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년동안 자취를 감추웠던 항일명장 소검비의 쌍룡도가 근일에 길림성 무송현 북강진 북강촌 주독종가정에서 나타나 항일련군의 극히 보귀한 력사문물로 되였다.
소검비는 1907년에 출생, 어려서부터 무예를 닦았고 1932년 4월에 원 동북군49퇀퇀장이였던 전림이 령솔한 기의부대 ― 동북민중항일의용군에 가입하여 영장으로 있었다.
별명이 《소영》, 《초상비》인 소검비는 1933년 9월에 동북인민혁명군 남만제1유격대가 성립되자 대대장직을 맡고 무송, 몽강(지금의 정우현) 등지의 장백산밀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완강하게 진행하였다. 1935년 4월 18일, 소검비는 3백여명의 전사들을 다섯갈래로 나누어 무송현 만량진을 공격하는 전투를 지휘하였다. 그는 한손에 기관총을 들고 다른 한손에 쌍룡도를 들고 용맹하게 위만군과 싸웠는데 그는 쌍룡도로 위만경찰대장 오현정의 몸을 두쪼각 냈다. 쌍방은 세시간동안 격전을 벌렸다. 적들이 증원부대를 파견하자 소검비는 부대를 이끌고 철퇴, 이동도중 로파구전투에서 좌복부에 부상당했던것이 재발하고 새로 다리에 총을 맞아 부상을 입었는데 추격부대가 뒤를 물고 추격해 왔다. 이튿날 무송현 북강진 고사야산에서 적군과 격전을 벌리던중 몸에 여러발의 총탄을 맞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그때 29세였는데 그와 함께 희생된전사가 22명이였다.
소검비가 희생된후 위만군경찰에서, 새중국이 탄생한후 지방정부에서 여러차례 그가 사용했던 쌍룡도를 찾았지만 종시 찾지 못했었다.
지금 칼을 보존하고 있는 북강촌촌민 주독종의 희억에 따르면 당시 그는 11살이였는데 할아버지와 함께 고사야산 남쪽에서 밭을 붙였단다. 소검비는 부대를 이끌고 땅굴에 와서 밥을 지어먹으려 했는데 마침 적들의 포위에 들어 전사들과 함께 전투중에서 희생되였다는것이다. 당지의 백성들은 《소대도가 대도회를 이끌고 60명의 위만군을 무찔렀다》는 이야기를 다 알고 있다. 소검비가 사용했던 큰 칼은 그의 스승이였던 전림이 준것으로 쌍룡도라 이름하고 두면에 룡을 새겼다. 몇년후 주독종의 할아버지가 늙어죽은 나무 옆에서 그 칼을 발견했는데 기관총과 밥사발도 같이 있었단다. 기관총은 이미 녹쓸어 망가졌고 소검비가 사용했던 큰 칼에는 《소검비대대장》이란 여섯글자가 새겨져 있었단다. 그의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알가봐 칼을 단풍나무속에 감추어 두었단다. 몇년전에 무송현에서 소검비의 묘를 재건하고 기념비를 세웠는데 주독종은 이 일을 생각하고 단풍나무에서 렬사의 유물을 꺼냈다. 두개의 사발(하나는 세가지 색깔로 된 사발, 다른 하나는 청화사발)과 큰 칼은 그대로 있었는데 칼날이 부식되여 있었다. 그것을 집으로 가져와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고 원래 은으로 된 손잡이의 겁질을 벗겨내 은 손목걸이를 만들었었다.
근일에 길림성 문물감정전문가들이 무송현에 와서 이 칼에 대해 검증을 했는데 확실히 소검비가 당년에 사용했던 칼로서 민국시기에 제조한것이라는것을 확인했다. 무송현정부에서는 력사적의의가 있는 이 칼을 이제 곧 락성되는 무송현문화중심의 력사문물박물관에 수장하기로 초보적으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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