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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칼럼

영원히 후세대를 비춰주는 ‘붉은 마음’-하명한

2021년 06월 09일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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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성 형양현 홍시진 명한촌에 위치한 하명한 생가에는 참관자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고 있으며 일부 참관자들은 생가 앞 평상에서 당과수업을 펼치기도 한다. 오늘날 이곳은 당지의 인기 있는 당사학습, 홍색관광의 목적지로 부상했다.

형양현 사강진 촌민 양화아는 5살 되는 딸애를 데리고 벌써 세번째로 하명한의 생가를 찾았다. 그녀는 “선렬들이 겪은 고생과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을 비교하면서 혁명선렬들의 정신을 대대적으로 선양해야 하고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지금의 행복한 생활이 쉽지 않게 얻어진 것임을 알게 해야 한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확고한 맑스주의자이며 걸출한 공산주의 전사인 하명한(1900-1928)은 자가 계근이고 아버지가 관직에 있었던 호북 자귀에서 태여났으며 12살 때 가족을 따라 고향인 형양으로 돌아왔다. 소년시절 하명한은 가난한 사람들과 가까이하면서 국외 렬강들에 대한 강렬한 불만을 표출했다. 한번은 그가 어머니와 함께 한구를 지날 때 도도히 흐르는 장강에 외국 국기가 걸려있는 함선이 거리낌없이 오가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더없이 분개하여 즉시 “나라의 수치와 한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는 시를 썼다. 1917년 봄, 하명한은 조부의 뜻을 어기고 ‘공업으로 나라를 구하려는’ 꿈을 품고 호남성립 제3갑종공업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5.4운동이 폭발하자 그는 동학들과 교문을 나와 일본 제품 불매운동 등 일련의 애국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 하명한은 장사에서 모택동을 알게 되였다. 1921년, 하명한은 모택동과 하숙형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입당한 후 하명한은 장사에서 로동자운동에 종사하면서 인력거로동자 파업에 참여하여 투쟁을 령도했으며 인력거군들을 대표하여 당국에 “우리는 임대료 인상을 반대하며 우리도 살아야 한다.”는 립장을 엄정하게 표명했고 로동자운동을 령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1924년, 하명한은 중공 호남성위 위원을 맡았고 농업위원회사업을 책임졌다. 1926년 2월, 그는 무한에 도착해 전국농민협회 비서장직을 맡았으며 모택동과 중앙농민운동강습소의 비서를 겸했다. 1927년 6월, 하명한은 호남에 돌아와 성당위 위원 겸 조직부 부장직을 맡았다. 같은 해 7월, 대혁명이 실패한 후 그는 추수봉기를 일으키는 데 참여했다. 10월, 호남성당위는 그를 파견하여 평(강)류(양)특별위원회 서기를 겸임하고 평강농민폭동을 령도하게 하였다.

1928년 1월, 당조직은 하명한을 호북성당위에 파견해 지도사업을 맡도록 결정했다. 1928년 3월 18일, 반역자의 밀고로 하명한은 불행히 체포되였으며 3월 20일 새벽 형장으로 압송되였다. 사형 집행에 앞서 적들은 하명한에게 더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하명한은 높은 소리로 “있다. 종이와 펜을 가져오라!”고 웨쳤다.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겨우 28살의 하명한은 기세가 웅장한 순교시를 썼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단두라도 두렵지 않다. 이 하명한을 죽인대도 수많은 후계자들이 있을 것이다!” 하명한이 희생된 후인 3월 22일, 그의 동생 하명진은 상남폭동에서 영용히 희생됐고 같은해 6월 녀동생 하명형은 적들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못에 뛰여들어 나젊은 생명을 바쳤다. 동생 하명벽, 생질 우의장도 선후하여 혁명을 위해 나젊은 생명을 바쳤다.

최근년간 형양현은 ‘진리를 고양하고 훌륭한 후계자로 되자’를 주제로 하고 일련의 군중적인 기념활동을 진행했다. 하명한의 생가와 멀지 않은 곳에 신축한 ‘하명한 당성교양기지’는 장엄하고 숙연하다. 교양기지내에는 ‘신앙은 빛’, ‘신앙은 철’ 등 주제전람회가 마련되여있다. 대청에는 혁명선배 군상이 전시되여있고 그 우에는 ‘철 같은 신앙’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중공형양현위 당사연구실 주임 탕지춘은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하명한은 생명으로 한수의 신앙찬가를 엮었으며 그는 공산당원의 영원한 본보기이고 하명한을 따라배우는 것은 바로 초심을 잊지 않고 아름다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것이다.

래원: 연변일보(편집: 김홍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