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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소평의 퇴직방식은 어떻게 확정되였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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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동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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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생전에 손녀와 함께 즐거운 휴식의 한때를 보내고있는 등소평. |
등소평동지의 만년은 활력으로 충만되였다. 1977년 73세의 나이에 세번째로 정계에 다시 들어섰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유유자적하게 가정의 단란함을 누리는 년세였으나 그는 오히려 이때로부터 눈부신 만년에 들어섰다. 그는 1997년에 서거하기까지 20년동안 중국의 개혁개방과 사회주의현대화사업에 모든 심혈을 몰부어 낡은 동방대국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여기에서 주로 그의 퇴직경과를 이야기하기로 하자.
1989년 9월 4일: 등소평의 사직담화 승용차 몇대가 번화한 거리를 지나 질서있게 후미진 골목길에 들어서더니 한 철문앞에 멈춰섰다. 강택민 등 몇몇 중앙지도동지들이 차에서 내려 사업일군의 안내하에 넓고 밝지만 소박하게 꾸려진 집안에 들어섰다. 등소평동지는 그들과 일일이 악수하고나서 단도직입적으로 그들에게 자기의 퇴직시간과 방식에 대해 상의하자고 말하였다. 중앙책임동지들은 마음속으로부터 그가 퇴직하지 말것을 바랐기때문에 변명하려 하였다.
등소평동지는 손을 저으면서 “퇴직은 이미 결정된 일이고 그러면 좋은 점도 많소.”고 말하였다. 그는 자리를 같이한 정치국 상무위원들의 심정을 리해하였다. 이때는 강택민동지를 핵심으로 한 제3대 중앙지도그룹이 건립된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등소평이 키를 잡을것을 바랐기때문에 그는 내심하게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만약 퇴직하지 않고 사업하다가 죽기라도 하면 세계에서 어떤 반향이 일어날지 말하기 어렵소. 그러나 퇴직해서 확실히 일을 하지 않고 또 내가 있기만 한다면 그래도 도움이 얼마간 있을것이오. 자연법칙은 개변할수 없고 지도층도 부단히 갱신해야 하오. 퇴직이 제도로 되여야 지도층변경이동도 비교적 쉬워질거요.” 그는 퇴직은 이렇게 결정하자고 딱 잘라 표시하였다.
그는 첫대의 담배연기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두번째 담배를 물면서 “두번째 문제는 퇴직방식인데 이 문제에 대해선 반복적으로 고려해보았고 이미 양상곤동지와도 이야기가 있었소. 퇴직을 리용하여 공적과 은덕을 찬양하는것은 필요없고 좋은점도 없소. 깔끔하고 소박하게 즉 중앙에서 나의 요구를 비준해주고 몇마디 말만하면 되오.”라고 말하였다. 그는 중앙책임동지들을 일일이 둘러보면서 “나의 퇴직방식도 그렇고 죽은 뒤에도 그렇고 간소하게 해주길 부탁하오.”라고 말하였다.
등소평동지는 인츰 세번째 문제 즉 자기의 퇴직시의 직무교대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구성된지 3개월도 채 되지 않는 중앙지도그룹을 둘러보다가 눈길이 강택민동지 몸에 가 멈춰섰다.“군위에는 주석이 있어야 하오. 우선 당의 군위 주석을 확정하고 동시에 국가군위 주석도 확정해야 하오. 나는 강택민동지를 군위 주석으로 제의하오.”고 말하였다.
그날 등소평동지는 중앙정치국에 중앙군위주석에서 물러날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써보냈다. 700여자밖에 안되는 이 사직서에는 글자마다 당과 국가, 인민에 대한 로당원, 로공민의 참된 마음이 체현되여있었다. “나의 생명은 당, 국가에 속합니다. 퇴직후에도 나는 계속 당과 국가의 사업에 충성할것입니다” 이 소박한 문자에는 얼마나 많은 심각한 철리와 집착한 정신이 내포되여 있는가!
1989년 11월 9일: 등소평의 퇴직일 늦가을의 북경이다. 등소평동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침밥을 먹고 바깥을 내다보면서 “진눈까비가 적지 않게 내리는구만. 북경은 지금 눈이 와야 될 때지”하며 감개에 젖어 말하였다. 9월 당중앙에 사직서를 바친후 그는 줄곧 자기의 퇴직을 반대하는 일부 동지들을 설복하였다.
11월 9일은 중국공산당 13기5중전회의 마지막 날이였는데 회의에서는 등소평의 퇴직문제에 대하여 최후의 표결을 하게 되였다. 오전 9시쯤 판공실 주임은 등소평동지의 신변에 와서 한참 진행되는 회의정황, 거기에서도 중점적으로 그의 퇴직문제에 대한 토론정황을 회보하였다. 등소평동지는 회보를 통하여 많은 동지들이 점차 그의 퇴직에 대한 결심과 의의를 리해하는것을 알고는 기뻐하며 “결국 이 일이 완성되는구만.”하며 홀가분하게 말하였다.
가족들의 점심밥상의 화제는 자연히 등소평동지의 퇴직문제를 벗어날수 없었다. 등소평동지는 침착하게 “퇴직후 내가 바라는것은 진정한 평민으로 보내며 거리에도 나가보고 여기저기를 다니며 참관하는것이다”고 자기의 심정을 표현하였다. 손녀는 웃으면서 “할아버지는 정말 리상주의입니다”고 말하였다.
오후 3시쯤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한 대표들은 표결을 거쳐 중앙군위 주석직에서 은퇴할데 대한 등소평동지의 요구를 통과하였다.
등소평동지는 우선 먼저 인민대회당 휴식실에서 금방 회의장에서 온 중앙 각 지도자들과 악수하였다. 강택민동지의 제의하에 그들은 일자로 서서 진귀한 력사적순간을 남겼다. 이어서 등소평동지는 강택민동지 등 사람들의 배행하에 등불이 휘황한 대회당에 들어섰는데 순식간에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려퍼졌으며 그 자신도 마음을 진정시킬수 없었다. 공산주의사업과 국가의 독립, 통일, 건설, 개혁을 위해 수십년간 분투해온 로당원, 로공민으로서 이제 일터를 떠나야 했으니 어찌 마음이 평온하랴! 그는 미소를 지으며 침착하게 마이크앞에 서서 “저에 대한 여러 동지들의 리해와 지지에 감사를 드리며 전국대표대회에서 나의 퇴직요구를 접수한것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충심으로 전국대표대회와 동지들에게 감사합니다.”고 말하였다. 이어서 그는 대표들의 가운데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모두들 이 위대하면서도 평범한 로인과 헤여지기 서운해하며 건강장수하기를 축복하였다.
새로 당선된 중앙군위 주석 강택민동지는 등소평을 배행하여 인민대회당문앞까지 바랬다. 강택민동지는 자기 어깨에 놓인 짐이 무겁다는것을 마음깊이 느끼면서 등소평동지의 손을 잡고 “후회없이 나라를 위하여 온 힘을 다 바치겠습니다.”고 한마디로 자기의 심정을 표달하였다.
등소평:
그때의 실수를 모두 모주석한테 돌리는것은 옳지 않다
1980년에 초고한 중국공산당 두번째 력사결의때 어떻게 모주석을 평가할것인가? 어떻게 금방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는 력사 새시기에 한 일들과 모택동 그 일대가 한 탐색의 관계를 볼것인가? 이 두가지 피할수 없는 문제에 부딪치게 되였다.
등소평동지는 전자에 대해서 정확하고 솔직하면서도 원견이 있는 론술을 많이 하였다. 그중에서도 그와 모주석의 관계에 대해 언급된 명언으로는: “잘못한데는 나의 몫도 있다. 그때의 실수를 모두 모주석한테 돌리는것은 옳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해선 공정해야 한다”등등 이다.
후자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전체적으로 놓고 말하면 현재 우리는 모택동동지가 이미 제출하였으나 못한 일들을 하였고 그가 틀리게 반대한 일을 시정하였고 잘 하지 못했던 일들을 잘 하였다. 금후 상당히 오랜 시간에도 이런 일들을 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발전이 있을뿐만아니라 아직도 계속 발전해야 한다”
이 말은 등소평동지가 1980년 10월 25일에 호교목, 등력군과 한 담화인데 이미 “등소평문선”제2권에 수록되였다. 이 말을 개괄하면 실제로 4가지 의미를 말해준다.
선인들이 제기하고 구상했으나 하지 못한 일들을 하자. 선인들이 한 그릇된 일들을 시정하자. 선인들이 제대로 하지 못한 일들을 진일보 완벽하게 하자. 선인들이 접촉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일들을 하자.
이 네마디는 보건대 평범한것 같지만 구체적으로 중국의 개혁개방은 어떤 기초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어떻게 력사와 현실, 계승과 발전을 봐야 하는가 하는 대도리를 제시하고 있다.
1. 선인들이 구상했거나 혹은 명확하게 제기한 어떤 일들은 객관형세 혹은 주관인식의 변화로 말미암아 미처 할수 없었거나 혹은 좀 하다가 보류해두었는데 후세사람들이 만약 거기에 도리가 있다면 계속 해나가야 한다. 례를 들어 11기3중전회에서 당의 사업중심을 사회경제건설에로 전이하기로 결정지은것은 이미 8차대표대회에서 제출하고 구상했으나 후에 실천에서 관철하지 못한 사유였다. 그리고 모주석이 “10대 관계에 대하여”에서 제출한 “모든 나라를 따라 배우자”는 사상은 력사적조건의 제한으로 당시 다만 쏘련, 동유럽 등 나라만 따라배우고 개방했으나 중쏘관계가 악화된후 이 길도 막혀버렸다. 20세기 70년대초에 와서 중미관계대문을 열며 서방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고나서야 서방의 기술설비를 유치하기 시작하였다. 새시기에 진입해서 우리가 세계형세판단에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중국사회주의건설에 대한 인식이 부단히 심화되였을뿐만아니라 대외개방을 기본국책으로 확정하였고 대외개방의 구체적내포를 대폭 넓혔다.
2. 선인들이 그릇되게 한 일은 후세사람들은 중단해야 하고 선인들이봉착했고 응당해야 할 일인데 인식상의 원인으로 반대한 일들은 시정해야 한다. 이 두가지 정황이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혼란된 국면을 바로잡는것”이다. 력사가 새 시기로 진입한 중요한 표징은 과단성있게 “계급투쟁을 기본고리로”하는 구호를 중단하고 철저하게 “문화대혁명”을 부정하는것이다. 이는 모택동이 만년에 진 착오를 바로잡는것이다. 개혁초기에 한 중대한 조치 즉 농촌에서 추진한 호도거리는 20세기 60년대초에 부분적지역에서 시험했으나 비판을 받은 농촌경영관리방식을 긍정하였고 완벽하게 하였다.
3. 어떤 일들은 선인들이 노력을 기울였고 실천검증을 거쳐 방향은 옳았으나 충분하지 못하고 완벽하지 못하며 지어 일부는 편향적이였다. 후세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조정하여 더욱 타당하고 빈틈없으면서도 충분하게 하였다. 례를 들어 어떻게 과학문화를 번영하는“백화제방, 백가쟁명방침”을 락착할것인가? 어떻게 인민내부의 모순을 정확하게 처리할것인가 하는것인데 이런 문제는 모택동이 제출한후 일정한 시기에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후에 “쌍백방침”이 잘 관철되지 못하면서 인민내부모순의 처리에도 부당한 현상이 출현하였는데 어떤 때에는 원래 인민내부모순에 속하는 문제도 적아모순으로 처리되였다. 모택동은 어떻게 령도간부대오의 부패현상을 반대하고 극복하는가에 관하여 줄곧 바싹 틀어쥐였는데 일정한 시기 효과를 보았으나 후에 아래로부터 우로의 군중적 정치운동을 통하여 대쟁명, 대자보, 대변론의 방식으로 해결하면서 적지 않은 편향이 발생하였다. 개혁개방이후 당중앙은 새로운 력사조건에 근거하여 과거에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나 응당 해야 할 일들을 제일 중요한 위치에 놓고 더욱 타당하고 빈틈없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4. 선인들이 접촉도 구상도 못해봤으니 자연히 해보지 못한 일들이 있는데 후세인들이 이런 일에 봉착하고 제때에 열심히 새 정황을 연구하고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여 새 사업을 해내며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것이다. 이것이 바로 등소평동지가 말한 “발전”인데 례를 들면 경제특구를 세운다든가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를 건립한다든가 등등이다. 개혁개방의 탐색이 부단히 심화되고 풍부해짐에 따라 봉착한 새로운 사물도 점점 많아질것이며 발전해야 할 지방도 더욱 많아지게 되였다.
등소평의 이 네마디 말은 새시기에 개척한 길은 모주석 그 일대가 한 일과 내적관련이 있다는것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제시해준다. 사실상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만약 선인들을 참조좌표로 한다면 후세인들이 한 일은 총적으로 이 네가지 방면의 일을 했을따름이다. 이른바 력사의 계승과 발전, 후세인들이 옛사람을 초월한다는것을 한조목 한조목씩 명확히 분석해보면 대체적으로 이 네가지 상황이다.
돌이켜보면 등소평동지는 이 네마디를 1980년에 제출했다. 1989년의 “6.9”연설과 1992년의 남방담화에서 등소평은 실천경험총화와 관련하여 또 이와 비슷한 네마디 말을 했다. 개괄해 말한다면 “맞는것은 견지하고 잘못된것은 바로잡고 부족한것은 더욱 힘을 내며 새로운 문제 해결에는 다그쳐야 한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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