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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칼럼

모두를 위해 광명의 길 개척한 구추백

2021년 06월 09일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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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강소리공학원 교육학원 강연단은 <적조곡> 이라는 노래로 당사강연의 첫 강연을 시작했다. 강연단은 구추백의 혁명음악작품을 둘러싸고 강연내용을 구성하여 추백음악의 아름다움을 감수하도록 안내한 동시에 추백정신의 위대함을 체득하게 했다.

구추백은 중국공산당 초기의 중요한 지도자중 한사람이며 위대한 맑스주의자이자 걸출한 무산계급 혁명가, 리론가, 선전가이며 중국혁명 문학사업 정초자의 한사람이다. 1899년 1월, 강서 상주에서 태여난 구추백은 1917년에 북경 로씨야어 특별연수관에서 학습했다. 1920년 《조간신문》 특약기자의 신분으로 쏘베트로씨야에 가서 취재를 했고 선후로 여러편의 통신을 써서 쏘베트로씨야의 정치, 경제, 외교, 로동자조직, 당의 건설 등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소개했다. 1922년, 구추백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3년 1월, 구추백은 귀국하여 《신청년》 등 간행물 주필을 맡고 대량의 정치평론 문장을 발표했으며 맑스주의를 응용해 중국의 국정을 분석하고 중국의 사회상황을 고찰했으며 중국혁명문제를 론증하여 당의 사상리론 건설에 창의적인 기여를 했다.

1925년부터 구추백은 선후로 당의 제4차, 제5차,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 중앙국 위원 및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당선되여 중국공산당의 중요한 지도자로 되였다.

1927년 8월, 중국혁명이 심각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중공중앙은 호북 한구에서 긴급회의(즉 8.7회의)를 소집했다. 회의는 구추백, 리유한이 사회했다. 회의는 토지혁명과 무장봉기의 방침을 실시할 것을 확정했고 대오를 정돈하고 착오를 시정하며 새로운 길을 찾자는 임무를 제기하였으며 구추백을 위수로 하는 새로운 중공중앙 림시정치국을 선출했다. 회의 후 그는 중공중앙 림시정치국 위원, 상무위원, 주석 등 직을 맡았다. 1931년 1월, 구추백은 중공 6기 4중전회에서 중앙지도직무를 해임당했으며 그후 상해에서 로신과 함께 좌익문화전선의 운동을 령도했다. 1934년초, 구추백은 중앙혁명근거지에 들어갔고 1934년 2월 중화쏘베트공화국 제2기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중앙집행위원회 주석단 성원, 중앙집행위원회 인민위원회 교육인민위원으로 당선되였고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정부 교육부 부장 등 직을 력임했다. 중앙홍군 주력이 장정을 시작한 후 그는 남방에 남아 유격전쟁을 견지했고 중화쏘베트구역 중앙분국 선전부 부장을 맡았다.

1935년 2월 구추백은 복건 장정에서 국민당군에 의해 체포되였다. 적들은 그의 신분을 알아낸 뒤 갖은 수단으로 그를 회유하고 투항을 권고했지만 그는 모두 단호히 거절했다. 6월 18일, 구추백은 태연자약하게 사형장으로 나갔고 적탄에 맞아 정의를 위해 장렬하게 희생되였는데 당시 나이는 36살이였다

구추백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신앙과 리상, 책임과 담당은 모두 력사의 페지에 남아있다. 그의 고향인 강소 상주에 위치해있는 구추백기념관은 생가와 기념관 두부분으로 구성되였다. 생가는 원래 구씨집안의 사당이고 기념관은 실물, 사진과 그림, 멀티미디어 등 방식으로 구추백의 혁명적 일생과 빛나는 일생을 전시했다.

“구추백은 청년시대부터 모두를 위해 광명의 길 개척하겠다는 뜻을 세웠다.” 구추백기념관 부관장인 당여옥은 기념관 동쪽의 관광객 중심에 들어서면 첫눈에 안겨오는 구추백의 명언 ‘나는 늘 모두를 위해 광명의 길을 개척하려 한다’를 보여주면서 추백정신을 시각적 정보를 통해 참관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취지라고 소개했다.

래원: 연변일보(편집: 김홍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