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우리의 속담에 《고향이 웬수》라는 말이 있다.
어쩌면 그것은 이 글의 주인공 정률성(鄭律成, 아명 부은) 을 두고 생겨난 말일지도 모른다.
태를 묻고 동년의 꿈을 묻은 땅, 조상과 더불어 아버지 산소가 있고 혈육과 친척친우들이 있는 곳, 하루에도 천만번 곱씹어 생각해도 싫지 않은 정답기만 한 고향이건만 그한테는 지뢰밭과 같은 금지구역이였다. 그는 열다섯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가 광복이 나고 3.8선이 생겨났지만 아직 한반도 남과 북에 자본주의나 공산주의가 정착하지 못한 혼란한 시국을 타서 도적고양이마냥 고향을 다녀온 아련한 기억을 안고 사망하기까지 장장 수십년을 고향을 등진 삶을 살았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1933년 고향을 떠나 1976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손 꼽아 헤여보면 꼭 43년, 그동안 고향산천도 네번이나 뒤재쳐 누웠으련만 그의 머리 속에 고이 간직한 고향의 모습은 옹기종기 모여앉은 초가와 그 초가집에 사는 초라한 민초들의 애달픈 모습이였다. 그래서 더구나 고향은 그의 마음속에 남아서 애간장을 끊었는지도 모른다.
방평(放平)은 정률성의 위인을 회억하면서 쓴 《금보다 더 귀중한 그이》(《論鄭律成》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 그는 조선에서 태여났다. 늘 나한테 조선민족의 풍토인정이며 금강산이며 해금강이며 평양이며 황해도며 전라남도며 서울이며를 말해주었다- 매번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그가 얼마나 고향을 사랑하고있는가를 알수 있었다. 그는 아직도 남조선 인민들은 해방되지 못하고있다면서 나하고 유격전을 하러 남조선으로 가자고 제기하기도 했다(제143페지).
이 이야기는 문화대혁명이 극성이던 1960년대후기의 일이었다. 중국은 자본주의사회는 물론이거니와 공산주의사회에서까지도 완전히 따돌림을 당해 유아독존(唯我獨存)하던 때였다. 전국 상하가 우물안 개구리 신세, 대내로는 모든것을 때려부수고 대외로는 세계해방을 부르짖던 시기였다. 바로 그러한 특정된 환경에서 정률성의 고향에 대한 사랑은 이같이 표현될수밖에 없었다. 홀홀단신으로 남조선에 가서 유격전을 한다는것은 일종의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다. 시각적착오는 있을지라도 그의 애향심은 목숨보다 귀중한것이였음을 알수 있을것 같다.
하지만 정률성은 아무리 고향이 사무치게 그리워도 절대 못가는 신세였다.그러므로 그는 방평하고 《작은 배를 하나 얻어 타고》 몰래 한국으로 가자고 했던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밀항을 생각한것이다.
광복과 함께 생겨난 38선은 단순한 군사분계선이 아니였다. 그것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부딪치는 최전방이였다. 그리고 리승만, 박정희의 군사독재하에서 정률성은 낙자없는 총살감이였다. 어찌 보면 그것은 그의 국제적위망을 세워준 두 나라의 군가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정률성을 떠올리면 마냥 귀가에서는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와 《조선인민군군가》의 귀에 익은 선률이 울려온다. 장엄하고 명랑하고 소박하면서도 힘찬 곡조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불타오르게 한다.
1940년 《팔로군행진곡》이라는 제목으로 진찰기변구(晉察冀邊區)에서 첫 공연을 해서부터 지금까지 장장 60년도 넘게 불려오면서 억만 중국인민의 심금을 울려준 노래, 항일전쟁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승리의 한길로 중국인민을 불러온 노래, 그 후의 파란만장의 력사의 곡절과 굽이마다에 진리의 홰불로 타올랐던 노래였다.
그리고 광복후 조선에서 창작한 《조선인민군행진곡》 역시 반세기이상 조선에 뿌리 박고있다.
언극(彦克)은 상술한 두 나라 군가에 대해 이렇게 썼다.
- 특히는 웅장하고 생기가 넘치는 《팔로군행진곡》은 전군에서 제일 환영받는 대렬가곡의 하나였고 항일근거지마다에 보편화되였다. 그리고 건국이후 또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지정되여 군혼(軍魂)을 펼치고 군위(軍威)를 떨치면서 이 나라의 군영마다에서 울려퍼졌다. 이 행진곡은 인민군대의 정신면모를 고도로 개괄하였을뿐만아니라 수백만 인민해방군의 예술적형상의 전형으로 되였다. 《전진, 전진, 전진 태양을 향한 대오-》라고 노래를 부를 때마다 우리의 가슴은 자호감과 힘으로 벅찬다. 매번 국경행사나 행진검열때 이 노래를 들으면 우리는 마치도 당년으로 돌아간듯 무한한 감동을 받는다(《정률성론》 제40페지,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출판).
- 1950년 전쟁년대에 나는 조선전장에서 이 노래(《조선인민군행진곡》)를 들었다. 그때 조선인민군 신입전사들이 전선으로 나갈 때나 부상을 당한 전사들이 후방병원으로 후송될 때나 전사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만났고 또 이 노래를 부르면서 고별하였다. 그들은 서로서로 포옹하였다. 그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이구동성으로 이 노래를 불렀는데 아주 인심을 격동시키는 장면이었다(동상서 49페지).
한마디로 전자는 항일전쟁과 국내 해방전쟁의 나날속에, 후자는 조선전쟁의 포화 속에 불려지면서 군인들의 벗이 되고 힘이 된 노래로서 중국과 조선에서는 전화의 고험을 이겨낸 불멸의 노래라고 하겠다.
당가(唐訶)는 또 이렇게 평가했다.
- 1950년 겨울 나는 중국인민지원군에 편입되여 조선으로 갔다. 매번 조선인민군을 만날 때마다 조선말로 《조선인민군행진곡》을 부르면 인민군 동지들은 우리들과 악수하고 포옹하였다. 언어가 같지 않은 두 나라 군대는 이 군가를 매개로 친밀한 전우로 되였던것이다. 이 두 나라 군대의 행진곡은 작곡가 한사람의 손에서 창작되였다. 이는 세계 음악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의 일이 아닐수 없다(동상서 31-32페지).
중국에서는 정률성을 《당대 섭이》 선성해와 같이 걸출한 작곡가이며 중국 무산계급 혁명음악사업의 개척자의 한사람(王震의 평가)이며 《그의 작품은 우리 나라 음악문화의 보귀한 재부이며 그의 고매한 품덕은 우리가 따라배워야 할 본보기이다》(시락몽의 평가)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현재 조선에서의 평가는 어떠한지 알수 없다. 그러나 《조선인민군군가》가 그대로 불려지고있다는것으로 미루어서 결코 그의 력사적 공적을 무마하지는 않는것으로 짐작된다.
좌우지간 어찌되였든 중국과 조선에서의 그의 위망이 높아가면 갈수록 정률성의 귀향은 가시덤불 험한 길이였다.
2. 정률성 그는 누구인가?
정률성, 그는 누구인가?
그는 조선족이다.
그렇다면 조선족은 누구인가?
《중국민족지(中國民族志)》(중앙민족대학출판사 2003년)에서는 조선족의 족원(族源)에 대해 이렇게 썼다.
총적으로 조선민족은 그 형성과정에서 부단히 여러 종족과 융합되여왔는바 례를 든다면 예족(濊族 고조선 居民), 한족(韓族 辰國의 居民), 연인(燕人 僞滿朝鮮의 부분적 居民), 한인(漢人 조선반도 漢四郡의 부분 居民), 맥족(貊族 고구려 居民) 및 부여인(夫餘人), 옥저인(沃沮人), 두막루인(豆莫婁人) 등이다. 그중에서 예맥(濊貊)과 한족(韓族)은 조선민족의 주체민족을 구성한다(제420페지).
이같이 조선족이 한민족과 뿌리를 같이 하고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나서 현실에 존재하는 조선족의 형성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쓰고있다.
우리 나라의 조선족은 백여년전 조선반도로부터 동북지구로 이주하여 형성한 하나의 민족이다. 기원 19세기후반기로부터 20세기 40년대초까지 네차례에 거쳐 천입(遷入)고조를 이루었다. 첫번째는 기원 19세기후반기이다. 청조(淸朝)는 1875년 봉천성의 봉금령을 페지하고 1881년 길림성의 봉금령을 해제하면서 이 두개 성에 부민국(扶民局), 황무국(荒務局)을 설치하여 초민(招民)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고 파종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조선북부의 연변에 재해가 들어 기민(饑民)들은 떼를 지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천입했다. 제2차 천입고조는 1897년 청조와 로씨야간의 중동철도건설협정이 맺어지고 1903년 통차가 되기까지이다. 조선북부와 연해주로 천입해간 조선인들이 로동력으로 충당되였는데 그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철도연선에 자리를 잡았다. 세번째 고조는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강점한후부터이다. 노예가 되기를 달가와하지 않는 반일지사들과 일본식민지자들의 토지조사에 의해 파산된 농민들이 이주해왔다. 네번째 고조는 1936년 괴뢰만주국과 조선총독부의 이민협정에 의해 매년 조선에서 1만호의 이주민을 받았고 1941년에 일본정부는 《개척단》 명의로 조선남부에서 집단이주를 시켰는데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투항하기까지 동북에 거주한 조선인수는 170만을 넘었다(동상서 420페지).
정률성의 중국으로의 망명은 세번째 천입고조에 해당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형님과 누님들의 영향을 받아 애국애족의 정신을 키워왔다.
아버지 해당은 일제의 수하에서 일하기 역겨워 도시를 떠나 시골에 가서 농사일을 하면서 구차한 삶을 살았다. 주(周)나라의 록을 먹고 사는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여먹다가 굶어 죽은 백의숙제(白夷叔齊)와 같은 굳은 절개를 가진 청빈한 선비라고 하겠다. 그리고 맏형 남근(일명 효룡)과 둘째형 인제는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오라지 않아 일제의 검거선풍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맏형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 비밀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여 1934년 옥사하였고 둘째는 운남강무당에서 주덕(朱德, 중국공산당 팔로군 총사령, 광복후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 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장,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공부를 하였고 대혁명시기 국민혁명군 제24군 중좌참모였는데 무한일대에서 희생되었다. 셋째형 의은은 조선공산당 당원이고 항일투사였고 누님(정봉)과 매형 박건웅 역시 항일투사였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그가 나름대로 고치게 된 그속에 담긴 이야기는 자못 감동적이다.
최문섭선생이 쓴 《불멸의 노래와 더불어》의 한 대목에 잠간 눈길을 멈추기로 한다.
그는 둘째형님이 남겨놓은 유물인 만돌린을 제일 사랑하였다. 어떤 날에는 온 하루 만돌린을 켜면서 노래를 부르군 하였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책망조로
《부은아, 나라를 빼앗긴 신세에 어찌 밤낮 노래만 부르겠느냐?》 라고 하시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정률성은 며칠간 만돌린도 켜지 않고 노래도 부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괴로와하며 그를 불러놓고 말하였다.
《부은아, 만돌린을 타지 말라는 말도 아니구, 노래도 부르지 말란 말이 아니란다. 네가 너무 지나칠가봐 그러지. 외적과의 싸움에서도 최후의 결전엔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승전고를 울렸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