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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칼럼

중국청년들이 열애하는 지도자 운대영

2021년 06월 09일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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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구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사람이 구하려 하지 않으니 오로지 우리 자신에 의거할 수밖에 없다!” 하얀색 두루마기를 입은 ‘청년 운대영’이 팔을 휘두르며 웨치는 우렁찬 목소리가 화중사범대학 운대영광장 주변에 메아리치고 있다…

올해 4월 29일, 운대영 희생 90돐 기념일을 맞으며 화중사범대학 학생들이 자체로 연출, 공연한 창작작품인 몰입식 주제교양 연극 <안녕, 운대영>이 광장 중앙에서 상연됐다. 광장에는 한백옥으로 빚은 청년 운대영의 조각상이 우뚝 솟아있었고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그는 청수하고도 우아했으며 손에 책을 들고 안경을 걸었는데 두 눈은 정기로 반짝였다. 청년 운대영 배역을 맡은 화중사범대학 맑스주의학원 본과생 왕가호의 목소리는 마치 시공간을 뛰여넘어 청년지도자 운대영과 공감하는듯했다.

운대영의 본적은 강소 무진이고 1895년 호북 무창에서 태여났다. 그는 학생시절에 혁명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고 1918년 중화대학(화중사범대학 전신) 철학학부를 졸업한후 학교에 남아 중학부 주임직을 담임했으며 무한지역 5.4운동 주요지도자의 한 사람이였다. 그는 1920년 리군서사를 창설했고 후에 또 공존사를 창설하여 신사상, 신문화와 맑스주의를 전파했다. 그는 192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23년 상해대학 교수직을 담임했고 그해 8월 중국사회주의청년단 중앙집행위원회 후보위원, 선전부 주임으로 당선되였으며 그가 창간하고 주필을 맡은 《중국청년》은 옹근 한 세대 청년들을 양성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1924년 운대영은 국공합작의 통일전선사업에 종사했고 1925년에 5.30운동에 참여하고 지도했으며 1926년 5월에 당의 파견을 받고 황포군관학교에 가 정치주임 교관직을 맡았다. 1927년 1월 그는 무한에 가 중앙군사정치학교 사업을 주최하고 정치총교관을 담임하면서 혁명을 배반한 장개석, 왕정위의 행위와 단호히 투쟁했다. 7월, 운대영은 중앙의 명령을 받고 구강에 가 중공중앙 전적위원회 위원직을 담임하고 남창봉기의 조직과 동원에 참여했다. 12월 그는 광주봉기의 령도에 참여하고 광주쏘베트정부 비서장직을 담임했다.

1928년말 운대영은 상해에 가 중공중앙 선전부 비서장, 조직부 비서장 등 직무를 맡았으며 일찍 중앙기관 간행물 《붉은기》의 주필을 맡았다. 1929년 6월 그는 중국공산당 제6기 2차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으로 보충선거되였다.

운대영은 호매로운 기세로 가득찬 혁명투사였고 적들이 이를 갈며 증오하는 공산당원이기도 했다. 일찍 황포군관학교에 있을 때 장개석은 운대영을 ‘황포 4흉’의 하나로 간주했다. 국공합작이 파렬된 후 국민당반동파는 줄곧 운대영을 중점 나포대상으로 여겼다. 1930년 5월 6일 운대영은 상해에서 국민당당국에 의해 체포되였다. 옥중에서 운대영은 적들의 온갖 핍박과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1931년 4월 29일 운대영은 남경에서 살해되였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36세였다.

운대영의 정신은 여전히 당대인들을 격려하고 있다. 75세에 나는 화중사범대학 당사연구전문가이며 연극 <안녕, 운대영>의 지도자인 리량명은 운대영은 화중사범대학의 걸출한 학우라면서 운대영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홍색학교력사를 잘 이야기하여 홍색유전자를 계승하는 것은 우리들의 직책과 의무라고 말했다.

래원: 연변일보(편집: 김홍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