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뉴스>>대국의 궐기
일  본
대국의 궐기-대국들이 흥망성쇠하고 교체되는 이야기(10)
2007년 06월 05일 15:10 【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약 150년전, 태평양서해안에 위치한 섬나라 일본은 서방식민자의 대포와 함대의 협박아래 거대한 생존위기에 직면하게 되였다. 뜻밖에도 일본은 이를 낡은것을 버리고 서방을 따라잡는 력사적 기회로 간주하였으며 종내는 일본이 동방세계에서 선참으로 서방대국의 기시에서 벗어나 순조롭게 현대화국가를 실현하고 제국렬강행렬에 들어섰으며 침략확장으로 국토외에 식민지를 세웠던 유일한 아시아국가로 되게 하였다. 오늘날 면적이 37만평방킬로메터밖에 안되는 이 섬나라는 여전히 세계 제2경제강국이다.

하다면 구경 무엇이 이 섬나라를 해조처럼 들락날락하는 운명을 좌우지하였는가?

100년 유신

력사의 거대한 변화는 흔히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지우기 어려운 기록을 남긴다. 요꼬스까는 도꾜만입구에 위치해있는데 일본근대사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150년전, 페리라고 부르는 미국장군은 무력으로 일본으로 하여금 국문을 열게끔 압력을 주었으며 이 섬나라를 비극과 기적으로 넘치고 굴복과 강직함이 뒤섞인 력사에 이르게 하였다.

1853년 7월 8일, 강국행렬에 갓 들어선 미국은 동인도함대 사령 페리를 파견하여 4척의 무장함대를 이끌고 요꼬스까항에 침입하였다. 태평양항선을 개척하고 동방시장을 강점하기 위하여 페리장군은 미국대통령을 대표하여 항구를 개방하고 통상할것을 제기하였다.

이때의 일본은 이미 200여년의 봉페쇄국의 시기를 지나왔으나 바깥세계에 대해 전혀 깜깜부지는 아니였다. 유일한 창구인 나가사끼에서는 당시 세계에서 제일 부강한 국가인 중국과 네덜란드와만 왕래통상하는것을 허용하였다. 17세기의 세계패주인 네덜란드는 2000여년래 줄곧 중국을 본받아온 이 섬나라로 하여금 《란가쿠》 붐이 일어나게 하였다. 일본의 사족계층은 분분히 네덜란드어로 유럽근대의 천문, 지리, 의학 등 신흥학과를 연구하였으며 이로부터 서방세계의 발전을 료해하게 되였다.

하지만 13년전에 일어난 아편전쟁에서 영국군함의 공격을 받은 이웃나라인 대청제국의 불행은 다른 한 각도로 일본통치자에게 새로운 신호를 주었다. 수천년래 일본은 줄곧 중국을 따라배웠는데 그런 중국이 상대한테 패하였으니 그 상대가 매우 강대한것은 물론이요, 그런 상대가 나타났으니 일본으로 말하면 충격이 아닐수 없었다. 그런 연고로 미국함대가 국경을 넘어올 때 일본은 국내적으로 개국이냐 전쟁이냐 쟁론이 있었지만 결국엔 퍼그나 실제적으로 고려하여 환영에 가까운 태도로 페리의 요구를 접수하였다.

페리장군은 무력을 과시함과 동시에 전보기, 시계, 망원경 ,증기기관차와 대포로 일본인에게 산업혁명의 성과를 과시하였다. 한대의 소형증기기관차가 궤도에서 움직일 때 구경왔던 일본관원들은 쾌속도로 움직이는 차바퀴를 보면서 자기와 대서양너머에 있는 세계와의 거리를 실감하게 되였다. 당시 바쿠후는 개국에 상당히 적극적이였다. 그들은 당시의 세계상황으로부터 만약 일본이 자페쇄국 한다면 발전할수 없는것만큼 국제사회에 진입하여 발전하여야 세계강국으로 될수 있다고 여겼다.

1867년 시부사와 에이치라고 부르는 사람이 유럽으로 가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당시 27세인 그는 일본대표단의 성원으로 프랑스에 가서 빠리만국박람회에 참가하였다. 신기한 공업제품은 수공적인 기계설비를 대체하였다. 서방의 공업화정도에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남아서 유럽 각국의 산업발전과 경제제도를 낱낱이 고찰하기로 마음먹었다.

중국사회과학원 세계경제및정치연구소 연구원 주견: 시부사와 에이치는 프랑스에 갔다가 후에 벨지끄에 갔댔는데 벨지끄의 국왕은 그들을 접견할 때 국가의 강성은 공업을 떠날수 없는데 특히 강철사용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일본이 벨지끄의 강철을 사서 사용하는걸 환영한다고 하였지요. 이에 시부사와 에이치는 한 나라의 국왕이 외국손님을 접견할 때에도 자국의 제품을 판매하는것을 잊지 않았으니 공상업이 서방국가로 말하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볼수 있다고 감개무량하게 말하였지요.

1868년 11월 시부사와 에이치는 새로운 사상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당시의 일본은 그가 떠날적의 국가가 아니였다. 이 나라는 금방 중대한력사적 전환을 거쳤다. 이해에 일본사상 제124대 천황인 메이지천황이 국가의 권력중심에로 다시 돌아왔다.

미국함대가 국경을 접근할 때의 오만과 강세는 바쿠후의 무능과 연약함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외부적 압력은 끝내 내부변혁의 원동력으로 변하였다. 마침내 사무라이(하층무사)들은 왕정복고의 명의로 바쿠후를 뒤엎고 메이지천황을 부추겨 합법적인 새 정부를 세웠으며 14세의 메이지천황은 일본국의 최고지도자로 되였다. 내외로 우환이요, 위기로 충만된 일본, 그것이 바로 젊은 천황이 이끌어갈 나라였다.

일본은 미국에 의한 개국으로 하여 사상 첫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였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 로씨야, 영국과 프랑스도 벌떼처럼 모여들어 미국을 본받아 이 섬나라에서 각자의 리익을 챙기기 시작하였다.

당시 많은 아시아나라와 마찬가지로 개항후의 일본은 급속히 서방상품의 방매시장과 렴가원료의 공급지로 되였다. 개항한지 겨우 반년만에 일본의 황금은 외부로 100만냥이나 흘러나갔으며 국내의 경제는 불황을 이루고 백성들의 원성은 사처에서 일어났다.

1868년4월15일, 메이지천황은 《5조세문》을 반포하였다. 그것은 국가변혁을 추동하고 변법부강의 서막을 여는 총강령으로 되였다. 이때로부터 일본은 현대화를 실현하는 출발점이라고 할수 있는 메이지유신의 새 시대로진입하였다.

1868년 11월 귀국한 시부사와 에이치는 1년후 메이지정부의 재정부문에 임직하였다. 유럽에서 둘러보고 쌓은 경험과 천성적인 재정관리능력으로 하여 그의 미래는 순풍에 돛단격이였다. 그는 직접 새 정부의 화페제도개혁, 페번치현, 공채발행 등 거의 모든 중대한 정책의 토의와 제정에 참여하였다. 정치성과가 현저한 그가 한창 잘 나갈적에 메이지정부의 중요한 조치는 일본을 개변하였고 그의 운명도 개변하였다.

1871년, 백여명에 가까운 정부의 사절단은 나고야에서 출발하여 유럽과 아메리카 각국으로 떠났다. 사절단에는 49명의 메이지고위급 관원들이 망라되였는데 이 수자는 당시 정부관원 총수의 절반에 가까왔다. 이 방대한 사절단의 출행을 지탱하기 위하여 세워진지 3년밖에 안되는 메이지정부는 그해 재정수입의 2%를 내놓았다.

1년 10개월이란 시간에 그들은 유럽과 아메리카의 12개 국가를 고찰하였고 백권에 달하는 고찰실록을 썼다. 정부투입이 방대하고 관원 급별이 높았고 출방시간이 긴 이번 고찰은 일본 나아가 아시아국가와 서방세계 력사에서도 미증유의 행동으로 볼수 있다. 독일에서 일본사절단은 자기 나라의 발전모식을 찾은듯 했는데 그것은 바로 국가가 공업발전을 주도하는것이였다.

귀국후 일본공업화행정을 이끌어 나간 사람은 바로 《동양비스마르크》라고 불리우는 오쿠보 도시미치였다. 참의 겸 내무경으로 승임된 그는 메이지정부의 실제대권을 장악하였고 일본을 이끌고 한시도 지체할수 없는 현대화급행군을 시작하였다.

오쿠보 도시미치의 식산흥업계획에 의거하여 정부에서는 직접 서방으로부터 프랑스식의 제사공장, 독일식의 광산제련소, 영국식의 군수공장 등을 유치했다. 기계구매를 제외하고도 정부에서는 대량의 국외기술자들을 초빙하였다. 당시 외국적 전문가의 월로임은 최고로 2000엔에 달하였는데 이것은 메이지정부 고위급관리의 3배를 웃돌았다. 짐작컨대 당시 메이지정부 재정지출의 5분의 1은 전부 기업을 일으키는데 투입되였다. 국영공장을 개설하는 동시에 민간기업을 부추기는데도 힘을 기울였는데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 등 기업들도 이런 관영기업을 사서 경영하여 발전하였다.

미쓰비시는 일본에서 제일 이름있는 브랜드의 하나이다. 오늘날의 일본국내에는 100여개의 미쓰비시기업이 있으며 해외에도 수백개의 지사를 두고있다. 하지만 1870년에 미쓰비시는 3척의 작은 배밖에 없는 무명회사에 불과하였지만 정부의 부축하에 재빨리 날개가 돋쳤다. 1875년, 오쿠보 도시미치는 설립된지 5년된 미쓰비시회사더러 일본에서 상해로 통하는 항선을 개척하라고 요구하였다. 결과 1년도 안되여 미국태평양우편선회사, 영국의 반도회사와 동방항해회사는 이 항선에서 쫓겨났고 미쓰비시회사가 항운업무를 독차지하였다.

1873년, 33세의 시부사와 에이치는 이미 국가예산을 주관하였으며 모든 사람들은 그가 전도가 양양할것이라고 짚었다. 하지만 그는 상업에 종사할 심산에서 사직하고 관직을 버렸는데 그 당시로 말하면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였다.

중국 청화대학 력사학부 부교수 류효봉: 메이지유신이전에 일본에서 상인들의 지위가 실제상 그리 높은편이 아니였죠. 사직하고 상업에 종사한 그의 행동에서 뭇사람들은 상업도 매우 지위가 있고 지위있는 사람도 상업에 종사할수 있다는것을 인식하게 되였지요.

사직한후 그는 첫번째 일로 일본의 첫 주식제회사은행을 세웠으며 이때로부터 전기적 색채를 띤 기업가생애를 시작하였다. 19세기 80년대에 이르러 그는 일본상공업계에서 제일 주목을 끄는 인물로 되였다. 일생동안 500여개 기업을 창건한 그는 《일본현대기업거부》로 불리운다.

일본은 모습이 일신되고 메이지유신이 순조롭게 진행되는것 같았다. 바로 이 무렵 뜻밖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1878년 5월 14일, 아침 8시에 49세의 오쿠보 도시미치가 청수곡에서 피살되였다. 그렇다면 대관절 무슨 힘이 이번 변혁에 대한 그의 주도권을 결속하였는가? 무엇때문에 메이지유신이 진행된지 11년만에 갑자기 온 사회에 이런 크나큰 경탄을 던졌는가?

오쿠보 도시미치는 의지가 굳세고 언제나 태도가 단호하였으며 타협하지 않는 인물이였다. 부국강병, 식산흥업과 문명개화 이 3대 유신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강경한 그는 간단한 박래주의방식을 채용하여 개혁을 시행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공업발전에서 경혐이 부족하고 또 성급히 달성하려고 하였기에 재정이 어렵게 되였다. 문명개화행정에서의 지나친 행위는 일본의 전통문화를 붕괴의 변두리로 몰아갔다. 이 모든것은 불가피하게 현대문명과 본토전통의 격돌을 야기시켰고 개혁이 가져온 불공평은 이미전부터 존재하던 사회모순을 더욱 격화시켰다.

오쿠보 도시미치가 피살된후 개혁의 난제는 계승자인 이토 히로부미에게 남겨주었다. 그는 줄곧 오쿠보 도시미치의 유능한 조수로 활약했댔다.

상임한지 얼마 안되여 이토 히로부미는 부득이 국가의 발전방향과 개혁방식을 자세히 연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가 집권할적의 일본은 개혁으로 야기된 모순이 사회의 정치생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있었다. 서풍동진의 행정에서 눈을 뜬 일본민중들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한차례 대규모적이고 지구적인 자유민권운동이 일본사회 각 계층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우선 자유민권운동을 중심으로 하여 헌법제정을 정부에 요구하였다. 자유민권운동의 격화로 인하여 메이지정부는 헌법제정과 국회설립의 필요성을 느꼈다.
헌법제정이 대세의 흐름이라고 짚은 이토히로부미는 일본의 첫번째 헌법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10여년의 개혁경험은 그에게 간단한 박래주의방식은 일본사회의 변혁을 가일층 추진할수 없음을 알려주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헌법에 본국의 전통을 결부했다. 그러자 사람들로 하여금 리해하기 어려운 현상이 나타났다. 본뜻에서 민권보호를 위하고 사실상 민권이 들어간 헌법에 이토 히로부미는 천황의 절대적권력을 확립하는 조목을 가첨했다. 이는 무엇때문일가?

무슨 영문에서인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은 일부 종교성에 근접했다. 절대다수 일본인들은 이 종교가 없다면 일본은 일본이 아니라고 여기였는데 당시 일본현대화행정을 추진하는 사람들도 이렇게 인정했다. 이토 히로부미도 당연히 이런 사상조류를 리용하였다.

1889년 2월 11일, 이토 히로부미가 작성한 《》대일본제국헌법《》이 반포실시되였다. 《제국헌법》은 메이지유신성과를 공고히 하는 동시에 일본전통에서 천황에 대한 존경과 숭배를 빌어 법률의 형식으로 천황은 신성불가침범적이고 군대를 통솔하고 대외선전 등 일체 대권을 가지고있음을 확인하였다.

《제국헌법》은 일본으로 하여금 정치상에서 실시한것은 표면적으로는 다당제이지만 실제로는 천황제이며 이로부터 일본 궐기초기의 대외확장, 대내고압적인 군국주의의 추향이 정해졌다. 하지만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오히려 이로써 날로 첨예해지는 사회모순을 풀어갔다. 헌법이 반포된후 일본경제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고 극단적인 서방화도 차츰 억제되여갔다.

이와 동시에 일본도 독일을 본받아 자유주의경제와 다른 일종의 발전모식을 채용하였다. 즉 자본주의기본성격을 보류하는 전제에서 경제운행의 방법을 개변시켜 국가가 주도적력량으로 되게 하였는바 이로부터 공업화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되였다.

1910년에 이르러 일본의 95%이상의 남자와 90%이상의 녀자들이 모두 교육을 받았다. 영국과 일본의 철도길이는 메이지유신초기의 1000분의 1로부터 4분의 1로 축소되였다. 보건대 일본은 공업화국가 같았지만 서방공업강국과 비교하면 아직도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일본은 재빨리 서방공업국을 따라잡고 초월하는 경로를 찾기에 무등 애를 썼다.

19세기말엽에 일본의 저명한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우리 나라는 절대 망설여선 안된다. 이웃나라의 발전을 기다려 함께 동아시아를 부흥시키기 보다는 차라리 거기에서 빠져나와 서양의 여러 문명국가와 함께 발전하는 편이 낫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였다.

이른바 서양 각 《문명국가》는 당시 전 지구적으로 세력범위를 쟁탈하고있었다. 메이지유신으로 국력이 증가되자 일본군국주의는 대외확장의 발걸음을 다그치기 시작하였다.

중국사회과학원 일본연구소 소장 장립봉: 메이지유신은 1890년 전후에 결속되였다고 봐야지요. 후에 일본의 국가전략은 개혁을 통한 발전추진으로부터 1890년 이후에는 전쟁을 통한 발전에로 변하였지요.

1894년의 중일갑오전쟁, 1904년의 일로전쟁, 1914년의 제1차세계대전, 거듭되는 대외침략으로 일본은 조선과 중국의 대만을 점령하였고 대량의 자원과 배상금이 일본국내에로 흘러들었다. 갑오전쟁이후만 보더라도 일본이 중국에서 빼앗아간 배상금액수는 당시 국가재정수입의 4배를 웃돌았고 배상금중의 절반이상은 해륙군 군비확충에 썼다.

몇번의 득을 본 일본군국주의는 야심이 더욱더 커갔으며 나중에는 《동아시아공영권》을 세워 태평양과 인도양을 독점하려는데까지 발전하였다. 반세기동안의 기나긴 세월속에 일본의 세력확장전쟁은 련이어 지속되였다.

1931년 9월 18일 중국 동북을 침략하였고 1937년 7•7로구교사변을 일으켰다. 1941년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1945년 원자탄의 폭발과 더불어 무력에 의거하여서 세계를 제패하려던 일본군국주의의 꿈은 파멸되였다. 침략전쟁은 다른 나라들에 재난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일본에도 훼멸적인 타격을 주었다. 메이지유신이 시작된지 근 80년동안 쌓아온 물질성과는 전쟁으로 하여 재더미로 되다싶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허속에서 일본이 단 20여년의 시간을 리용하여 경제의 재기를 이룩할줄은 그 누구도 예견치 못하였다.

중국사회과학원 일본연구소 연구원 김희덕: 일본이 전패후에 페허로 되였으나 여전히 메이지유신이래 백여년동안 발전해오던 밑천 즉 과학기술인재와 공업화를 실현하는 기초가 있었지요. 때문에 물질적으로는 마치 층집이 무너진것 같지만 연성실력이 보존되여있었는데 이는 일본이 전쟁후 경제가 급속히 일어서는 기초였지요.

1968년에 일본의 국민생산총액은 1419억딸라에 달하여 미국과 쏘련에 이어 세계 제3대 경제강국으로 되였는데 그해가 바로 메이지유신 100주년이였다.

일본이 100년동안 걸어온 대국의 길을 살펴보면 확실히 총화해야 할것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어떻게 총화하든 의심할바 없는것은 오늘의 세계에서 어느 나라의 궐기든 대내적으로 인민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대외적으로 세계에 평화와 안전한 복지를 마련해주는데 그 참뜻이 있는것이다. (다음기에 계속)

  래원: 지부생활 (편집: 김홍화)

관련뉴스:
[본문 프린트]  [편집에게 편지쓰기]  [E-mail추천]
메모구역
주의사항:
1. 중화인민공화국 해당 법률, 법규를 준수하고 온라인 도덕을 존중하며 일체 자신의 행위로 야기된 직접적 혹은 간접적 법률책임을 안아야 한다.
2. 인민넷은 필명과 메모를 관리할 모든 권한을 소유한다.
3. 귀하가 인민넷 메모장에 발표한 언론에 대하여 인민넷은 사이트내에서 전재 또는 인용할 권리가 있다.
4. 인민넷의 관리에 대하여 이의가 있을 경우 메모장 관리자나 인민일보사 네트워크쎈터에 반영할수 있다.
메모 남기기:
서명:
     
48시간 인기뉴스
1중국인민해방군 향항주둔 …
2산서 벽돌공장노예사건 충격
3호금도 훈령에 서명 중국…
4훈춘을 두만강지역의 중심…
5확고부동하게 중국특색의 …
6중공중앙 국무원 신소활동…
7신강창길회족자치주고찰단 …
8중앙재정 농민들의 올림픽…
9연변주 당원대오 생기발랄
10우리 나라 립법 완비화해…
추천뉴스
·중국인 평균수명 남성 71…
·연변주 당원대오 생기발랄
·중앙재정 농민들의 올림픽경…
·중공중앙 국무원 신소활동 …
·장백조선족자치현에서 단오절…
·대형조선족민속무용 《사계절…
·연변문화의 정립과 그 사명
·《비》 내리는 신비의 수양…
·《우리 전통음식 맛보세요》
·연길시의 미래는 어떠할가?
특집추천
사회주의 조화로운 사회를 구축하자
과학적발전관을 관철하여 조화로운 사회를 구축하자
중국혁명을 위하여 중요한 기여를 한 겨레의 불멸의 력사
  ·홍군포병의 창시인 무정
·장정에서의 력사적순간들
·리완빈 장정코스 계속 이어…

E_mail: korea@peopledaily.com.cn

인민일보사 소개 | 인민넷 소개 | 중국공산당뉴스 소개/련락방식 | 사이트맵
저작권은 인민넷 소유이며 서면허가 없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도 사용할수 없습니다.
Copyright © 1997-2006 by www.people.com.c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