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마당에서 군대가 진군할 때 사기를 돋구는 데는 우렁찬 군가가 있어야 해. 그는 이때로부터 음악에 종신토록 헌신하려는 결심을 품고 아름다운 선률로써 인민들의 심정을 표달하려는 뜻으로 원래 부르던 부은이란 이름을 률성으로 고쳤다(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제18페지).
어릴 때부터 이같은 장한 뜻을 품은 정률성은 1933년봄 셋째형을 따라 중국 남경에 왔고 상해 국립음악전과학교 로씨야인교수 끄릴노와(쏘련 레닌그라드가극원 가수)한테서 성악공부를 하였다. 교수는 그의 음악적 천재를 보아내고 전문훈련을 받으면 동방의 카루소(20세기 서방의 저명한 이딸리아가수)가 될수 있다면서 이딸리아류학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단연 류학을 포기했다. 돈도 돈이겠지만 그보다도 일제의 말발굽에 짓밟혀서 신음하는 조국과 헐벗고 굶주리는 민족의 수난을 외면하고 개인의 명리를 추구할수는 없었던것이다. 1936년봄 그는 남경에서 남경문예계 중국인 청년들의 항일구국조직인 5월문예사에 가입하며 오라지 않아 또 상해에서 조선독립운동가들로 조직된 조선민족해방동맹에 참가한다. 그는 드디여 중조 두 민족은 같은 운명이며 중국인민의 반일해방투쟁은 조선민족은 물론이거니와 동방과 세계 피압박민족의 해방사업과 직결되여있음을 깨닫는다. 하여 1937년 10월 그는 곧장 항일투쟁의 최전방인 연안으로 갔다.
리환지(李煥之)는 1986년 연변에서 가진 《정률성 서거 1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30년대 피가 끓는 청년시기 그는 조선으로부터 고난의 중국으로 왔고 중국인민의 혁명사업에 참가하여 인민을 위해 노래하고 혁명사업을 위해 부지런히 창작하여 자기의 전부의 지혜화 심혈을 이바지했다. 그의 이러한 크나큰 국제주의정신은 중국인민의 운명과 하나로 어울렸다. 그는 인민의 로동과 투쟁생활을 무한히 열애하고 그속에서 창작의 령감의 샘을 발견하고 아름다운 선율로써 중국인민의 혁명투쟁과 로동건설의 위대한 사업을 위해 마멸할수 없는 공헌을 하였다(《論鄭律成》 제1페지).
바로 이시기 연안에서 그는 억만 중국인민의 심금을 울려주는 노래 연안송(延安頌)과 팔로군행진곡을 작곡하였다.
항일전쟁시기에 창작한 그의 가곡에 대해 량무춘(梁茂春)은 정률성론(鄭律成論)이라는 글에서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정률성은 전문으로 작곡을 배운적도 없다. 다만 성악과 피아노와 만돌린 등 악기를 탈줄 알뿐이였다. 그러나 그는 노래를 불러 사람들에게 평화와 희망을 주려는 열정과 조국을 잃은 피맺힌 의분과 광복을 위한 투쟁의 격정을 예술가의 감각에 담아 선률로 표현하였다. 민족의 의분은 우리 나라 30년대 많은 구국가수들을 격발시켰는데 정률성의 그러한 민족적원한과 민족적감정으로 충만된 항전노래 역시 이 시대의 산물이다(《論鄭律成》 제3페지).
이처럼 정률성은 중국인민의 애대를 받는 저명한 작곡가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는 중국사람이 아닌 조선인이였다. 그러므로 연안로신예술학원 강당에서 열린 야회에서 연안송을 듣고 감동을 받은 모택동은 359려단장 왕진을 불러 로신예술학원에 정률성이라고 부르는 재간둥이 작곡가가 있는데 부대의 조선인 동지들을 소개하도록 지시하였고 1942년 8월에는 무정을 따라 태항산으로 가게 되였다. 태항산은 중국공산당이 조선인혁명자들을 배양하는 곳으로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가 있었는데 정률성은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 교무주임을 맡았다. 그리고 광복이 나자 조선의용군의 일부 동지들과 함께 조선으로 가서 인민공화국 창건사업에 직접 참가하게 되였고 또한 이 시기에 조선인민군 행진곡(박세영 작사)을 창작할수 있었던것이다. 바로 이 노래가 지금까지 조선에서 불려오는 조선인민군 군가이다.
그리고 1951년 2월 1일 중앙인민정부 혁명군사위원회 총참모부는 중국인민해방군 내무조령(內務條令)을 반포하였는데 정률성이 작곡한 팔로군행진곡을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정하였다. 그리고 1953년 5월 1일 중앙인민정부 인민혁명군사위원회에서 반포한 중국인민해방군 내무조령에서는 이 군가를 군대의 경축대회(慶典), 의식(儀式), 열병(閱兵)의 사례악곡(司禮樂曲)으로, 방송중 군대절목의 시작곡으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정률성은 두 나라 군가의 작곡가로, 그의 음악은 두 나라 군대의 음악형상의 대표로 되였다.
1951년 4월 정률성은 북경으로 왔다. 중국 예술대표단의 일원으로 쁘라하에서 열린 세계청년연환절 모임에도 참가하고 동구라파 여러 나라들을 무려 여덟달동안이나 방문하기도 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중국공민이 아닌 중국속 조선인이었다. 그가 중국 국적을 가지게 된것은 1952년 이후 조선민족 전체가 중국국적을 획득할 때의 일이였다.
중국민족지에서는 중국 조선인이 조선족으로 고착된 과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있다.
중국 소수민족인 조선족으로 세인들에게 접수되고 승인된것은 신중국성립 이후의 일이다. 1949년에 제정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共同綱領)의 유관조항(條款)에 따라 1952년 국내 최대의 조선족집거지방 길림성 연변에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면서 정식으로 새로운 함의를 가진 조선족이라는 참신한 명칭이 생겨났고 1954년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이 반포된 이후 조선족은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의 신분으로 신중국의 력사무대에 등장하였다(제420페지).
조선족이라는 말은 중국국적을 가진 한민족(한국), 혹은 조선민족(조선)의 대명사이다. 지금도 중국이라는 수식이 없이도 로씨야의 코리안, 재미 한인, 재일 한민족(조선민족)과 구분되는 명칭이다. 그리고 개혁개방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이며 다른 자본주의나라에 거주하는 동포로부터 적대시되여오던 혈육이다. 국제사회의 회오리에 휘말려 혈육간에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한민족의 한 군체이다.
바로 정률성은 그 군체속의 일원이며 대표자의 한사람이다.
반대로 정률성의 삶 그자체는 조선족의 비환력사의 축도이다.
정률성동지는 우수한 공산주의전사이다. 그는 혁명가정에서 태여나 혁명활동에 종사한 조선인이다. 일찍 청년시대에 중국 혁명사업에 참가하였으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8.15》이후 그는 조선으로 돌아가 《조선인민군행진곡》(《인민군 군가》), 《조선인민유격대 전가(戰歌)》와 같은 우수한 작품을 썼다. 50년대초기 그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고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에 들었고 그후 줄곧 우리 나라 사회주의음악사업에 일생을 바쳤다. 그의 일생의 혁명업적과 그의 음악창작의 유산은 중국인민의 영광이며 중국음악계의 영광이며 중국인민해방군의 영광이며 아울러 조선족인민의 영광이다! (론정률성 제118-119페지).
《걸출한 작곡가 정률성을 회억하여》라는 글에서 정률성에 대해 리위(李偉)가 한 말은 모택동, 주덕, 주은래 등 로일대 혁명가들의 조선족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3. 피는 물보다 진하고
우리 민족을 생각할 때면 나는 종종 위나라 조비(曹丕)와 조식(曹植)을 떠올린다. 그들은 조조의 두 아들이였다. 맏아들 조비는 동생 조식이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것을 은근히 질투하여 콩깍지로 불을 지피고 솥안에 콩을 닦으면서 《칠보작시》를 하라고 했다. 일곱발자국을 가는 사이에 시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엄벌을 받을것이라는것이다. 이에 조식은 이런 시를 썼다.
콩 닦는데 콩깍지를 때노니
콩은 가마속에서 읊조리누나
본디 한뿌리 태생이건만
어찌하여 이리 매정하게 달달 볶는거냐?
혈연의 관계로 보면 우리 민족은 뿌리를 같이 한 콩꼬투리속에 있는 콩알과 같다고 하면 적절한 비유가 된다.
그러므로 고향이 있어도 가지를 못하고 부모형제 있어도 만날수 없는 혈육간의 비애는 정률성 한 개인의 운명이 아니였다.
그것은 조선족 모두의 비극이였다.
그것은 지구상 그 어디에 거주하든 20세기를 살아온 우리 민족 머리우에 무겁게 드리운 시대의 흑운이였다.
8천 만 우리 민족이 뜨거운 가마속에서 달달 볶이우는 콩과 같다면 솥밑에서 활활 타는 불길 그것은 리념이엿다. 우리 민족뿐만아니라 지구상 모든 인류를 적아(敵我)로 편을 가르고 살육을 즐기도록 만든 장본인이였다.
다행히 지난 세기 80년대 중국에서부터 불어온 개혁개방바람에 혈육간의 뜨거운 상봉이 이루어지고 드디여 정률성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 민족은 뜨거운 솥안에서 달달 볶이우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콩볶듯 한다는 표현이 우리 민족의 현주소이다. 왕래가 자유로와진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에도 해결하지 못한 여러가지 갈등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모순이 조선전쟁이다. 당시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은 군가를 부르며 남으로 진격했다. 미군이나 한국군한테 그 노래소리는 소름 끼치는 장송곡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한국이나 이른바 조선전쟁에 참가한 련합군소속 나라의 립장에서는 적군의 군가를 만든 사람인 정률성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것을 혹자는 당연지사로 생각할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빗나간 생각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