림을 쏘련에 파견하여 맑스-레닌주의와 군사기술을 학습하게 하였다. 1930년봄, 두사람은 귀국하여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중공만주성위기관에서 사업하였으며 얼마후 중공동만특위로 파견되여 사업하였다. 리추악과 양림은 적극적으로 군중을 발동하여 비밀적인 군중조직과 혁명무장을 건립하였다. 리추악은 가는 곳마다 항일연설을 발표하여 중조인민이 련합하여 항일무장을 조직하고 공동히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반격할것을 호소하였다.
1931년겨울, 리추악은 만주성부녀위원회에 조동되여 사업하였다. 그녀는 늘 공장과 시민들 속에 들어가 항일구국의 리치를 선전하였으며 녀성들을 발동하여 항일구국활동에 참가케 하고저 많은 선전과 조직 사업을 하여 당조직과 동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1932년가을, 중공만주성위에서는 리추악을 중공주하(珠河)중심현위에 파견하여 사업하게 하였다. 그녀는 선후로 현위 위원, 부녀부장, 철북구위서기 등 직무를 맡았다. 그녀는 군중들속에서 위망이 아주 높았는데 조일만과 마찬가지로 주하반일유격구의 저명한 항일녀영웅이였다.
1934년초, 중공만주성위에서는 다시 그녀를 주하현위에 파견하여 사업하게 하였다. 1935년가을, 적들은 많은 괴뢰군을 집결하여 주하유격구에 대한 잔혹한 소탕을 진행하였다. 리추악은 철북군중들을 이끌고 합동지대(哈東支隊)에 탄약, 옷, 신발과 식량을 운송하였으며 의료구호지원사업을 하였다. 만주성위와 주하중심현위의 지시에 따라 그녀는 또 철북혁명군중을 이끌고 방정(方正), 연수(延壽) 유격구를 개척하였으며 중공연방특지서기(延方特支書記)를 담임하였다. 리추악은 반년간의 시간을 들여 반일회조직을 창립하였으며 중공방정현위를 조직, 편성하였다.
1936년 2월, 당조직은 그녀를 통하(通河)에 파견하여 반일회조직을 건립하고 항일투쟁을 진행하게 하였다. 리추악은 반년간의 선전과 조직 사업을 거쳐 4개의 반일회조직과 통하지역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함으로써 통하지역의 항일활동을 위해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
1936년 8월 27일, 리추악은 적들에게 체포되여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시종 굴복하지 않았다. 적들은 그녀가 철석같은 항일의지를 지닌 항일전사임을 보아내고 1936년 9월 3일, 그녀가 체포된지 7일째 되는 날 통하현성 서문밖에서 그녀를 총살하였다. 그때 그녀의 나이 35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