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씨야 전임대통령 예리친은 4월 23일에 심장병이 더 심해져 갑자기 서거하였다. 쏘련의 해체를 보아온 로씨야련방 제1임 대통령으로서의 예리친의 일생은 파란곡절적이였다. 그의 선명하고도 복잡한 개성도 이런 곡절속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로씨야련방대통령으로 근 8년 반 있은후 1999년에 예리친은 갑자기 사직을 선포하였다. 사임후 그의 첫번째 출국휴양지는 중국이였다.
2001년 5월 28일, 중국측의 초청을 받고 예리친은 안해와 함께 로씨야측이 제공한 특별기를 타고 중국으로 왔다. 그날 중국국가주석 강택민과 부인 왕야평이 중남해에서 예리친부부를 접견하였다. 예리친은 북경에서 옛친구를 다시 보게 되니 아주 친절한 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하였다. 예리친은 자신이 대통령직을 사임한후 첫 출국휴가지로 중국을 잡은것은 자기가 강택민주석과 함께 손수 개척한 중로전략협력파트너관계를 줄곧 아주 중시하고있기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료녕성 대련시로 료양을 갔다. 대련에 12일간 머물러있는기간에 중의치료를 받았으며 중국교습교사한테서 기공도 배웠다. 그때 예리친부부한테 중의치료를 해준 사람은 중국의 이름난 로중의이며 대련시중의학회 중의진찰주임인 백장천교수였다.
휴가가 끝나 귀국한후 예리친의 대변인인 불라지미르 써브친크는 예리친이 《휴가후 느낌이 이전만 좋다…그는 해변가에서 휴양하였고 대련시도 참관하였는데 좀 거무스럼하게 탔다》고 말하였다. 예리친은 또 료녕성에서 그를 위해 거행한 공연을 아주 마음들어 하였다. 공연시 중국모습을 반영한 종목도 있었고 로씨야가곡도 있었다. 예리친은 많은 사진을 찍었다.
예리친은 대련려행을 늘 잊지 않았다. 2006년 2월 1일 그가 75살되는 생일전야에 로씨야텔레비죤방송국에서 제기한 건강상황문제에 대답할 때 그는 《나는 중국 대련에서 휴양하였었는데 그곳에서 수영하고 기공을 배우고 치료를 받았다. 돌아온후 어떤 사람들은 내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고 말하고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롱지거리로 중국의 산과 물, 공기는 자신을 다시 젊어지게 하였다고 말하였다. 신체단련을 위해 예리친은 그리 체력이 들지 않는 중국기공을 배웠다. 듣는 말에 의하면 예리친은 한 중국기공사를 자기의 교습교사로 청하였다 한다.
예리친의 중국과 대련에 대한 찬양은 로씨야에 《대련치료붐》을 불러일으켰다. 모스크바시 시장 등 고위급관원들이 잇달아 대련으로 찾아와 대련 금석탄휴가지에서만 해도 2005년에 선후로 중의치료를 받으러 온 로씨야손님을 연인수로 2000여명 접대하게 되였다. 이는 2004년보다 한배 늘어나고 2003년보다 10배 늘어난셈이다.
사임후 중국에 와 휴양한외에 예리친은 또 처음으로 로씨야주재 중국대사관으로 찾아왔었다. 2002년 3월 1일, 그는 안해 나나와 함께 로씨야주재 중국대사관으로 찾아와 중국측일군들과 두시간 반가량 함께 보냈다. 예리친은 《나는 처음으로 중국대사관에 와본다. 내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에는 당신들이 나를 초청하지 않고 지금 내가 대통령이 아니자 장(덕광)대사와 그 부인이 우리를 초청하였다. 앞으로 당신들이 초대회같은 활동을 거행한다면 나는 또 올것이다.》고 유모아적으로 말하였다. 그는 여생에 로중 두 나라와 두 나라 인민간의 친선을 추진하기 위해 힘쓸것이라고 말하였다.
집권 8년 반되는 사이에 예리친은 선후로 네번 중국을 방문하였고 여덟번 중국지도자와 만났다. 이런데서 두 나라관계가 대활보로 전진하게 되였을뿐만아니라 두 나라 관계를 정성들여 수호하게 되였으며 중국에 대한 그의 정분을 나타내게 되였다.
나토가 1995년 5월에 유고슬라비아주재 중국대사관을 폭격하자 예리친은 손수 핫라인으로 강택민과 이야기하였고 특사를 파견하여 중국인민에게 동정과 지지를 표시하였으며 동시에 나토의 폭행을 엄하게 질책하였다.
모스크바주재 신화통신사의 기자도 중로관계에 대한 예리친의 중시를 감수할수 있었다. 1992년 12월 17일, 예리친이 모스크바를 떠나 중국을 처음 방문하게 되였을 때 수백명의 기자들이 한시간 앞당겨 모스크바공항으로 갔다. 각국 기자들의 포위속에서 대통령보도비서가 신화사기자를 예리친의 신변에 데리고왔다. 기자가 입을 열기도전에 예리친이 큰소리로 《신화사기자가 어디에 있어요?》라고 물었다. 《바로 옆에 있습니다》는 말을 듣자 그는 안심하여 《무슨 문제를 제기하려는가?》고 묻는것이였다. 처음으로 되는 중국방문의 목적을 이야기해달라고 하자 그는 인차 《로중선린친선관계를 발전시키는것이다》고 말하였으며 이어 그 리유를 천명하였다. 이 모습을 보자 그자리에 있던 다른 나라의 기자들은 부러움을 금치못했고 중로관계에 대한 예리친의 중시를 깊이 느끼게 되였다.
중국에서 돌아온후 예리친은 공항에서 신화사기자의 물음에 대답하였다. 그는 중국방문성과를 아주 만족스레 생각한다고 하였으며 중국의 개혁개방성과에 대해 탄복을 표시하였다. 하지만 방문시 원 계획대로 심수특구로 가보지 못한데 대해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하였다.
예리친이 서거할 때 곧 중로전략협력파트너관계가 두번째 10년에 들어섰다. 쏘련은 1991년 12월에 해체되였다. 6년후의 1996년 4월에 당시 로씨야대통령으로 있던 예리친은 중국을 방문하면서 강택민주석과 《중로련합성명》에 서명하여 중로 두 나라는 평등신임하고 21세기를 지향한 전략협력파트너관계를 발전시키기로 결심하였다고 선포하였다. 짧디짧은 5년사이에 중로 두 나라는 1992년 12월에 확립한 《상호 친선국가로 간주》하는 관계로부터 1994년 9월의 건설적파트너관계로 승격하였으며 1996년 3월에는 전략협력파트너관계를 확립하게 되였다. 말할 필요없이 예리친의 원견은 추동적역할을 놀았던것이다.
예리친이 갓 대통령으로 되였을 때 로씨야의 외교중심은 서방이였다. 이 외교전략이 좌절당한후 그는 더욱 아태국가 특히 아태린국과의 관계를 중시하게 되였다. 로씨야의 가장 중요한 린국중의 하나로서의 중국은 로씨야외교정책의 중점중의 하나로 되였다. 나토가 동부로의 확장을 시작한후 예리친은 더욱더 대 중관계에 중시를 돌리였다. 1994년 1월에 그는 외교부장 안데레 커지레브더러 자기의 친필신을 강택민한테 넘기게 하였다. 그 편지에서 그는 중로사이에 21세기를 지향한 《건설적파트너관계》를 건립하자고 제의함으로써 중로관계를 전면적으로 새로운 단계에로 추진시켰다.
1994년 5월에 강택민은 중국을 방문하러 온 로씨야총리 체르노멜긴한테 쌍방은 반드시 21세기에 착안하여 전략적높이로부터 두 나라 관계를 고려하고 처리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같은 해 9월에 강택민은 로씨야를 방문할 때 예리친과 《중로련합성명》에 서명하여 두 나라가 21세기를 지향한 《건설적파트너관계》를 건립한다고 즉 평화공처 제반 원칙에 토대한, 완전평등한 선린친선, 호리협력관계 다시말하면 동맹도 맺지 않고 제3국도 겨냥하지 않은 관계를 건립한다고 정식으로 선포하였다. 이는 중로관계가 두번째 단계에 올라섰음을 표징한다. 그 다음해 강택민은 로씨야에서 예리친과 다시 만났다. 1996년 4월에 두사람은 북경에서 《중로련합성명》에 서명하였다.
매체들은 예리친이 1996년 4월에 중국방문을 떠나기 전에 쌍방은 련합성명문을 기본상 작성해놓았다고 보도하였다. 하지만 방문이 시작되는 그전날 밤에 중국주재 로씨야대사관의 주관관원이 중국측에 긴급히 통보하여 예리친대통령이 전용기에서 쌍방이 토의한 문건을 읽어본후 문건이 두나라 관계의 발전방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고 여기고 두 나라 관계를 《평등하고 21세기를 지향한 전략협력파트너관계》로 묘사하자고 건의하였다고 하였다. 그의 이 제의는 중국측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예리친은 중로친선을 위하여 훌륭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두 나라 정치거래가 날로 늘어남에 따라 두 나라는 원수가 해마다 서로 방문하고 총리가 정기적으로 회담하며 외교부장이 늘 상론하는 등 기제를 건립하게 되였다. 두 나라는 각자 국가 주권, 독립과 령토완정을 수호하는 면에서도 서로 지지하고있다.
사임후 예리친은 자신은 중로전략파트너관계를 건립발전시키기 위해 일했으며 두 나라 관계가 날로 발전하고 인민들의 친선이 날로 공고해지는데 대해 만족을 느낀다고 말하였다.
예리친은 재임중 중국측과 함께 쌍방이 오래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국경선문제해결에 착수하였다. 중로는 4000여킬로메터 넘는 국경선을 가지고있고 서로 친선적인 선린관계가 있다고 하지만 국경선획분문제에서는 줄곧 쟁의가 있었다.
중국총리 리붕은 1992년에 뉴욕 유엔총부에서 예리친과 회담할 때 중국은 평화공처5항원칙과 1989년 및 1991년의 중쏘관련련합공보의 토대우에서 계속 로씨야련방과의 선린친선관계를 발전시키련다고 표시하였다. 리붕은 중로 두 나라의 국경선이 평화적이고 친선적인 국경선으로 될것을 바란다고 말하였다. 예리친은 로씨야는 1989년과 1991년 중쏘련합공보의 원칙을 지킬것이며 로씨야련방의회는 될수록 빨리 이미 체결한 중쏘국경 동부지역협정을 비준할것이라고 말하였다. 같은 해 4월에 중로국경 동부지역탐사조사전문가회의가 북경에서 거행되였고 쌍방은 국경탐사조사사업에 착수하였다.
국경선 동부지역문제의 해결이 궤도에 들어섬에 따라 중로쌍방은 또 국경선 서부지역문제해결에 착수하였다. 1993년 6월에 국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인 전기침이 로씨야를 방문하여 쌍방은 중로국경선 서부지역협정을 체결하였다. 그후 쌍방은 여러 성명과 공보에서 협정을 지킬 약속을 재언명하였으며 규정된 기한내에 국경탐사조사사업을 끝내서 국경지구의 안녕, 화목과 협력 분위기를 증강하기에 힘쓰련다고 말하였다. 1994년 9월에 쌍방은 《중로국경선 서부지역협정》을 체결하였다.
2005년 6월에 중로 두 나라는 《중로국경선 동부지역에 관한 보충협정》비준서를 호환하였는데 이는 두나라가 력사적으로 남아내려온 모든국경선문제를 철저히 해결하여 선린협력과 인민들의 세세대대로의 친선을 위해 믿음직한 담보를 마련하였음을 표징한다. 이는 또 《세세대대로 친선적으로 지내고 영원히 원쑤지지 말자》는 평화적사상과 영원히 좋은 이웃, 좋은 파트너, 좋은 친구로 되려는 언약도 구현하였다.
이밖에 예리친은 중국과 로씨야가 중아국가들과 다각협력을 벌리는것을 적극 지지하였다. 1996년 5월에 예리친은 중국, 까자흐스딴, 따쥐끼스딴, 끼르끼즈스딴 지도자들과 함께 상해에서 상해협력기구의 전신인 《상해5국》대화기제의 탄생을 선포하였다. 이 기제 및 그 이후의 상해협력기구는 중국과 중아국가들이 력사적으로 남아내려온 국경문제를 해결하고 선린친선관계를 발전시키는데중요한 역할을 일으켰다.
중국의 오랜 친구로서의 예리친의 서거로 하여 중국측은 몹시 애석해하고있다. 그가 서거한 이틀후인 25일 오전에 중국국무원 부총리 오의가 중국주재 로씨야대사관으로 찾아와 중국정부를 대표하여 예리친을 추모하였다. 오의는 애도의 제사를 쓴후 예리친의 유상에 향해 묵애하고 허리를 굽혔다. 오의는 자기는 호금도주석, 중국 정부와 인민을 대표하여 재차 예리친선생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뜻을 표시한다고 말하였다. 예리친은 《중로전략협력파트너관계의 창시자의 한사람이다》. 그는 임기내에 중로간의 력사적으로 남아내려온 국경선문제를 해결하였으며 쌍방이 함께 상해협력기구의 발전을 추동하고 세계의 다극화와 국제관계민주화를 추동하며 중로간의 세세대대로의 친선을 도모하는데 튼튼한 토대를 닦아놓았으며 세계의 평화를 수호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중국국가 주석 호금도는 로씨야대통령 브라지미르 푸틴한테 보낸 추도전보에서 예리친은 중국인민의 친밀한 벗으로서 그가 중로친선위업의 발전을 위해 한 뚜렷한 기여는 영원히 중로친선의 력사에 씌여져있을것이라고 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