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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칼럼

사형장에서의 결혼식: 가장 순수하고 고상한 사랑

2021년 06월 09일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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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군의 원명은 진섭군이며 1904년 불산의 한 귀국교포의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여났다. 1920년, 진철군은 계화량등녀자학교(현재 불산시 철군소학교)를 다니면서 점차적으로 신문화, 신사상의 계몽교육을 받았다. 1924년 진철군은 광동대학(현재 중산대학) 문학원 예비과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의 국민혁명운동에 적극 뛰여들었다.

1925년, 상해에서 ‘5.30’참안이 폭발한 후 진철군은 광주 ‘6.23’ 반제국주의 애국시위행진에 참가했다. 국민당 우파의 온갖 망론과 제국주의의 흉악한 면모를 보아낸 그의 공산주의 신념은 더욱 확고해졌으며 자신의 이름을 진섭군에서 진철군으로 개명하여 예전의 자신과 결별하고 혁명을 끝까지 진행하려는 결심을 밝혔다. 1926년, 진철군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선후하여 광동부녀해방협회 집행위원회 위원 겸 비서장, 성항파업 로동부녀학교 교무주임을 담임했다. 그는 교복을 벗어버리고 기층에 심입하여 혁명사업을 전개했고 ‘평민야학교’에 가 로동자들을 위해 교수를 진행했다.

1927년 4월 15일, 국민당 반동파가 광주에서 4.15반혁명정변을 발동하려고 하자 진철군은 개인의 안위를 무릅쓰고 귀부인으로 변장한 후 광주유제병원에 잠입하여 반혁명정변의 소식을 병원에 입원중인 중공광동구위 부녀사업위원회 서기 등영초에게 알려주어 안전하게 대피하도록 했다. 4.15반혁명정변 후 진철군은 학교에서 제명되여 향항으로 갔다. 8월, 진철군은 조직의 배치로 주문옹과 부부로 가장하고 함께 광주에 돌아와 당의 사업을 회복했고 광주봉기를 위해 준비사업을 했다.

주문옹은 1905년 광동 개평에서 태여났고 19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일찍 중공광동구위 사업위원회 위원, 광주로동규찰대 총대장, 중공 광주시위 조직부 부장 겸 시당위 사업위원회 서기 등 직을 맡았다. 주문옹과 진철군은 광주에서 집을 세맡고 당의 비밀기관을 구축하고 혁명사업을 전개했다. 1927년 11월 1일, 주문옹은 수천명의 로동자들을 거느리고 왕정위의 공관을 포위하고 체포한 로동자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청원하는 시위행진에서 주문옹은 체포되여 투옥되였다. 광동성위는 즉시 구출소조를 설립했고 진철군은 준비 획책과 구출행동에 직접 참여했으며 아울러 주문옹을 감옥에서 순조롭게 구출했다. 공동한 혁명사업과 구출행동에서 두 사람의 감정은 갈수록 깊어졌다. 1927년 12월 11일 새벽, 광주봉기가 폭발했고 이날 오전 ‘광주쏘베트정부’의 설립을 선고했으며 주문옹이 광주쏘베트정부 인민로동위원 겸 교육부 부장으로 당선되였다. 하지만 반동세력이 신속히 반격해왔고 적아간 현저한 력량 차이로 광주봉기는 결국 실패했고 주문옹과 진철군은 향항으로 철수했다.

1928년초, 주문옹은 중공광동성위 상무위원 겸 광주시당위 상무위원으로 당선되였고 재차 조직의 배치에 따라 진철군과 부부로 가장하여 광주에 돌아와 당기관 재건 사업에 뛰여들었다. 반역자의 배신으로 주문옹과 진철군은 동시에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옥중에서 그들은 온갖 혹형을 당했지만 시종 굴하지 않았고 당의 비밀을 엄수했다. 사형장에 압송되기 전 주문옹은 진철군과 함께 사진을 찍게 해달라는 한가지 요구를 제기했다. 사진 속의 두 사람은 감옥 문 앞에 태연자약하게 서있었는데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1928년 2월 6일 오후, 두 사람은 광주 동쪽 교외의 홍화강사형장에 압송되였다. 길에서 두 사람은 “국민당 반동파를 타도하자”, “중국공산당 만세!”를 높이 웨쳤다. 사형을 앞두고 이들은 가슴속 깊이 간직했던 사랑을 대중들에게 알리기로 결심했고 아울러 장엄한 결혼식을 선포했다.

사형장에서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뚝 서서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사형장은 결혼식장으로 되였고 반동파들의 총소리는 이들 결혼식의 ‘례포’로 되였다.

래원: 연변일보(편집: 김홍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