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국경 50주년전야에 중공중앙, 국무원, 중앙군위에서는 23명의 과학기술일군들에게 순금 515그람으로 된 메달을 각기 수여하였다. 이 사람들속에는 유일하게 렬사의 신분으로 메달을 수여받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곽영회이다. 당년에 빛뿌리던 과학기술의 별이 불행하게 너무 일찌기 떨어졌었다. 하지만 그의 공적과 우수한 품격은 사람들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있을것이다.
조국의 과학진보를 위한 빛나는 일생
1909년 곽영회는 산동 영성현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어릴적부터 소를 방목하고 땔나무를 주은 그는 가난한 집형편때문에 9살에야 겨우 학교로 갈수 있었다. 그는 선후로 석도진 명덕소학, 청도대학 부속중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의 성적은 줄곧 으뜸이여서 학교측의 특수한 대우와 장려를 받았고 초중졸업후에는 남개대학 예과 리공반에 붙었다. 농민의 자식이 이런 길을 걸을수 있게 된것은 당시 사회에서는 아주 드문 일이여서 그는 공부할수 있는 기회를 몹시 소중하게 여기였다. 1933년에는 북경대학 물리학부에 진학하였고 졸업후 이름난 광학전문가 요육태의 조수와 연구생으로 남게 되였다.
1937년, 로구교에서 포성이 울린후 그는 북경대학의 사생들과 함께 남쪽으로 옮겨갔다. 갖은 고생끝에 곤명에 이르렀고 새로 세운 서남련합대학에서 항공공정을 새롭게 배우게 되였다. 1939년에 중영《경자배상금》류학생에 합격된 그는 상해에서 배를 타기전에 발급받은 려권이 일본정부가 서명하여 내준것임을 발견하고 성을 참지 못한 나머지 그번 류학기회를 결연히 포기하고말았다. 8개월후 곽영회는 카나다류학통지를 받고 토론토대학에 들어갔다. 단 반년만에 수학석사학위를 얻은 그는 공기동력학의 한개 중요한 리론문제를 박사론문제목으로 선택하였다. 지도교사가 이 과제가 어렵다고 여겼기에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리공학원에 가 항공대사 푼 까르만한테 배움을 청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공부하고있는 전학삼, 전위장 등과 친우로 되였다. 1945년에 박사학위를 탄 곽영회는 미국 칸나르대학에서 교원으로 되였으며 얼마후 부교수, 교수로 되였다.
1956년에 곽영회는 미국정부의 저애를 물리치고 온집식구를 거느리고 조국으로 돌아왔으며 그 먼저 귀국한 전학삼의 추천을 받고 중국과학원 력학연구소 부소장직을 맡게 되였다. 그는 귀국한후의 12년동안에 줄곧 진보를 추구하여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원고료를 당비로 바쳤고 국외에서 가져온 전동계산기와 환풍기를 공가에 바쳐 쓰게 하였다.
1960년, 중앙에서 핵무기를 자체로 연구제작하기로 결정한후 105명의 과학자들로 특수한 과학연구군체를 구성하였다. 곽영회는 9원 부원장을 맡아 력학부분을 주관하였으며 무기화의 설계지도를 책임지였다. 1963년에 그는 과학연구대오와 함께 청해에 새로 세운 기지로 옮겨가 렬악한 자연조건에서 늘 밖에서 자고 먹으면서 많은 중요한 동력난제들을 풀었다. 사람들은 그를 핵연구분야의 《세 대보살》중의 하나라고 롱담하였다. (다른 둘은 리론, 시험 부문의 책임자들임.)
1964년 10월과 이듬해 5월에 우리 나라의 첫번째 원자탄과 두번째 원자탄이 폭발시험에서 성공하였다.주은래, 등소평이 특별히 곽영회 등 과학자들을 위하여 축하연회를 열었다. 1965년후에 곽영회는 수소탄연구제작에 참여한 동시에 또 인공위성의 설계에도 참가하였다. 이와 함께 외부원조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그는 또 어깨에 메는 방공유도탄의 연구제작총설계사를 맡아 반년도 들이지 않아 이런 초저공유도탄을 기적적으로 만들어내였다.
1968년 12월 5일, 곽영회는 청해시험기지로부터 북경으로 보고하러 돌아왔는데 비행기가 착륙할 때 추락사고가 발생하여 불행히도 사망하게 되였다. 그해 12월 25일에 국가내무부에서는 그를 혁명렬사로 추인하였다.
새 중국 발전의 위대한 추동자들
새 중국이 창건된후 청춘을 되찾은 고국에서는 해내외에 이름을 떨친 풍운인물들이 솟아났다. 원자탄, 수소탄과 인공위성을 연구제작한 과학일군들은 그들중의 빛나는 대표들이다.
근대중국에서 과학이 뒤떨어져 곽영회와 같은 애국의 뜻을 가진 지식인들은 공부하러 다른 나라로 갔다. 당년에 그들은 미국에서 살면서도 마음만은 시종 중국에 있었다. 그들은 세계의 선진적인 과학기술지식을 장악한후 겹겹한 저애를 물리치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중국공산당은 이런 민족정신이 있을뿐만아니라 선진생산력도 대표한 엘리트들을 받아들였는데 이는 당자체가 강대한 생명력을 갖고있다는 구현이다.
1955년, 당중앙에서 결심을 내린후 중국은 자동차 한대, 비행기 한대도 만들어내지 못하던 락후한 기점으로부터 발을 떼여 10몇년이란 짧은 시간내에 핵탄(원자탄과 수소탄을 포함), 인공위성 제조기술을 장악하게 되였다. 중화대지에서 세계의 과학기술계가 모두 불가사의하다고 여기는 이런 기적을 창조해낼수 있은것은 곽영회와 같은 세계급 과학자들이 있었기때문뿐만아니라 그들에게 둘도 없는 기여정신이 있었기때문이기도 하다.
근년래 강택민동지는 50, 60년대의 《2탄1성》정신과 열의를 꼭 발양하여 우리의 과학기술수준을 높이여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볼수 있는바 이런 정신은 오늘날에도 아주 귀중한것이다.
첩첩 곤난 물리치고 결연히 귀국
곽영회는 항전의 봉화속에서 출국류학하였고 일제의 비행기가 제멋대로 날아다니는것도 목격하였다. 하여 그는 항공에 결정적역할을 노는 공기동력학전업을 선택하여 앞으로 중국의 국방사업을 위해 봉사하려고 마음먹었다. 그가 음속류동의 난제로 박사학위를 탄후 미국의 많은 유명한 학교와 기업에서 그를 초빙하였다. 그는 동력학과에서 세계의 앞장에 선 칸나르대학에 가 교원으로 있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봉사일뿐 앞으로 꼭 조국으로 돌아가련다고 성명하였다. 그가 종사한 학과연구는 늘 일부 기밀자료와 접촉하였다. 미국측에서는 그한테 도표를 한장 보내왔는데 거기에는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을 위해 복역하겠는가?》는 항목이 있었다. 동의하지 않으면 비밀에 접촉할수 있는 자격을 잃게 되지만 곽영회는 조금도 주저없이 《싫다》라고 적어넣었다. 학술면에서 이런저런 제한을 받았지만 그는 늘 새 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필기장에 적어넣지 않으면 머리속에 기억하여두었다. 1947년에 그가 서남련합대학에서 알게 된 녀친구 리패가 미국에 오게 되여 얼마후 그는 그녀와 결혼하였다. 리패는 국민당정권의 부패현상과 곧 멸망하게 될 운명 및 중국의 희망을 대표한 공산당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런 이야기들은 그의 귀국신념을 더욱 튼튼히 해주었다.
1950년, 귀국길에 오르려던 전학삼이 억류된후 곽영회의 행동자유도 단속을 받게 되여 교수하러 영국으로 가는 일마저 비준받지 못하였다. 이로 하여 그는 더욱 분개하였다. 1955년에 중미대사급회의에서 교민이 자유롭게 귀국할수 있다는 협의가 맺어진후 전학삼은 인차 미국을 떠났다. 미국이민국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곽영회를 권고만류하였으나 그는 단호히 귀국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미국측이 그가 중요한 자료를 갖고있다는 리유로 귀국을 저애하는것을 피하기 위해 그는 동창만회에서 십몇년동안 쓴 론문원고를 모닥불속에 집어넣었다. 그의 안해 리패는 처음에 아주 애석해 하였지만 《머리속의 과학지식은 자기것이다》는것을 알게 되였고 미국측도 억류할수 없게 되였다. 1956년 가을에 곽영회는 온집식구를 거느리고 조국으로 돌아오게 되였고 모택동이 친히 그를 접견하였다.
목숨으로 과학수치자료를 보호
외모를 보면 곽영회는 몸이 약하고 나이가 반백이 되지 않았는데 머리는 벌써 희끗희끗했다. 평소에 말수가 적고 늘 생각에 잠겨있다. 그가 일할라치면 정력은 초인간적이다. 1963년에 해발 3000메터이상되는 청해기지로 옮겨간후 그와 많은 동사자들이 모두 고원반응이 나타났다. 새로운 상황을 제때에 연구하기 위하여 그는 북경과 기지사이를 빈번히 왕래하였는데 번마다 한번씩 신체불순응현상이 늘어나 건강을 몹시 해치게 되였다. 어떤 사람이 그더러 좀 적게 다니라고 했지만 그는 사업을 위해 전연 그말을 듣지 않았다. 생활면에서 그의 소박함은 이름이 났다. 만년필 한대를 중학교때부터 희생될 때까지 줄곧 써왔던것이다.
주은래는 곽영회 등 과학자들한테 비행기를 타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하지만 곽영회는 진도를 빨리기 위해 비행기로 왔다갔다 했다. 1968년 12월 초에 그는 청해기지에서 중요한 수치를 발견하고 급히 북경에 돌아가 연구하려고 야간비행기편에 올랐다. 12월 5일 새벽에 비행기가 북경비행장에 도착하여 지면으로부터 약 400메터 상공에 있을 때 갑자기 균형을 잃고 활주로에서 벗어나 1킬로메터밖의 옥수수밭에 박히여 불덩이로 되였다. 사람들이 비행기잔해속에서 곽영회를 찾아냈을 때 놀랍게도 그의 유체는 경호원의 몸과 단단히 한데 얼싸안겨져있는것을 발견하였다. 불에 탄 두 시체를 힘겹게 떼놓았을 때 그속에서 극비문건을 담은 공문가방이 떨어져나왔다. 가방은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았었다. 비행기가 위험에 처하여 목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에 곽영회가 생각한것은 나라에 중요한 가치가 있는 과학기술자료를 몸으로 보호하는것뿐이였다!
주은래는 곽영회가 희생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이 글썽하였다. 전학삼은 더욱 상심하여《전 세계가 다 아는 우수한 력학전문가가 세상을 떠났다.》고 탄식하였다. 지금 우리 나라 공기동력쎈터 정원의 송림산우에는 기념정자가 하나 세워져있는데 그 우에는 장애평장군이 쓴 《영회정》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