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략력
현일선 조선족, 중공당원, 1942년생, 대학학력. 주당위 선전부 리론처 처장, 부부장을 력임, 연변작가협회 당조 서기, 주정신문명판공실 주임 겸임. 2002년 3월에 은퇴.
1991년 6월 당창건 70주년 전국학술토론회에서 론문 《<두가지 기본점>의 변증적사고》를 발표. 론문집《개혁과 탐구》,《당건설신론》,《21세기에 대한 사고》,《변강의 보고》 등의 편집출판을 주최.
은퇴후 《력사단상》,《과학과 과학정신》 등 수십편의 론문과 수필을 발표.
공무든 사무든 해마다 몇번쯤은 꼭 가야 하는 곳이 있다. 비록 별로 내키지도 않고 심정이 개운한것도 아니고 지어 그날 아주 긴요한 일이 있음에도 따져보면 가지 않으면 안될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장의관이다. 꼭 가야 하는 리유를 살펴보면 첫째는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살아있는 분들을 다소라도 안위하기 위해서이고 셋째는 후날 고인을 떠올릴 때 마지막길을 바래지 못해 유감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고 할수 있다.
매상 이곳에서 유상과 화환을 볼 때마다 또 가슴을 허비는 슬픈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 세상에서 매일 매시각마다 누군가는 죽어간다는것, 죽음이 시시각각 우리를 노리고있으며 그래서 살아있는 우리도 조만간에 죽겠구나 하는것을 감전이라도 되듯 짜릿하게 의식하게 된다.
많은 철학가들이나 문학가들은 《죽음의 미》에 대해 담론했었다. 죽음은 생의 종국이자 신생의 시작이다. 가령 인류가 이세상에 생겨서 죽음이 종래로 없었다면 인류는 아마 지구에서 생존할 공간이 없을것이다. 한 생명의 탄생은 흔히 다른 한 생명의 결속을 대가로 하는것이다. 동물계에서 잔혹한 《약육강식》은 먹이의 생사전환의 연역이요, 자연계의 생태평형의 유지이다. 동일한 물종내에서도 씨짐승의 번성생식은 흔히 퍼그나 비장한 색채를 띤다. 어떤 짐승은 교배를 끝내거나 새끼를 낳은후 곧 죽는다. 그들의 시체는 이제 다음 세대성장에 없어서는 안될 영양품으로 된다. 인류사회에서 생사전환은 더욱 숭고한 방식을 취하고있다. 특정된 장소에서 죽음은 생보다 더 가치가 있는 자기선택이다. 어머니는 해산할 때 영아의 생존을 위하여 결연히 죽음을 택한다. 오늘날 사회의 진보와 인간의 행복은 력사상 정의를 위하여 한목숨 바쳐온 무수한 지사들의 자아희생으로 바꾸어온것이 아니던가!
삶과 죽음은 일보지차라 하지만 같지 않은 두 세상인것이다. 죽음은 물론 비참하지만 인간은 이를 탄연하게 대해야 한다. 한 인간의 죽음은 그 자신이나 친척, 친우들로 말하면 애석하고 비참한것이나 수많은 생소한 사람들로 말하면 별로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다. 가령 우리가 이세상 매개인의 죽음으로 한없이 비통해 한다면 우리는 아마 살아갈수 없을것이다. 고인의 벗이라 하여도 죽음은 산사람이 동행할수도 또 한번 가면 돌아올수도 없는 길이다. 하기에 산 사람은 슬픔을 묵새기며 죽음을 건너서 해해년년을 살아가야 하는것이다. 타인의 죽음으로 하여 생활을 하찮게 여기면서 멀리하고 지어 생활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잘못된 처사이다. 그렇지 않은가? 장의관을 떠나 생기로 넘치는 시가지로 또는 아늑한 저택으로 들어설 때 사람들은 자기가 지금 살아있다는것이 얼마나 다행인지를 깊이깊이 실감하게 될것이다.
타인의 죽음을 탄연히 대할수 있다면 자기의 죽음도 그렇게 대할수 있을가? 죽음은 당신의 공포나 거부에 좌우되지 않는 인간의 필연적인 력사적행정이다. 그러나 사신의 옴은 흔히 별의별 우연성을 띠고있어 파악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렇다고 《시시각각 죽을 준비를 하는》 식으로 너무 비관할것까지는 없다. 락관적인 태도는 생명의 매 시각을 소중히 여기면서 유한의 생명에 더더욱 많은 의의를 부여하는것이다. 그외는 자연의 순리대로 하면 된다.
생명은 하늘이 베풀어준 단 한번의 은혜이다. 사람은 한생에서 자기를 위하여 또 남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할수 있다. 하기에 한 인간의 생명은 그 자신뿐만아닌 타인에게도 속하는것이다. 생명의 참뜻을 단순히 생명체 자신의 감수로만 리해할것이 아니라 생과 함께 부여된 책임과 보다 넓은 사회적관계에서 사고해야 할것이다. 가령 누군가 남과 사회를 위하여 유익한 일을 할수 있을 때 너무 일찍 세상과 하직한다면 그것은 정말 가정이나 사회에 《미안하지 않을수 없는 일》이다. 하기에 책임심이 있다면 인간은 반드시 자기의 생명을 하냥 소중히 여겨야 하는것이다.
생명의 소중함은 죽음의 불가체험성에서도 실증된다. 사람들은 기아와 배부름, 차고 뜨거움, 사랑과 증오, 기쁨과 쓰라림, 영욕 등등에서 하많은것을 체험할수 있다. 그러나 유독 죽음은 체험할수 없다. 여직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적은 없다. 사람은 죽을 때 죽음의 체험을 산사람한테 남기지도 않고 함께 가져간다. 하기에 인간은 많은것을 체험할수는 있어도 유독 죽음만은 체험하지 말아야 한다. 때론 죽음의 선택이 손쉬울수 있어도 계속 살아가기로 작심하는데 더 큰 용기가 수요될지도 모른다. 어려움, 고통, 불행, 억울함앞에서 어떤 이들은 흔히 죽음을 생각하지만 이는 무슨 정의를 위한 장거도 아닌 나부랭이의 명지하지 못한 거동에 불과하다. 한것은 살아가야만이 모든것을 개변시킬수 있을뿐, 죽으면 아무런 가망도 없기때문이다. 삶은 어디까지나 아름다우며 생명은 그 어떤 정황에서도 소중한것이다.
삶에도 삶의 방식이 있다. 생명의 가치와 삶의 의의는 수명의 장단에 있는것이 아니며 영화부귀 등 외적인 표현형식에 있는것이 아니라 자연행정에서 쌓아온 소박한 내포에 있다. 그것인즉 한 사람이 일생동안 대관절 무엇을 추구하는가 하는것이다. 이로하여 《산 송장》과 《살아있는 고인》의 구분이 있게 된것이다. 장의관에서 사람들이 고인을 추모하는것은 생전의 권세나 남긴 재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품덕이 산사람에게 남긴 영구한 기억을 위해서이다. 평범한 인간은 죽은후 그 이름이 청사에 길이 남을수는 없겠지만 어느 한 시기에 일부 사람들의 회억으로 살아난다면 그것은 더없는 위안으로 될것이다.
평소에 사람들은 생활에 바삐보내다보니 죽음을 사고할새 없다. 기실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한 계시를 준다. 하기에 해마다 몇번 장의관에 가는것은 무슨 나쁜것이 아니라 어찌보면 결혼식이나 생일파티에 참가하는것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장의관은 생활의 다른한 수업이기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