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9월 20일 왕청현 배초구 우리 집에 왕청현정부 판공실의 김대연이라는 간부가 찾아왔다.
그는 아버지한테 현장을 대신해 찾아왔다고 하면서 온 목적은 오늘저녁 가정좌담회를 열고 모주석의 의사를 전달해드리겠다고 하는것이였다.
《고맙소! 이런 보잘것 없는 농민가정에 찾아오시다니.....》
아버지는 손님과 이렇게 말씀하시고나서 나를 보고 생산대간부와 이웃의 친우도 우리 집의 가정좌담회에 참가하게 하라고 말씀하시였다. 이리하여 로인독보조 로인들과 생산대간부인 김현진, 유익홍과 나의 친우 오승송이 가정좌담회에 참가하게 되였다.
김대연은 우리 집에서 가정좌담회를 열게 된 자초지종을 말하였다.
《오늘 저녁 박아바이 집에서 가정좌담회를 열게 된것은 모주석께서 베풀어준 좌담인것입니다. 1956년 초봄에 우리 배초구에 전형적인 고급사가 섰습니다. 그때 상운아바이는 배초구 고급사의 성립을 위하여 시를 창작해서 주덕해주장에게 보이고 그 시를 그 이튿날 아침에 다시 한부 붓으로 정성들여 써서 궤짝에 두었다가 1959년에 모주석께 보내드렸습니다. 그때 상운아바이는 모주석에게 보내드리며 만년의 신체보양에 쓰시라고 자류지에 담배를 심어 수입한 30원도 편지와 함께 보내드렸습니다》
《모주석께서는 박아바이의 시를 보시고 칭찬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박아바이가 보낸 돈 30원도 받으시고 감사의 뜻을 표시하고 그 돈을 돌려 보내라는 지시를 주총리에게 위탁하였습니다. 주총리께서는 모주석의 지시를 받들고 문건을 발급하여 길림성과 왕청현에 모주석의 이 지시를 전하였습니다... 오늘 이 좌담회에서 모주석께 보냈던 그 시를 한번 좌중에게 발표하고 합작화된후 번신된 가정정황도 이야기하십시오. 그러면 전 방문정황을 주총리에게 회보하겠습니다》
김대연의 말이 떨어지자 아버지는 궤짝을 열고 모주석에게 보냈던 시를 꺼내 읊었다.
모택동사상 이 땅에 빛발치니 고급합작사 이룩되여 가난의 뿌리도 물러가고 집체화된 힘은 하도 커서 번신된 농민들 집집마다 떡메소리, 웃음소리, 폭죽소리 울리며 꽃피는 락원 이루어졌네!
시를 읊으시고나서 아버지는 긴 흰수염을 한번 훑어내리시고 착취받고 압박받고 기아에 허덕이던 과거지사와 해방후의 행복한 생활을 대비하여 이야기하셨다.
해방후 우리 형제들은 모주석의 은덕을 잊지 않고 맡은바의 사업을 열심히 해나갔다. 가끔 오매에도 그리던 모주석께서 나타나시여 인자하신 얼굴로 나와 다정히 악수하여 주시며 학습과 사업을 잘하라고 면려해 주시기도 했다.
헌데 오늘은 모주석께서 직접 현정부 김대연동지를 우리 집에 파견하여 가정좌담회를 열게 하니 우리 가정의 행복을 나는 노래로 지어 회보해 드리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미치자 나는 안해의 손을 붙잡고 좌중의 앞에 나서서 노래를 흥겹게 불렀다.
앞에는 가야하 맑은물 안고 뒤로는 쿨룽산을 병풍으로 삼아 20리 옥토밭을 병풍으로 삼아 내고향 배초구는 살기도 좋은곳.
우리 부부가 노래를 부르게 되자 온 집식구와 좌중은 모두 일어나 노래에 맞추어 너울너울 춤을 췄다. 우리 부부의 명랑한 노래소리는 행복단란한 우리 가정의 소식을 싣고 멀리멀리 천안문으로 울려퍼지는것만 같았다.
그때의 모주석의 은덕을 명기하고 맡은바 사업에 노력하여 나는 선후로 모범당원, 선진당무일군 등 수많은 영예를 안아왔다. 허나 그것으로 만족치 않는다. 그때는 혈기왕성한 37세의 장년이였으나 오늘은 84세 불구의 병상의 몸이지만 왼손으로 이 글을 써서 당창건 86주년을 맞아 재선서하는것으로 헌례한다.(연길시 북산가두 단연사회구역11조 박운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