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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칼럼

희생을 아랑곳 않고 성공을 대업으로 여긴 양개혜

2021년 06월 09일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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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엿한 양씨를 잃었고 그대는 류씨를 잃었거니 양류는 훨훨 구중천에 날아올라…” 소나무와 잣나무 사이에 자리잡은 양개혜 렬사의 묘원은 장엄하고도 엄숙하다. 이곳을 찾아 렬사를 첨앙하고 추모하는 사회 각계 인사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고 있으며 묘소 뒤켠의 화강암 보호벽에 새겨진 모택동의 시 <접련화·리숙일에게>는 사람들의 사색을 ‘호상녀걸’인 양개혜가 분투하던 년대로 되돌리고 있다.

양개혜는 1901년 호남 장사현 청태향 판창(오늘의 개혜진 개혜촌)에서 태여났다. 아버지 양창제는 사상이 진보적인 학자이자 교육자였다. 1913년 양창제는 호남성립제1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양개혜는 아버지를 따라 장사로 이주해오면서 그곳에서 모택동을 알게 되였다.

1918년 양창제는 북경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해 9월 프랑스에로의 고학을 조직한 모택동도 북경으로 오게 됐다. 그 사이에 모택동과 양개혜는 더 많은 접촉을 가지면서 서로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1920년초 양창제가 불행하게도 병환으로 사망하자 양개혜는 호남 장사로 돌아갔다. 그해 8월 모택동이 장사에서 문화서사를 설립하자 양개혜는 서사활동을 후원하고 서사활동에 참여했다. 1920년 겨울 양개혜는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하여 호남 첫패의 청년단원으로 되였다. 바로 이 시기에 그녀와 모택동은 장사에서 소박한 혼례식을 올리고 혁명의 동반자로 되였다.

1922년 양개혜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해 모택동이 호남에서 중공호남구 위원회를 설립하고 구위원회 서기로 되자 양개혜는 구위원회의 기밀과 교통련락 사업을 담당하고 비서, 기밀, 문자자료 인쇄, 련락, 총무 등 여러가지 직무를 겸임하며 모택동의 유력한 조력자가 되였다.

1923년 4월 모택동이 상해 당중앙으로 가 사업하게 되자 양개혜는 아들 모안영, 모안청을 데리고 상해에 와 모택동을 협조해 사업을 전개함과 아울러 향경여와 함께 녀성로동자야간학교를 조직했다.

1925년 2월, 양개혜는 모택동을 따라 소산으로 돌아가 농민운동을 전개했으며 모택동을 협조하여 농민야간학교를 창설하고 교원직을 맡았다. 그해 12월 양개혜는 소산을 떠나 광주로 가 모택동을 협조해 자료를 수집 정리했고 원고를 집필하면서 련락사업을 책임졌다.

1927년초, 모택동은 호남농민운동에 대하여 고찰했고 양개혜는 대량의 조사자료를 분류, 정리하고 깔끔하게 베껴썼다.

대혁명이 실패한 후 모택동은 당의 8.7회의 지시에 따라 상감변계의 추수봉기를 령도했고 양개혜는 세 아이를 데리고 장사 판창으로 돌아가 지하투쟁을 전개했다.

1930년 10월 양개혜는 체포되였다.적들은 모택동의 행방을 캐물으며 그녀에게 모택동과의 부부관계를 끊을 것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라고 했다. 양개혜는 “나의 희생은 작은 일이나 성공은 대업이다”, “바다가 마르고 돌이 가루가 되여도 나와 모택동의 부부관계를 끊지 못한다!”라고 확고하게 말했다.

1930년 11월 14일, 양개혜는 장사 류양문밖 식자령에서 정의를 위해 희생되였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9살이였다.

양개혜는 희생된 후 고향인 판창에 귀장되였다. 현재 양개혜 렬사의 생가, 릉원, 진렬관과 양공묘로 구성된 양개혜기념관은 중국 100개 홍색관광 경전적 명소중의 하나로 되였다.

기자가 료해한 데 따르면 최근년간 개혜진은 홍색관광산업을 적극 육성하고 발전시켜 호남성 2020년 10대 특색문화관광 작은 진으로 평의됐다. 2020년 개혜진에서 접대한 관광객은 연인수로 200만명을 초과했다.

래원: 연변일보(편집: 김홍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