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뉴스>>지부생활>>2007년 10월호>>사회인생
조선족 마을의 한족주임 류원동
2007년 10월 12일 15:20 【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저를 처음 만나는 사람은 저를 조선족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도 그렇구요. 우리 집식구들은 이젠 장국이나 김치를 떠나면 못삽니다》

사람좋게 웃어보이는 류원동(한족, 46세), 너무나도 확실한 그의 연변조선말에 기자도 혀를 찰 지경이였다.

그제날 반일운동발원지의 하나이며 시인 윤동주가 살던 마을인 명동촌,조선족이 86.2%를 차지하는 이 력사가 유규한 조선족마을에서 류원동은 촌지부서기 겸 촌장으로 활약하고있다.

1999년초, 류원동이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의 촌당지부서기 겸 촌장으로 임명될 때 그는 이 촌 28명 당원중 유일한 한족당원이였다. 능력은 둘째치고 조선족인구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조선족촌을 한족이 어찌 제대로 거느릴수 있겠냐며 많은 촌민들이 의심하는 눈길을 보냈고 지어 어떤 촌민들은 그 많은 조선족을 두고 하필이면 한족이냐 하는 의견도 없지는 않았다. 당시 류원동의 어깨는 무겁기만 했다.

《빠른 시일내에 우리 촌의 경제를 춰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매개 촌민들이 다 잘살게 할 신심이 있습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주동적으로 사직하겠으니 일단 믿어주십시오》 이것은 류원동이 금방 촌서기로 임명될 때 촌민들에게 한 말이다.

명동촌 마을앞 륙도하에는 나무다리 하나가 있었는데 시간이 오래되고 수리하지 않아 지나다니기가 매우 위험했을뿐만아니라 더우기는 매일 몇십명되는 아이들이 이 다리를 건너야만 학교로 갈수 있으니 학생들과 학부모들한테도 큰 정신압력이였다. 촌서기로 임명된지 며칠 안되는 류원동은 돈을 모아 다리를 수리할것을 제의하고 당지부와 촌민위원회에서 연구토론하고 결정했다. 자금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진과 시, 그리고 촌을 책임진 단위에 찾아가 지원을 요구했다. 이 일은 대뜸 전체 촌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여 촌에서 로력을 내기로 하고 촌민들을 거느리고 다리수리건설에 달라붙었다. 다리를 수리하는 동시에 전화를 가설하는 일도 같이 벌리다보니 하루종일 눈코뜰새없이 보내야 했다. 낮에는 다리수리현장에서, 저녁에는 집집마다 다니며 전화수요정황을 알아보느라 옹근 한달동안 제집일에는 손 한번 대지 못했다. 아침일찍 나가 밤 늦게 돌아오다보니 어떤때는 련며칠동안 딸애는 아버지 얼굴을 못볼 때가 많았다.

한달 넘는 간고한 노력끝에 다리도 통했고 전화도 통했다. 애들이 학교다니기에 근심이 없고 촌민들이 집에서 전화 한통으로 많은 일을 해결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촌민들은 《한족으로만 볼 분이 아니예요. 진정 우리를 위해 일 잘하는 좋은 간부예요.》 라고 칭찬하면서 그에게 믿음을 주기 시작했다.

2000년 8월, 련속 며칠 내린 큰비에 륙도하가 갑작스레 불었다. 류원동은 촌민들을 이끌고 홍수방지대를 조직해 밤낮 언제를 지켰다. 위험할 때에는 류원동이 제일 먼저 깊은 물에 뛰여들었다. 이것을 본 촌민들은 모두 감동을 받고 강 가까이에 사는 촌민들이나 강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촌민들이나 할것없이 류원동을 따라서 물에 뛰여들어 손에 손을 잡고 몸으로 홍수의 충격을 막았으며 모래주머니로 위험구를 막았다. 긴장한 전투를 거쳐 끝내 명동촌은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였다. 사후에 촌민들은 너나없이 《류서기는 관건적인 시각에 목숨도 내거는 사람입니다》 라고 했다.

명동촌은 민족련합촌으로서 조선족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기에 한족지부서기로서 류원동은 사업가운데서 민족단결문제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어느해 설날 아침, 류원동은 한집식구와 모여앉아 물만두를 먹고있는데 두 조선족형제가 그의 집에 찾아와 그들의 아버지가 세상 뜬 소식을 알렸다. 정월 초닷새전에는 아무일도 못한다는 한족풍속습관이 있는데다가 80이 넘은 아버지를 모시고 설을 쇠야 했지만 그는 두말없이 일어났다. 다른 한족촌민들도 류서기의 행동에 감동되여 설날아침이지만 모두 자각적으로 조선족집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이러한 일들에서 명동촌의 조선족과 한족사이의 거리는 가까와만졌다.

민족단결을 틀어쥐는 기초에서 그는 농촌의 경제발전을 첫자리에 놓았다. 이전에는 농민들이 농사로 생활을 유지했고 공예작물을 심으면 수입을 늘일수 있다는걸 알고있었지만 기술이 없고 판로가 없다보니 그냥 해 보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류원동이 임명된후 먼저 시장조사를 진행한 뒤 차례로 항목을 락실하고 판로를 찾았으며 선진적인 기술을 가져와 촌민들에게 보급시켰다. 지금까지 량식과 공예작물비례는 이전의 8:2로부터 지금의 5.5:4.5로 조절되였으며 인당 년평균수입도 1500원도 안되던데로부터 지금의 2500원으로 늘어났다.

제3산업은 경제발전의 중요한 증장점이다. 명동촌의 한 촌민은 농한기를 리용해 닭과 토끼를 길러 팔았는데 경제효익이 너무 높지는 않았지만 일정한 수입은 거두었으며 다른 몇집에서도 병아리를 부화하려고 했다. 류원동은 이 일을 알고 적극적으로 인도했으며 경제효익을 높이려면 선진적인 생산기술과 상당한 규모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직접 세호의 촌민들을 거느리고 외지에 가서 선진적인 부화기술을 배웠으며 시장형세도 료해했다. 목전 병아리를 부화하는 집이 이전의 한호로부터 지금의 여섯호로 늘어났으며 수량도 이전의 만마리로부터 지금의 10만마리로 발전해 년총생산액이 10만원좌우이다.

명동촌은 일찍 반일운동 발원지의 하나이며 시인 윤동주가 살던 마을로서 유규한 력사를 가지고있다. 류원동은 이런 인문우세를 리용하여 2002년 외자 16만 3000원을 인입하고 30호의 조선족촌민들을 위해 초가집을 개조해주었다. 동시에 5만 4000원의 자금을 마련하여 목축업을 발전시켜 60여마리의 우량황소를 구입해 점차 황소수량을 늘였는데 현재 이 항목만 해도 년간 생산액이 50여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저는 공산당원으로서 촌민들과 손잡고 잘 살아보려고 애를 썼을뿐입니다. 촌민들이 잘 살아야 우리 촌간부들이 마음이 편하죠》

겸손과 진심이 어린 류원동의 말이다(리혜숙기자).

  래원: 지부생활 (편집: 김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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