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55돐 및 민족단결모범표창대회》에서 기자는 표창을 받고있는 한 낯익은 그의 모습을 또한번 볼수 있었다.
그는 근 10년동안 의지가지없는 여러 민족 아이들과 독거로인 30명을 친인처럼 얼싸안으면서 《사랑의 가정》을 가꿔온 한철범씨(조선족 47세), 그 과정에는 감동적인 사연들이 깃들어있다.
한철범의 인생을 되돌리면 남다른 점들이 짙다. 외아들인 그는 가족의 반대도 무릅쓰고 한족처녀와 결혼했고 좋은 직장을 팽개치고 차업현장에 뛰여든 뚝심있는 사나이다.
한철범씨는 도문시 장안진의 한 농민가정에서 외아들로 태여나 동년과 학생시절을 보냈다. 1985년에 그는 가족의 반대도 무릅쓰고 한족처녀 리계지와 결혼식을 올려 촌민들을 크게 놀래웠다. 1992년말에는 또 남들이 부러워하는 장안진공급판매합작사 사업을 단연 포기한채 대부금 50만원, 친척친구들로부터 모은 자금 10만원, 도합 60만원을 투자하여 연자구와 마반산의 70헥타르 황무지에 7000여그루에 달하는 사과배나무와 락엽송을 심어 다시 한번 사람들을 놀래웠다. 몇년후, 한철범씨는 닫는 말에 채찍질하듯 경치가 아름다운 연자구부근의 산비탈에 《연자산장(燕子山庄)》을 일떠세웠다. 15채의 멋진 민속주택을 짓고 도라지, 고사리, 토닭, 잉어, 토끼… 등 맛갈나는 음식들을 경영하여 찾아오는 손님들의 호평을 자아냈다. 그들 부부의 신근한 로동과 열성으로 산장은 점차 일정한 규모를 이루었고 그들만의 특색을 구비한 관광휴가지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98년 9월의 어느날, 백발이 성성한 조선족로인이 여라문살 되여보이는 남자애를 데리고 한철범씨를 찾아왔다. 아이는 로인의 외손자였는데 부모가 일찍 돌아가 줄곧 늙은 량주가 보살피고있었다. 하지만 생활난으로 외손자의 공부는커녕 제대로 먹여주기조차 어렵게 되자 할수없이 한철범씨를 찾아왔던것이였다. 전에도 한철범씨는 가난한 아이와 로인들을 여러모로 도와준적은 있었지만 그들을 수양해본적은 없었다. 우로는 60여세나는 어머니가 계시고 아래로는 소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있을뿐만아니라 안해가 교통사고로 대장의 일부분을 떼내는 큰 수술을 받아 남의 자식을 수양한다는것은 다소 벅찬 일이였다. 하지만 마음씨가 착한 한철범씨는 차마 로인의 청구를 거절할수가 없었다.
이렇게 맨처음으로 수양하게 된 아이가 바로 당시 14살난 김영호, 그런데 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한철범씨가 영호를 데리고 장안중학교에 찾아가 입학수속을 할 때 영호의 자초지종을 듣던 한 교원이 그애와 운명이 비슷한 《특수학생》 세명을 한철범씨한테 소개하면서 맡아줄수 없겠냐며 부탁을 해왔던것이다. 소개를 듣고보니 역시 딱한 사정들이였다.
《하나면 어떻고 넷이면 어떠랴!》
한철범씨는 두말없이 아이들을 거느리고 산장으로 올라갔다…
소문은 날개라도 돋힌듯 각지로 퍼졌고 그뒤로부터 한철범씨네 《연자산장》을 찾아오는 불우한 아이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들중에는 부모를 잃은 고아와 류랑아들이 있는가 하면 자녀와 친인을 여읜 로인들도 있었고 아무런 로동능력도 없는 지력장애자들도 있었다. 년령과 민족이 다르고 신상이 다르지만 하나같이 불행하고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였다. 그들이 찾아올 때마다 한철범부부는 말없이 산장에 머물게 했다. 이렇게 한철범부부가 접수한 《집체호》성원은 지금까지 무려 60명이나 된다.
식구가 하나둘 늘어남에 따라 골치거리도 많아졌다. 먹고 입는 일상소비를 제외하고도 아이들의 학비, 로인들의 치료비와 약값 등 지출이 점차 큰 부담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던것이다. 어느 한해는 당금 7명 아이의 학잡비를 내야 하는데 호주머니사정이 시원치 않았다. 이를 어찌할것인가? 아이들의 장래에 관련되는 일은 절대 소홀히 할수 없다고 생각한 한철범씨는 《산장》의 황소를 팔아 1400여원에 달하는 학비를 해결했다. 또 학교에서 통일로 운동복을 내줄 때도 한철범씨는 1000원을 내놓아 모든 아이들이 운동복을 입게 하였다. 이렇게 아이들한테 《투자》한 돈이 얼마인지를 한철범자신도 모르고있다.
《돈을 고려했다면 애들을 받지도 않았을겁니다. 애들이 공부를 잘하고 바르게 크기만 하면 되는거 아닙니까?》
지금 《한철범집체호》의 외래인수는 도합 13명에 달한다. 그사이 새로 가입한 성원도 있지만 그가 《졸업》시킨 성원도 많기때문이다. 제일 첫 《졸업생》인 김영호는 1999년 2월에 정부측을 통해 조건이 우월한 한국의 한 고아원에 갔고 초중 2학년때 들어온양정(한족)이라는 녀자애는 초중을 졸업하고 연변외국어학교에 입학했으며리성준은 연변예술학원에 입학하기까지 했다. 한철범씨의 손에서 행복한 만년을 다하고 세상뜬 로인들도 있다. 그럴때마다 그는 손수 로인들의 장례식까지 치러주군 했다.
가끔 한철범씨의 이 거동을 두고 선의적인 비난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제 장사를 잘해 가족이나 잘 돌보면 되지 하필 고생을 사서할게 뭐냐, 대체 바라는게 뭔지》 라고 주변사람들이 말하면 한철범씨는 이렇게 말한다.
《올데갈데 없는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두는것은 사회에 대한 <범죄>라고 생각하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아이들의 미래에 희망이 넘쳐나게 되고 또 나라에도 그만큼 부담을 덜어주는데 이런 좋은 일을 왜 하지 않겠소》
요즘도 한철범씨는 부지런히 뛰고있다. 과수원, 락엽송림과 《산장》 모두가 서서히 수확기를 맞고있는 지금 그는 또 목축업개발을 시도하고있다.
얼마전 도문시 해당 부문에서는 한철범씨의 《집체호》에 대한 조사를 거친후 《애심복리원》으로 정식동록하는데 도장을 찍었다. 이로 하여 한철범씨의 《민간집체호》는 정규화의 길에 오르게 됐다(리혜숙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