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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떠나간 그녀
전임 국가주석 류소기 부인 왕광미의 인생
조  릉
2006년 12월 14일 11:00 【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2000년 5월 11일,북경의 자택에서(자료사진).

지난 10  13일 새벽, 전임 국가주석 류소기의 부인 왕광미녀사는 85세를 일기로 평온한 모습으로 이 세상과 고별했다.

 

왕광미는 1921년 북경 서단 구형부거리 32번지에서 출생, 옛도시를 개조한후의  이 거리는 탁 트인 서장안거리로 유명하다.  26세 되던 해에 그는 여기서부터 연안으로 가서 혁명생애를 시작했다. 1949년 왕광미는 령수 부인의 신분으로 북평으로 내려와 중남해에로 들어갔다. 46세 되던 해에는 또 여기서부터 투옥생활을 시작했고 2006년에는 중남해에서 몇발작도 되지 않은 병원에서 인생의 최후를 마쳤다.

 

미국행을 거절한 그녀

 

그녀가 류소기를 배행하여 인도네시아를 방문할 때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자태와 《문화혁명》기간에 핍박에 못이겨 치포를 입고 탁구채를 목에 걸고 투쟁을 맞던 그 치욕, 그리고 배에 올라 류소기의 유골을 바다에 뿌릴 때의 그 비통한 표정... 등등 력사적인 장면들은 중국인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있다.

 

기복적인 왕광미의 인생은 시종 류소기와 련계되여있다. 허나 그녀의 일생에서 두단계는 독립적으로 인생을 영위하였는데 하나는 학생시절이고 다른 하나는 만년의 생활이다. 이 두단계의 그만이 소유한 력사는  뭇사람들이 그닥 잘 알지 못하고있다.

 

왕광미는 1921년에 한 옛관리가정에서 태여났다. 당시 부친은 워싱톤에서 열린 9개국 회의에 참가하는 등  명성있는 유지였다. 부친 왕지창은 일찍 일본 와세다대학 상업학과를 전공했으며 북양정부 농업상업부 공상부 사장으로 임직했었다. 모친 동결여는 한 부유한 소금장사군 가정에서 태여났고 천진북양녀자사범학교출신이였는데 《문화혁명》기간에 감옥에서 세상을 떴다.

 

왕광미는 형제가운데서 일곱째인데 아래로는 녀동생 넷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있는  여섯째 오빠 왕광영은 후에《홍색자본가》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광대은행을 창설했다.

    

고중시절에 왕광미는《수학왕》이란 애명을 얻을만큼 명성이 있었고 후에는 포인대학 수리학부에 입학하여 연구생공부도 했었다. 이같은 경력으로 하여 이 혁명적인 령수 부인은 만년에도《광학을 리용하여 거리를 측정할데 대하여》란 론문을 또렷이 기억하고있었다.

    

왕광미는 만년에 《나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공부하는> 리론의 영향하에 워낙 항전승리후 미국류학을 가서 원자물리를 전공하고 돌아와 나라의 건설에 이바지하려 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를 마치도  큐리부인과 같은 사람에 비유했다. 그의 류학추천표는 당시 푸인대학 선생이 작성했었다. 《나는 마직막 수업을 마치고 푸인대학을 떠날 때 그 선생과 작별인사도 안했어요. 한것은 푸인대학을 떠나는것은 류학을 가려고 한것이 아니라 군대배치부 중앙대표단 번역원으로 갈려고 한데서였죠. 전혀 알릴수가 없었어요.

    

왕광미는 영어에 능통하다. 70세되던 때에 그는 의연히 영문으로 된 《장정-전대미문의 이야기》란 책을 구독했다.

    

1946년에  국공합작으로 한 군대배치부를 설립할데 대해 의론하고있을 때 왕광미는 출중한 영어실력으로 지하당번역원으로 임직됐다. 허나 국공합작이 실패하자 조직에선 그더러 연안으로 갈것을 요구했다. 이때 왕광미는 이미전에 류학을 신청했던 두 학교에서 입학통지서를 받았다. 그 하나는 미국 스탄프드대학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원자물리학부였다.

    

《허나 당시는 군대배치부에서 근무할 때여서 갈수가 없었죠.》 왕광미는 만년에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20년후 그가 《어디로 갈것인가》하는 인생선택에서의 자그마한 《망설임》이 그만 죄로 되고말았다. 왕광미 장녀 류정정이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양란의 취재를 접수할 때 《문화혁명》대자보를 떠올리면서 《어머니는 일찍 연안과 미국사이의 선택을 두고 망설이였죠. 당시로는 원칙적인 문제였죠. 나는 집으로 와서 어머니한테 질문했어요. 어머니는 솔직하게 망설이였다고 하면서 정부장학금으로 공부할수 있고 또한 최고학교에서 박사공부를 하는것이 꿈이였다고 하더군요.》라고 말했다.

   

젊은 시절 왕광미는 최후 미국을 포기했고 다른 인생의 가능성도 포기했다. 허나  비참한것은  이같은 선택이 20년후에 《미국특무》라는 죄를 불러온것이다.

     

1946 8월에 한 작은 비행기가 왕광미를 싣고 연안으로 향했다. 그번의 비행은 왕광미가 학수고대했던  큐리부인의 꿈을 영영 가슴속에 묻어야 했고 다른 인생길을 걸어야 했다. 이 길은 그도 생각지 못했던 기복으로 얼룩진 한 령수부인의 길이였던것이다.

 

류소기에 대한 3가지 기억

     

1963 11월에 왕광미는 제1부인의 신분으로 류소기를 배행하여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이는 중국 지도자가 처음 부인과 함께 외국을 방문한것이여서 지금도 표징적인 의의를 띠고있다. 당시 흰색의 치포를 입은 왕광미는 중-인 두 나라 인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왕광미로 말하면 그번 방문은 휘황과 두려움이 뒤섞인 정치임무였다. 그는 출국전에 전문 복장과 례절문제로 송경령을 찾아 자문까지 받았었다. 허나 4년후에는 이 아름다운 형상을 추악하게 묘사한 연극이 청화대학에서 공연되였다.

     

그번 인도네시아방문을 두고 외계에서는 왕광미와 류소기의 20여년 결혼생활중 주석의 부인으로는 제일 눈부신 순간이였다고 평했다.  출신과 수양으로 하여 당시 중국지도자 부인들가운데서 왕광미의 형상은 제일 돋보였다.

     

1948년에 27세 되던 왕광미는  50세 되는 류소기와 결혼했다. 이전에 류소기는 5차나 되는 불운의 혼인사가 있었는데 전처한테서 낳은  자식들도 있었다.

      

자기가 제일 존경하던 최고 지도자와 결혼한후  이 지식형 녀성은 일상가무를 전담하는 가정주부로 되였다. 왕광미의 그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으로 하여 류소기의  생명가운데서 제일 안정한 가정생활로 남아있다.

      

어떤 회억록들은 그들 부부를 정치부부 가운데서 행복한 한쌍이라고 묘사한다. 그들 둘은 때때로 같이 산책하는데 모택동까지도 아주 흠모했었다.  중앙 내부에서 무도회가 있을 때면 그들 둘은 언제나 처음부터 마직막까지 함께 춤구곤 하였다.

      

왕광미는 만년에 시시로 인정이 따분히 담겼던 3가지 장면을  회상하군 했는데 첫째는 첫애를 출산했을 때 류소기가 그의 볼에 가볍게 키스해주던 장면이고 둘째는《문화혁명》기간  투쟁받을 때에  류소기가 그를 도와 옷견지들을 정리해주었는데 이는 그들의 마지막 대면이였다. 그리고 투쟁받던기간에 그는 하도 남편의 모습이 애처로와서 물 한컵 떠드렸는데 남편이 받아마시던 그 작은 일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추억으로 가슴속에 남아있었던것이다.

    

중앙정책연구실 연구원이며 《왕광미탐방록》저자인 황정은 왕광미와 류소기사이에는 지조가 굳은 애정이 있었다고 믿고있었다. 황정은 《력사문헌들을 보면 류소기의 그처럼 어려운 시기에 비록 주위의 사람과 일부 친척들까지도 류소기를  헐뜯었으나 왕광미는 시종일관하게 류소기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 왕광미가 살고있는  자택에 가보아도  이곳저곳에 류소기사진이 걸려있다.》라고 말했다.  

    

1967 4월부터 청화대학의 투쟁비판문헌자료들을 보면  왕광미는 시종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매 한마디 답변마다 반항과 보류,  지혜와  믿음으로 자기의 남편을 보호했었다. 《문화혁명》초기에 왕광미는 류소기를 보고《 우린 왜 그처럼 추악하게 묘사되지만 서로간에 원망이 없나요?》라고 묻자 류소기는 《호상 신임하기때문이지.》라고 대답했다.

    

1967년에 왕광미는 《미국중앙정보국 장기침입 고급전략적특무》라는 《죄》명을 쓰고 진성감옥에 투옥되여 공중의 시선에서 사라졌으며 장장 12년간 음페된 투옥생활을 했다.

   

《그당시 나는 몇날 며칠인지 오후인지 오전인지 날씨가 개였는지 흐렸는지조차 모르고 지냈으며 우리는 그 감옥의 나무로 된 구들에 앉아 움직이지도 머리를 들어 창문쪽으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앉아있었어요.》라고 왕광미는 그 힘들었던 시기를 회상하며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는 돌아갔고 어머니는 만나 볼수 있다.》는 모택동의 지시가 떨어져서야  1972 8 17일에 왕광미는 리별한지 5년이나 되는 자식들과 만날수 있게 되였다. 이날에 그는  비로소 류소기가 사망한지 3년이 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만년에 웃음으로  은혜와 원한을 묵색이다

    

1979년에 왕광미는 감옥에서 나온후 잠시 중앙조직부 초대소인 취명장에 배치받았다. 그당시  복무원 리홍이 전문 왕광미를 보살피는 일을 맡았었다.

   

《그의 머리는 특별히 길었어요. 하여 그의 머리를 리발하여주었는데 몇번이고 감사하다고 했어요. 너무나도 상냥했죠. 좀 지나서 그의 네 자식이 왔어요.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도 그만 눈물을 흘리고말았죠.》 이미 정년퇴직한 리홍은 27년이 지난 지금도 왕광미가 거처해 있던 214호 방번호를 기억하고있었다.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재차 볼수 있었던것은 하남성 성장한테서 류소기의 골회함을 받을 때부터였다. 그가 한참이나 남편의 골회함에 얼굴을 묻고있는 모습은 당년의 그한 력사를 경험해온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에 젖게 했다.  명예를 회복한후 왕광미는 전국정협 위원과 상무위원회 위원직을 력임했었으나 정치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만년의 대부분 시간을 빈곤한 어머니들을 돕는 사업에 투신했는데 기금회자금이 부족할 때면 어머니가 남긴 골동품을 팔아 보태였다.

    

황정은 《왕광미는 줄곧 락관적이고 관용하는 드넓은  맘을 가졌어요. 명예를 회복한후 그는 지나간 당시에 대해서 별로 개의치 않고 오로지 앞날만을 생각했죠. 그는 류소기 전처의 자식들과도 우호적으로 래왕했어요.  또한 그는 매년 류소기와 련루되에 타격받았던 시전상네 가정도 방문했었고  딸이 보내온 딸라도 시시로 의연하곤 했습니다.》라고 왕광미의 만년을  려과해서 소개했다.

    

만년에도 왕광미는 산책하고 수영하는 취미를 잊지 않았다. 그는 매일 《인민일보》를 구독하였고 중앙텔레비뉴스를 시청하였다. 83세 되던 해에  그는 모택동과 류소기 두 가정의 대규모의 모임을 조직하였다. 《웃음으로 은혜와 원한》을 대하는 그의 처사는 많은 메체의 주의를 불러일으켰으며 많은 의론도 자아냈다.

     

황정은 《이같은 처사는 <국면을 고려하고 당의  리익을 중요시하는> 드넓은 흉금을 말해주고있는바  이는 그의 일생의 원칙을 보여주고있다.》고 풀이했다.

    

듣는 말에 의하면 왕광미의 집에는 의연히 1962년 당시 모택동이 류소기 일가족을 방문할 때 찍은 사진을 걸어놓고있는데 이 방에서 각계의 손님을 맞는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 왕광미는 시종 자기는 미숙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리유는 비행기편으로 연안으로 갔기에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 고생하지 않았다는 자책감에서였다. 그는  오래동안 입당신청서를  조직에 제출하지 않았다. 그것은 류소기가 쓴 《공산당원의 수양을 론함》이란 저서를 읽는 가운데서 자기는 당원의 표준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고 생각했기때문이였다. 그는 또한 류소기와의 결혼도 인츰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것도 당원도 아닌 자신을 책망했기때문이였다. 만년의 왕광미는 의연히《자긴 이처럼 높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고 이 대우는 모두 류소기에게 돌려야 한다.》고 말하군 했다.

     

왕광미와 류소기 사이에는 1 3녀가 있다. 아들 류원은 현재 군사과학원 정위로 있으며  큰딸 류평평은 미국영양학박사로 일찍 국내무역부 과학사 사장으로 임직했었으며 둘째딸 류정정은 하브트공상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상업에 종사하고있으며 셋째 딸 류숙숙은  해외에 거주하고있다.

    

1979년에 왕광미와 아들 딸들은 인민대회당에서 있은 음력설야회에 참가했었다. 그는 회억록에서 《이는 10년래 내가 처음 공개적인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냈는데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고 악수도 청하고 포옹도 해주었고 또한 어떤 동지들은  나의 손을 잡고 흐느껴 울었는데 나도 눈물을 머금고 사람들을 향하여 허리굽혀 인사했고  기쁨을 머금고 <내가 또 이처럼 동지들과 함께 있게 됐네요. 인민이 나를 해방시켰습나다》라는 감동의 장면을  생동하게 묘사했다.

1948년 8월 21일,류소기와 왕광미가 서백파에서 결혼시 찍은 사진.
  래원: 지부생활 (편집: 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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