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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철부— 백색구역의 맑스주의자
2006년 11월 10일 11:29 【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1

 

모택동동지께서는 일찍 연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화북당에서 림시중앙의 모험주의에 대하여 일찍 예리한 반대의견을 내놓았는데 수령은 리철부동지이다.

 

조선공산당 조기 당원이며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인 리철부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일찍 하북성당위원회 선전부장과 조직부장 천진시당위 서기로 활동하던 걸출한 혁명가였다.

 

리철부, 원명은 한위건으로서 1901 조선 함경북도 홍원의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리철부는 고향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열세살때인 1914년에 경성에 올라가 오성중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오성중학교는 조선의 애국지사들이 꾸리는 학교로서 학생들의 절대다수가 배일사상이 강하였다. 리철부는 오성중학교의 진보적인 교원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점차 반일사상이 싹트게 되였다.          1917 오성중학을 졸업한 그는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의학을 전공하는 한편 본격적으로 조선독립운동의 선배들과 손잡고 비밀리에 학생운동을 벌려나갔다.

 

3.1운동 일제는 혁명자들에 대해 잔혹한 탄압을 감행하였다. 1919 4,  리철부는 적들의 체포를 피하여 사랑하는 고향을 떠나 망명의 길에 들어선다. 그는 쏘련에 갔다가 후에 조선독립지사들이 집중되여있던 상해로 왔으며 1920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4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리철부는 다시 조선 경성으로 돌아가동아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조선공산주의자들과 련계하여 공산주의운동을 하였다.

 

1926, 리철부는 조선공산당맑스-레닌주의동맹 가입하고 조선공산당 3차위원회 중앙위원으로 당선, 1928 조선공산당 3 체포사건이 발생한후 리철부는 수사를 피하여 상해로 망명한다.

 

상해에 도착한 리철부는 중국공산당과 련계를 가지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며 당중앙의 지시에 의해 북평으로 당사업의 새로운 임무를 맡는다. 시기 그는 선후로 북평시 반제동맹 , 서기, 중공하북성위원회 선전부장으로 활약하였다.

 

2

 

1930년대초, 북평은 일제의 동북강점으로 말미암아 항일구국의 노도가 세차게 일고있었다. 북평에서 리철부는 림풍 동지들과 손잡고 반일투쟁을 령도해나갔다.

 

1933 5 18, 리철부동지는 성당위 대표로 북평반제독맹 , 회의에 출석하는 기간 서성의 호텔에서 동지들과 접선을 하다가 불행히 국민당특무들한테 체포되였다. 리철부는 북평공안국 3 간수소에 감금되였다. 철창속에서 리철부는 자기의 신분과 당의 비밀을 폭로시키지 않았다. 리철부한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적들은 그를 남경으로 압송하였다.

 

중국공산당 지하조직과 조선혁명단체들은 리철부를 구출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한다.

 

중공당사연구실 황소동비서장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당은 인차 그를 구출했지요. 조선측에서도 조직적으로 나서서 협상했기에 인차 남경감옥에서 나오게 되였지요. 그리고 북방으로 다시 계속 지하활동을 했지요.  보증을 서고 보석 출옥시켰습니다.

 

리철부는 출옥후 한동안 남경에 있다가 또다시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천진으로 갔다. 당조직에서는 리철부동지의 안전을 고려하여 장수암이라고 부르는 녀성동지와 부부로 가장하고동거생활을 하게 하였다.

 

당시 북평과 천진의 지하당조직은 엄중한 파괴를 받았으며 많은 동지들이 체포되여 희생되였다. 

 

중공하북성위 선전부장이였던 리철부는 당조직이 파괴되는것을 가슴아프게 생각하고 당조직에 자기의 견해를 표명하기로 작심했다.

 

이러한 글에서 리철부는 당의 좌경로선의 오유를 비판하고 하루빨리 전당을 볼쉐위크화해서 진정으로 혁명리론으로 무장하여 좌경로선을 청산하고 무모한 희생을 피하고 자기 혁명력량을 더욱 키워야만 중국혁명이 승리할수 있다고 했다.

 

이때로부터 그의 비극인생이 시작된다.

 

중앙에서 파견한 북방국의 좌경모험주의자들은 리철부동지가 써낸 의견서를 보고 노발대발하면서 하북성당위와 전체 당원들에게잔혹한 로선투쟁을 전개하라 지시하였다.

 

좌경기회주의자들에 의해 리철부동지는 당에서 축출되였다. 장수암동지도 리철부의 주장을 지지했으므로 같은 타격을 받았으며 성당위에서는 그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리철부동지를 지지하던 성당위의 주요책임자들도 타격을 받는다.

 

3

 

1935 12 9, 북평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반대하는 성세호대한 애국운동이 일어났다. 소식이 천진에 전해지자 리철부와 천진의 광범한 애국학생들은 12 18 항일구국 대시위를 진행할것을 결정하였다. 리철부동지는 여러 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삐라를 인쇄하고 시위대오의 전진로선을 확정하였다.

 

12 18, 리철부동지가 령도한 시위대오는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구호를 웨치며 범상학원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중앙인민방송국 역심인 김형직선생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리철부가 지하당원과 학생들을 소집하여보니 불과 백명밖에 안됐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락심하지 않고 구호를 웨치며 거리로 나섰습니다. 범상학원에서 학생들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라고 부르며 프랑카드를 들고 기발을 날리며 나서자 시민들이 호응하기 시작했습니다. 해광사와 금강문을 지나자 군중들이 대오에 합세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 갇혀있던 학생들도 잇달아 교문을 밀치고나와 시위대오에 합세했습니다. 대오가 만여명으로 늘어났지요. 해광사에 도착했을 앞에 일본병영이 있었댔습니다.

 

일본침략자들은 기관총을 걸어놓고 사격자세로 시위자들을 위협하였다. 이때 리철부동지는 두려움 없이 앞장에 서서 학생들과 팔을 겯고 구호를 웨치면서 전진하였다. 혼비백산한 놈들은 감히 사격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날 점심 12시수만명의 시위자들은 남개중학교 운동장에 모여 항일구국대회를 열었다. 리철부의 조직하에 일어난 천진의 12 18 애국반일구국운동은 승리적으로 끝났다.

 

1935 1월에 열린 준의회의는 왕명의경기회주의로선을 청산하였다. 준의회의후 당중앙에서는 류소기동지를 천진에 파견하여 중공북방국 서기로 임명하였다. 류소기동지는 와요보회의정신에 따라 좌경오유를 시정하였으며 직접 리철부동지와 면담하였다. 당조직에서는 리철부와 장수암의 조직관계를 회복시키며 이때로부터 리철부동지는 천진시당위 서기를 맡고 류소기, 팽진 동지와 함께 사업하게 된다.

 

리철부는 팽진동지의고모부이다. 장수암의 조카 장결청이 바로 팽진의 부인이였다. 당시 팽진동지는 천진에서 적들에 의해 체포되였다가 출옥후 당조직을 찾아온것이 바로 리철부였다. 

 

실제상 팽진동지는 1935년에 출옥했지요. 그가 출옥후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이 리철부와 장수암이였지요. 팽진동지는 장수암을 매우 탄복하고있었어요. 당시 장결청은 북평녀자사범대학의 학생이였습니다. 장결청은 고모인 장수암의 부탁으로 조직과의 련락사업을 했지요. 다시 말하면 리철부와 장수암의 북경과의 련락을 했댔습니다. 팽진동지도 출옥후 조직을 찾지 못했기에 수암과의 관계로 인차 철부동지와 련계를 달았습니다.

 

장결청, 당시  미모와 덕행 그리고 지혜가 넘쳐났던 처녀는 고모인 장수암과 고모부인 철부를 가장 숭배했다고 한다. 장수암을 따르는 가운데서 그는 고모와 함께 적들의 추격도 당했고 적들에게 체포당하는 가운데서 점차 공산주의전사로 성장했다. 장결청은 철부와 장수암의 련락원으로 철부의 집을 자주 드나들게 되며 그는 이곳에서 금방 출옥한 팽진동지를 만나게 되였다.

 

장결청동지는 팽진동지에 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36 가을 나는 대의사에서 처음으로 팽진동지를 만났다. 나는 그때 편지를 날랐는데 총망히 그에게 편지를 주고 밖으로 나왔다. 당시 그는 회색다부살을 입고있었는데 얼굴은 가맣고  말랐으며 키가 너무나도 커서 마치 전선대와 같았다.

 

서로간의 접촉가운데서 팽진과 장결청은 혁명적인 우의를 맺게 되며 점차 사랑하며 1939년에는 연안에서 결혼하게 된다. 팽진동지와 장결청동지의 금실은 만년에까지 꽃을 피워 사람들에게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겼다고 한다.

 

팽진을 취재한적이 있는 황소동비서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80년대에 저는 팽진위원장을 만났지요. 당시 팽진동지는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매우 존경합니다. 그처럼 간고한 환경속에서도 그들은 남을 도왔으며 더구나 가난한 당원들을 도왔습니다. 적들의 백색테로하에서 많은 당원들이 당과의 련계가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철부와 수암동지를 찾자 그들은 자기들의 생활도 어려우면서도 돈을 내여 구차한 당원들을 구제했지요. >

 

1936 가을, 천진시당위 선전부장이였던 요의림동지는 리철부의 배치에 의해 반공개혁명간행물을 꾸렸다. 당시 그는 편집을 끝마친 원고뭉치를 들고 인쇄에 교부하려고 책방을 경영하는 동지를 찾아갔다가 문어구에서 리철부를 만난적이 있었다. 당의 간행물에 실을 원고를 공개적으로 들고다니는 요의림의 거동을 보고 리철부는 그에게우리들은 언제나 비밀사업기률을 지켜야 한다 말하며자신을 은페할줄 몰라 적들의 타격을 받고 손실을 입은 피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말하였다. 요의림동지는 일을 회상하며 리철부를내가 접촉한 맑스주의자를 존경해마지 않는다 말했다.

 

4

 

1937 5, 당중앙에서는 연안에서 당전국대표대회와 백색구역 사업회의를 열었다. 당시 천진시당위 서기였던 리철부는 류소기, 팽진 등과 함께 화북국을 대표하여 연안으로 가게 되였다.

 

철부동지는 백색지구의 정확한 로선을 대표했습니다. 1937 연안에서 백색구역사업회의를 열었습니다. 철부동지는 당시 천진시당위 서기였기에 류소기, 팽진과 함께 회의에 참가하러 연안으로 가게 되였지요. 당시 장수암동지도 같이 갈수 있었지요. 그러나 당시 천진시당위는 철부가 회의하러 가게 되면 요의림동지만 남아있어야 했지요. 당시 요의림동지는 매우 젊었습니다. 장수암동지는 사업의 전반 국면을 고려하여 <자기가 남아있겠다> 하면서 가지 않았습니다.   황소동비서장의 말이다.

 

떠날 림박 리철부는 사랑하는 안해와 사진을 찍자고 제의한다. 평소에 사진찍기를 싫어하던 장수암이였건만 사랑하는 님과의 석별을 앞두고 흔연히 동의한다. 지금 우리가 볼수 있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리철부의 사진이다.

 

철부동지가 천진을 떠날 그들은 사진 한장을 찍었는데 유일하게 남은 사진입니다. 천진을 떠나며 수암동지와 <우리 함께 오래동안 생활했는데 기념 한장 남깁시다>라고 했습니다. 장수암은 일반적으로 사진을 안찍습니다. 왜냐 하면 수암은 자기가 잘나지 못했다고 느꼈기때문입니다. 그러나 철부의 권고에 못이겨 사진을 찍었지요. 사진이 지금 남아있는 유일한 사진입니다.

 

장수암과 친척들 그리고 동지들은 그들을 역까지 바래주었다. 당시 장수암은 어찌 사진이 리별의 사진이였고 고난 많던 남편의 마지막 길이였다고 생각이나 하였을가?

 

연안시기 로동지들의 회억과 자료를 찾아보고 팽진의 회억을 들어본데 의하면 당시 연안에서도 당의 백색지구사업에 대한 론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류소기동지의 로선이 정확한가를 둘러싸고 진행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철부로선> 토론했지요. 그때 분쟁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후 당중앙에서 결의를 지었습니다. 그때 모택동이 직접 결의를 내렸다고 합니다. <철부동지가 반영한 의견서는 기본적으로 정확하며 철부동지는 훌륭한 동지이다. 소기동지는 백색지구의 대표이다. 철부동지는 백색지구의 맑스주의자다> 하였답니다.황소동비서장의 말이다.

 

회의에서 장문천동지는 중앙을 대표하여철부동지는 당에 충성하였다 평가하였다.

 

류소기, 팽진, 리철부 등은 연안에서 모택동동지의 접견을 받는다. 중앙에서는 리철부가 장기간 백색구역에서 지하투쟁을 하느라고 고생하였고 결핵병으로 몸이 좋지 않은것을 보고 그를 섬감녕서북국에 남기기로 하고 그를 찾아 담화까지 하였다.

 

그러나 적들의 가혹한 심문과 당내 불공정한 대우로 심신이 피로할대로 피로해진 리철부동지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지고말았다. 장기적인 페결핵에 장질부사까지 겹친 그는 1937 7 10 연안 쵸얼구휴양소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6살이였다. 

 

천진에서 연안으로부터 큰형님의 병이 위급하다 급전을 받고 장수암이 불원천리 연안으로 달려왔을 때는 리철부가 서거한지 사흘이 지난 . 그들 혁명부부는 끝내 마지막 작별을 고하지 못한채 영영 헤여지고말았다. 진운동지로부터 모택동동지가 직접 철부로선을 긍정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장수암은 목놓아 통곡하였다고 한다.  연안으로부터 큰형님이 병으로 사망하였다 소식이  천진의 동지들과 친척들에게 전해지자 동지들은 비통속에 잠겼다. 당의 충직한 전사이며 재능있는 지도자의 한사람인 리철부동지의 서거는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 그리고 조선인민의 크나큰 손실이다.

 

당중앙에서는 당과 인민의 훌륭한 아들 리철부동지가 서거한후 성대한 추도대회를 열었으며 신중화보 리철부동지의 략전과 추도회보도를 실었다. 리철부의 유체는 연안 청량산 마루에 안장되였다. 1945 당의 7차대표대회를 앞두고 중공중앙 판공청에서는 리철부동지를 위하여 비석을 세웠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져있다.

 

리철부동지. 조선 함경북도 홍원사람. 1919 <3. 1>조선독립운동시기 전국학생독립운동의 책임자였음. <3. 1>운동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계속하여 조선혁명을 진행함. 조선공산당이 건립된후 중앙위원으로 선거되였음. 1928 중국공산당에 가입. 중공하북성위 조직부장, 선전부장을 력임함. 1937 연안에서 피로로 의해 세상을 떴음. 향년 36. 리철부(일명 한위건). 1945 6 3 세움.

 

그러나 청량산에 세웠던 리철부의 묘소는 아쉽게도 국민당이 연안을 점령할 파괴된것으로 추정된다.

 

리철부동지가 세상을 뜬지 20년후. 중국의 수도 북경.  멀리 모스크바로부터 장수암녀사한테로 편지 한장 날아왔다. 조선에 있는 리철부의 유복자 한영규한테서 편지였다.

 

장수암어머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위건의 아들 한영규입니다. 작년에 저는 쏘련 모스크바 당학교에 파견되여 학습하고있습니다. 저의 집은 평양시에 있는데 집에는 어머님과 안해 그리고 4살나는 아들 철이와 두살나는 딸애 송실이 다섯식구가 살고있습니다. 여름방학기간 모스크바에서 동창생인 중국의 서자영으로부터 아버지가 중국에서 활동하던 상황을 자세히 알았습니다. 아버지와 중국 어머님 정황을 듣고 존경하는 마음을 금치 못해 필을 들었습니다. 금년 7월은 저의 아버지 사망 20돐되는 해입니다. 조건이 허락되면 북경으로 당신도 만나뵈옵고 연안으로 아버지의 산소에 한줌이라도 얹으려 합니다. 서자영으로부터 어머님의 신체상황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때에 치료하여 건강을 회복하기 바랍니다. 이는 당의 사업에 좋은 일입니다. 사진 한장 부쳐드리니 어머님의 사진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그러시면 집식구들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한영규 올림. 1957 9 29

 

편지를 받은 장수암은 울었다. 기쁜 나머지 울었다. 사랑하는 철부의 후대가 있는것으로 하여 기뻐서 울었다. 이제 조선의 아들 영규와 손군인 철이 그리고 송실이를 생각하며 울었다. 이제 저세상으로 사랑하는 철부를 따라가더라도 한이 없었다.

리철부와 그의 부인 장수암
  래원: 연변일보 (편집: 청문)

관련뉴스:
· 리철부는 어떤 사람인가 [2006년 09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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