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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근정- 중앙기관의《붉은살림군》
2006년 09월 29일 09:33 【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웅근정(熊瑾玎)은 중공중앙이 상해에 있을 때에 재무담당을 맡았었고 그후 남방국에서 발행하는 《신화일보》의 총경리로 임직하여 당내에서는 그를 《로반》이라고 불렀다. 그의 손을 경유한 자금이 얼마인지 헤아릴수 없으나 그의 가정은 항상 청빈하게 생활했다. 《문화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주은래는 그의 증명자료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거대한 공헌을 하였고 제일 믿음직한 동지》라고 립증했다. 이 증명자료를 통해서도 당에서는 그에게 초고의 평가를 했음을 알수가 있다. 

 

주은래 : 그들 부부를 《제일 믿음직한 동지》라고

 

웅근정의 애명은 초웅이다. 1886년에 그는 호남 장사의 한 의사가정에서 태여났다. 10살되던 해에 그는 《글방》에 들어가 전통적인 구식교육을 전수받았다. 20세때 그는 서특립 등과 함께 사범속성반을 개설하면서  일부 새로운 사상을 학습하게 되였고 그때로부터 서특립의 인품과 덕성, 인격을 자기의 본보기로 삼았다. 그는 인쇄공장 교정일군으로 일했었는데 학교교원과  지방자치공소일군들속에서 렴정하고 공정한 사람으로 정평났었다. 1941년이후 웅근정은 또 장사에 가서 5년간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때 그는 진독수가 발간하는《신청년》잡지를 애독했으며 모택동과 하숙형 등 사람을 알게 되였으며 그들과 자주 사회문제에 대해 깊이있는 토론을 벌리기도 했다. 이후 그는 호남통속교육관의 회계를 맡으면서부터 신문을 꾸리고 경영과 판매를 조직했으며 동시에 신민학회에 가입했다.

 

신민학회에서 웅근정은 일부 급진파분자들과 의견분쟁이 있었는데 그가 맞선것은  그들이 현실을 떠난 과격한 사상과 언행이였다. 그는 《일을 하려면 자금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경제실체를 꾸릴것을 주장했다. 이같이 인식상의 분쟁으로 초기 호남공산당조직에 참가하지 못했으나 학회에서 년세도 많고 맡겨진 일들을 잘 처리하여 옆사람들은 그에게 자금비축 등 사무를 맡기군 했다.

 

모택동이 상해로부터 호남에 돌아와 독학대학을 조직건설할 당시 웅근정은 교무주임으로 초빙되였고 그후 서특립의 요청으로 녀자사범대학에서 사무주임으로 임직했다. 북벌전쟁가운데서 그는 장사현 재산보관처  처장직을 맡았으며 공회와 농민회에 활동경비를 제공하여주었다. 1927년 국민당이 공산당을 반대하여나서자 그는 무한에 잠복하여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8년 봄, 중공호북성위가 파괴되면서 하명한, 상경여 등 동지들이 희생되였고 웅근정은 상해로 전이했다. 당중앙에서는 그를 중앙기관의 회계로 임명했으며 주로 관리와 경비마련을 책임지도록 했다. 그는 《복흥상호》란 패쪽을 내걸고 《로반》역을 맡았다. 기실 이렇게 한데는 그곳은 정치국에서 지정한 회의장소로서 여기로 나드는 중앙지도자들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데 목적이 있었다.  이처럼 엄호를 바탕으로 한 장소인것 만큼 주은래는 19살에 나는 호북태생 녀당원인 주단수를 소개하여 《녀로반》직을 맡겼다.  이들 둘은  호남에서 서로 면목을 익혔고 애틋한 사랑이 싹트자 주은래의 권유로  인츰 부부관계를 맺었다.

 

웅근정의 주최하에서 3년 넘게  당중앙기관의 재무와 안전은 확실하게 담보되였다. 1931년에 고순장의 변절로 하여 웅근정은 자리를 옮겨 홍호쏘베트구역에 가서 성쏘베트선전교육부장 및 비서장을 력임했다. 이듬해 봄에 홍호쏘베트구역은 전부 함락됐고 웅근정과 안해는 체포되였다. 허나 이들 둘은 홍군이 억류한 상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상응한 증거를 제출해서야 적군은 풀어주어 상해로 돌아오게 되였다. 1933년 봄, 웅근정은 또 프랑스조계지에서  체포되였다. 조계지당국에서는 변절자의 진술에 따라 웅근정을 8년형에 언도하였으나 인츰 국민당에 넘기지 않았고  또한 송경령이 적극 나서서 구원하였기에 살해되지 않았다. 1937년 항일전쟁이 폭발한후 웅근정은 감옥에서 나왔다. 다음해 초에 주은래의 위탁을 받고 웅근정은  중앙기관지인 《신화일보》총경리로 임직했다. 9년간 그는 경영에서의 재능을 한껏 발휘했기에 《일보》는 국민당의 경제봉쇄정책의 영향에 신음했음에도 그냥 끌고나갈수 있었고 또한 중공남방국에 경비도 마련하여주었다. 하기에 로동지들은 그를 《당시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인물》로 평가하고있는것이다.

 

해방후 그는 전국적십자총회 부회장직을 맡으면서 복리사업에 종사하게 되였고 얼마 안되여 년세 많고 신체가 허약하여  은퇴했다. 1966년초 그의 80세 생일날에 주은래는 특별히 등소평이 그한테 보내는 두병의  질 좋은 소흥황주를 전하면서 축하했다. 《문화혁명》이 일자 주은래는 또 그들 부부에게 증명자료를 써주어 충분히 긍정하여 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전시기 웅근정과 주단수  동지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중공중앙의 제일 중요한 기밀사업을 하였으며 공헌이 큰바 제일 믿음직한 동지이다.

 

1973년에 옹근정은 중병으로 말을 할수가 없었다. 당시 주은래도 중병으로 앓고있는 몸이지만 친히 병원에 가서 웅근정을 위로했다. 부인 주단수는 남편이 남긴 유작시를 꺼내보였다. 《탄식하며 환락의 땅과 고별하거늘 그대들은 항상 투쟁의 몸이 되길 바라노라.》이 시구는  당내 로전우들에 대한 웅군정의 심후한 감정과 최후의 축원을 담고있다.

 

실무적인 태도로 돈을 벌어 수입을 올렸다

 

1세대 중국공산당의 피끓는 혁명선구자들가운데서 웅근정은 매우 특수한 인물로 부각되고있다. 그는 중화민족의 전통적인 교육가운데 하나인 근검하게 가정을 꾸려나가는 미덕을 갖추었을뿐만아니라  근대의 경영사상도 갖추었다. 그는 독특한 일터에서 당의 사업을 보장해주었고 다년간 재정을 관리하였으나 항상 깨끗함을 잃지 않았다.

 

중국공산당 건당초기에 활동자금은 대부분 공산국제에서 지원했다. 중공중앙은 비록 국제사회의 지원은 받고있었으나 국내투쟁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그 자금경로도 자주 끊어지군 했다. 쏘련에서 온 일부 대표들은 그런 지원자금을 턱대면서 비난하고 헐뜯었다. 토지혁명시기에 진입하자 당중앙은 백색구에 웅근정과 같은 수입을 올릴수 있는 경제전문가가 있기에 쏘베트구역에서 토호를 타도하고 정권을 건립하는데  자금을 마련할수 있게 되였다. 이같은 경제상의 자력갱생은 정치상에 매우 큰 리익을 부여하여주었으며 독립자주의 원칙으로 본국의 혁명문제를 결정할수 있게 되였다. 웅근정은 비록 포화가 울부짖는 전투마당에서 병사를 이끌지는 않았으나  그도 역시 당내의 《공헌이 매우 큰》사람이다.

 

《신화일보》의 총경리

 

그가 《신화일보》 총경리직을 맡은후 주문량이  5만여부에 달해 국민당의《소탕보》와 《중앙일보》를 압도했다. 하여 신문파는 아동도 《신화가 중앙을 소탕하고있다》고 웨치면서 다녔다. 3개 신문을  이처럼 《사구려》에 담아 한구절로 묶은데서 공산당신문이 국민당신문을   소탕하고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주었다. 국민당은  이를 알고 신문파는 아동을 구타하는 등 비렬한 수단으로 반격을 가했지만 《신화》의 발행부수는 누르지 못했다.  듣는 말에 의하면 장개석이 매일 출근하여 보았던 신문도 《신화일보》이고 《중앙일보》는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도 《중앙일보》에는 거짓보도가 많다는것을 알았기때문이였다. 이같이《신화일보》가 인기를 얻을수 있은것은 민심을 사로잡은데도 있겠지만 웅근정의 경영비결과도 련관되여있다.

 

딸애가 병이 위급할 때 은화 10원도 사사로이 사용하지 않았다

 

웅근정은 1918년 신민학회에 가입하였을 때 벌써 《많은 돈을 벌어보려는 꿈》을 꿨었다. 이후 그는 장기간 중앙의 대량의 자금을 장악하고 관리하였고 액외수입도 있었으나 그는 전부의 자금을 혁명사업에 바쳤다. 그의 가정은 당내간부의 기본생활비에 의존하여 생활하였고 전혀 특권을 부리지 않았다. 그가 중경에 있을 때 주단수는 또 사랑하는 딸을 낳았다. 어느 한 겨울밤에  딸애는 급기야 열이 오르면서 경련까지 일으켰다. 조급해난 그들 부부는 딸애를 안고 병원으로 뛰여가 병을 보이려 했으나 의사는 은화 10원을 내야 병을 보겠다고 했다. 당시 웅근정은 총경리였고  주단수는 회계과장인지라 그만한 돈을 해결하기란 사실 어려운것은 아니였다. 허나 당내의 경비를 사사로이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딸애를 안고 돌아왔다. 신문사에 돌아오자 안해는 슬픈 울음을 터뜨렸다. 딸애가 숨을 거두었던것이다. 

 

당년에《신화일보》는 옹근정이 솔선수범하면서 령도한데서 렴정하고 소박한 사업작풍이 형성되였다. 신문사 신문봉투는 모두들 손을 합쳐  낡은 종이로 만든것이였고 사업수책과 원고지도 페품을 리용하여 만든것이였다. 하여 중공남방국과 신문사에서는 웅근정에게 《붉은살림군》이란 별호를 달아주었다. 그가  자금을 조달하는 등 사업을 하면서 사귄 친구들이 많았다. 하여 전국이 해방되자 적지 않은 친구들은 그를 찾아와 여러가지 방조를 바랐다. 웅근정은 매번 이들이 찾아오면 열정적으로 대하면서도 원칙은 철저하게 지켰다. 무릇 사업상의 문제일 경우에는 조직상의 절차에 따라 해결되게끔 하였고 경제상의 문제일  경우 많지도 않은 로임을  털어 방조했다. 이처럼 당의 재무사업을 주관하였으나 로년에 와서도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래원: 지부생활 (편집: 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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