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의 몇몇 비서중 전가영은 뛰여난 재능에 견해가 명석한 사람이였다. 그는 장기간 모택동사상을 선전하기에 노력하였으며 《좌》적인 오유가 만연될 때 분연히 일떠나 투쟁하였다. 성실하고 정직하며 강인한 그는 뭇사람들의 존중을 받았고 따라서 모두가 그를 그리고있다. 진리에 대한 그의 탐구는 후세들에게 더욱 중요한 계발을 준다.
14살에 《과목불망》의 신동으로
전가영은 본명이 증정창인데 1922년 사천 성도의 한 약방주인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가 3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가정형편이 쇠락되기 시작했다. 그가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까지 돌아갔다. 별수없이 그는 학당을 떠나 약방에서 견습공으로 있었다. 《천하의 길을 다 걷고 천하의 책을 다 읽겠다》고 맹세하고 반공반독의 길에 들어섰다. 13살부터 신문잡지에 투고했는데 채용률이 높았고 《전가영》은 그가 자주 쓰던 필명이였다. 14살에 벌써 신문지상에서 류씨 성의 교수와 론전을 벌리고 이겨서 사천사람들로부터 《과목불망(過目不忘)》의 신동으로 불리웠다. 그해에 그는 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구국조직《해연사》에 가입하였다.
1937년, 15살나는 전가영은 연안으로 갔다. 그는 우선 섬북공학에 입학했고 1938년에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해에 그는 졸업하고 학교에 남았는데 제일 젊은 근대사 교원으로 되였다. 그는 당시《해방일보》에 많은 잡문을 썼는데 그중에서도 모주석은 《후방역(候方域)부터 론함》이라는 글을 아주 흔상하였다. 1946년 모안영이 쏘련에서 귀국할 때 중문기초가 좀 약해 모택동은 안영과 동갑인 전가영을 아들의 과외문사교원으로 되게 하였다.
1948년 로비서 호교목은 전가영을 새 비서로 추천하였다. 모주석은 곧바로 이 26살난 《가정교원》을 불러 간단하게 의사를 말하고 전보문을 쓰게 했다. 전가영은 단숨에 써냈는데 모택동은 아주 만족스럽게 면접을 끝냈다. 그후부터 전가영은 모택동의 신임을 얻었으며 동인배중 제발이 가장 빨랐다. 그는 주석비서를 제외하고도 중앙판공청 비서실 주임, 중앙정치연구실 부주임, 중앙판공청 부주임을 겸임하였다.
전가영은 당시 모택동의 신변에서 관할하는 일이 제일 많은 사람이였다. 그는 모택동의 개인저금, 인감, 친우들의 편지를 관할할뿐만아니라 또 10년의 심혈을 기울여 모택동을 위해 도서관을 건립하였는데 북경에 들어올 때 책은 10개의 책꽂이에 불과했으나 나중에는 만여권으로 늘어났다. 모택동은 글이나 시를 쓸 때 고서를 곧잘 인용하였는데 흔히는 전가영이 찾고 확인대조하였다. 그는 틈이 나면 영보재 등 고물점에 가서 서예작품이나 그림을 샀는데 항상 먼저 모택동한테 가지고 가서 같이 흔상하고 견해를 나누었다.
1959년 전가영이 성도시교에 있을 때 《좌》적인 오유를 발견하고 시정하려 했다. 그해 여름 그는 로산회의에서 팽덕회의 관점을 찬성하였다가 남들의 적발비판을 받았다. 그후 모택동은 인식문제에 속한다고 하면서 그를 보호해나섰다. 1961년 전가영은 절강에 대해 조사한후 모택동의 지지하에 저명한《60조례》를 작성하여 이전의 많은 오유적정책을 바로잡았다. 그러나 《호도거리》문제에서 그들은 의견상이가 있었다. 로산회의후 그는 기층에서 사업하려 했고 일부 성당위 서기들도 환영하였는데 모택동은 시종 그를 놓기 아쉬워했다. 1965년 말 모택동은 담화에서 《해서의 파직》에 관하여 언급했다. 강청 등은 이에 틈을 노리고 문장을 지었다. 전가영은 기록을 정리할 때 이 단락을 삭제하였다. 그는 이렇게 하면 가능하게 생길 후과를 번연히 알면서도 당의 사업과 모택동본인의 장원한 위망을 수호하기 위해 주저없이 해나갔다. 그후 강청 등은 《모주석저작을 외곡했다》는 사람을 기겁하게 하는 죄명을 그한테 들씌웠다. 1966년 5월 22일 전가영은《정직반성》이란 통지를 받았다. 그는 하루저녁을 심사숙고하고 이튿날에 죽음으로써 대항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44살이였다. 그의 의외의 죽음은 당중앙 지도자들을 놀래웠다. 모택동은 서거하기전에 자기를 18년 따른 비서를 그리워하며 《전가영은 기실 문제가 없었다》고 탄식하였다.
1980년 중공중앙은 전가영을 위해 추도회를 거행하였다. 추도회에서는 《그는 성실하고 정파답고 혁명적기개가 있는 사람이다. 그는 언행이 일치하고 표리여일하며 부화뢰동하지 않았으며 마음을 어기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평가하였다.
《만약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수 있다면 나는 다른 사회주의모식을 시험해보겠다》
전가영은 근대중국에서 모택동과 로신 이 두 학문대가를 숭배했다. 전가영은 문사애호면에서 나이와는 관계없이 령수와 우정을 맺었을뿐만아니라 다년간 많이 보고 들으면서 두가지 제일 기본적인 처세원칙 즉 《실사구시》,《인민을 위해 복무하자》 이 두가지 원칙을 배우고 준수했다.
중국에서의 사회주의건설은 새로운 사업이다. 모택동이나 팽덕회나 전가영이나 모두 국가를 빨리 도약시키는 길을 모색했으며 이 기간에 곡절과 의견상이가 있기 마련이였다. 《대약진》의 악과를 보고 전가영은 《만약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수 있다면 나는 다른 사회주의모식을 시험해보겠다》고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의 11기 3차전원회의이후 우리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하고있는 오늘 사람들은 그의 원견과 담력에 더더욱 탄복하게 된다.
전가영의 최후결과에 대해 많은 동지들은 몹시 애석해하고있다. 그를 잘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렇게 분석했다. 전가영은 특수한 신분으로 《문화대혁명》이 가져다 줄 큰 재난을 제일 빨리 예견한 사람으로서 그는 이 재난을 보기도, 용인하기도 싫었을것이다. 그의 마지막 선택 - 죽음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당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며 인민을 사랑하는 그의 붉은 마음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것이다.
모택동 : 《 이 글은 내가 쓴것이 아니라 한 소장파가 쓴것인데 그가 바로 전가영이다》
전가영은 모택동신변에서 청렴한 작풍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50년대초 그와 안해는 손시계 하나밖에 없었으며 얼마 안되는 돈으로 자식을 키우고 나머지는 책을 사는데 썼다.
그를 익숙히 아는 사람들은 그의 문풍이 모택동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모택동은 발언시 종래로 남이 대필하는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8기인대를 앞두고 전례를 타파하고 전가영더러 2000여자의 개막사를 집필하게 하였다. 모택동이 선독할 때 박수소리에 무려 34차나 중단된적이 있다. 회의후 대표들이 전형적인 주석풍격의 개막사를 높이 평가하자 모택동은 대견해하는 어조로 《이 글은 내가 쓴것이 아니라 한 소장파가 쓴것인데 바로 전가영이다》라고 말하였다. 전가영은 《모택동선집》과 《모택동시사》편집을 조직할 때 아주 중요한 역할을 놀았는바 글자마다, 구절마다 다듬고 대조검토하였으며 모택동본인의 의견을 청취하였다. 집체지혜의 결정체인 모택동사상에는 전가영의 기여도 들어있다.
전가영은 비록 중학교도 채 다니지 못했지만 문사면에는 깊은 조예가 있었으므로 《붉은기》잡지 상무편집, 중공당사편집위원회 위원, 중국과학원 학부위원 등을 력임하였다. 그는 자학하여 인재가 된 본보기라고 할수 있다.
성도시교에 위치한 대풍진의 군중들은 전가영이 이곳에서 점을 잡고있을 때 당지 사람들을 덜 굶게 하였다면서 감사의 마음으로 모금하여 그의 조각상을 세웠다.
1959년 봄 전가영이 이곳에 왔을 때 《허풍치기바람》의 영향으로 어떤 간부들은 《무당수확고가 3만근》이라고 허풍쳤다. 이에 그는 집집마다 다니며 조사한후 간부들이 실말을 할것을 격려하였으며 또 허풍치기바람의 압력을 이겨내면서 과대한 표준으로 징구하지 말고 백성들의 식량을 담보할것을 요구하였다. 소박한 농민들은 그를《전포천》이라고 불렀지만 그는 착잡한 심정으로 로산회의에 참가해서 《인민공사》에 대해 기본적으로 부정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1961년초 전가영은 모택동의 위탁을 받고 절강성의 농촌에 내려갔다가 기황이 든것을 보았다. 각계인사들이 모인 회의에서 그는 중앙사업일군의 자태로 사죄하면서 《우리가 사업을 잘 못해서 여러분들이 배를 곯고있어 참 미안하다. 공산당원으로서 이런 정황을 보니 참 가슴 아프다…》고 말하며 흐느껴 울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한테 원유정책을 위반하는 말을 하지 말것을 권고했지만 그는 격분해하면서 모택동이 말한 《매 한마디, 매 한가지 행동, 매 한가지 정책은 모두 인민의 리익에 부합되여야 하는바 현행정책과 어느 지도간부가 한 말에 구속되지 말아야 하며 인민의 리익에 배치되는 일을 묵과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비록 로산회의의 여파가 남아있었지만 전가영은 위험을 무릅쓰고 공공식당을 취소할것을 요구하는 글을 써바쳤다. 모택동은 위인인만큼 랭정하게 생각하고 이 의견을 접수했고 그가 인민공사《60조례》초고를 작성하는데 동의했다. 이 문건은 농촌형세를 전환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놀았다. 그러나 전가영이 찬성한 《호도거리》는 접수되지 못했으며 이것 역시 시대와 력사가 조성한 국한성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