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로무길에 나선것은 그전에 빚이 하도 많았기때문입니다." 이젠 우리 말도 제법 잘하는편인 왕연추씨(60세, 한족, 연길시 소영진 인평촌사람)는 기자에게 5년간의 한국로무생활을 다시 떠올렸다.
일찍 지난세기 80년대, 왕연추는 남새재배기술을 배워 남새재배로 톡톡한 수입을 올리면서 원근에 소문난 치부능수로 소문났으며 성, 주, 시에서 받은 상장만도 무려 30여개나 된다.
1995년, 그는 남다른 욕심에 남새재배규모를 늘이는 한편 양계업도 벌려놓았는데 닭을 8000마리까지 사양했다. 허나 사료값 폭등과 닭알가격의 급속한 인하로 눈깜짝할사이에 12만원이라는 거액의 빚더미우에 앉게 될줄이야.
□ 빚에 떠밀린 로무행
"1996년도에 12만원이라는 돈은 저에게 너무나도 큰 돈이였습니다. 그때는 살아갈 신심도 없었고 모든것을 포기하고 도피하고싶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출국해서 돈을 벌어야만 이 많은 빚을 빠른 시간내에 물수 있을것 같았어요." 1999년 11월, 왕연추는 무거운 마음으로 한국행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 동대문시장의 한 24시간 영업하는 식당에서 야근했어요. 밤에 열몇시간씩 일하다보니 밤낮이 뒤바뀌게 되였고 그 영향으로 심한 백내장까지 얻게 됐고......" 한족이다보니 언어가 통하지 않아 꾸벅꾸벅 그릇 씻는 일만 했다는 왕연추씨, 한번은 주방에서 미끄러넘어져 다리가 골절됐는데 의사는 적어도 두달은 입원을 하라고 권고했지만 엄청난 입원비때문에 그는 그냥 누워있을수가 없었다. 결국 일주일후 그는 다리를 철로 고정한채 식당에 나갔다.
□ 재기의 자금 마련
한국에 간지 5년후인 2004년 10월, 왕연추는 가벼운 마음으로 귀국했다. 그동안 그는 양계에서 진 빚과 한국갈때의 수속비 등을 몽땅 갚고도 일정한 저축이 있게 되였다.
인평촌은 도시와 농촌을 이어놓는 교차로지역이기에 남새생산이 좋은 치부의 길이라고 생각한 그는 남편과 토론하고 3만원을 투자하여 1200평방메터 되는 비닐하우스를 짓고 또다시 남새재배를 시작했다. 그는 먼저 양파시장에 눈길을 돌리고 8.5무 되는 양파밭을 세맡았다. 그의 예견과 같이 양파의 시장형세는 아주 좋았을뿐만아니라 가을배추 생산량도 높아 그는 눈에 띄이는 수입을 안아왔다. 2006년, 그는 양파에서 6만원 수입을, 가을배추에서 3.5만원, 오이에서 3만원, 온실 도마도와 애배추에서도 1만원의 수입을 창출해 생산원가를 제외한 순수입만도 10만원에 달해 또다시 인평촌의 치부능수로 부상했다.
"힘겨운 로무현장이였지만 다시 일어설수 있는 기회의 현장으로 다시 새 희망을 찾게 되였어요."
왕연추씨는 감명깊게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