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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국의 궐기-대국들이 흥망성쇠하고 교체되는 이야기(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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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대륙북부의 광활한 땅에는 세계상에서 국토면적이 제일 큰 나라인 로씨야련방이 있다. 몇세기이래 이 땅에서 생활하고있는 민족은 세계무대에서 특수한 역할을 해왔다. 그들은 전통적인 군주통제와 강대한 군사력을 빌어 유럽,아시아,아메리카에 세력을 뻗친 대제국으로 되였고 유럽사무중재자의 신분으로 한시기 위풍을 떨쳤다. 18세기 초부터 짜리황제의 주도하에 시작된 개혁은 로씨야 대국의 길에 기복을 일으켰다. 매번 재난후에는 더욱 강대해졌는가 하면 후에는 강성의 정상에서 좌절도 당하였다. 자기발전의 길을 찾는 2세기동안 이 광활한 땅에서는 구경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강성의 길을 찾아 1698년 10월, 모스크바는 엄동설한보다 더욱 스산한 공포적인 기분이 맴돌았다. 한달도 안되는 사이에 반역을 꾀한 천여명의 사격군 관병들이 처형되였는데 형장을 감독한 사람이 바로 로씨야사상 이름있는 표트르대제이다. 그렇다면 사격군은 왜 자기의 군주를 배반했는가?
1697년 8월, 짜리황제는 비밀리에 서유럽으로 류학을 떠났다. 그는 선후로 네덜란드,스웨리예,프로이센,오지리,영국 등 나라들에 갔으며 주위의 모든것에 대해 각별한 흥취를 가졌다. 세계사상 한 나라의 군주가 그처럼 멀리 국외에 가서 선진적인 과학문화지식을 섭취해 온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이런 행동은 로씨야에서 크나큰 분쟁을 일으켰다.
북경사범대학 로씨야문화연구중심 교수 장백춘: 로씨야민족은 자기들이 아주 독특하고도 위대하기에 매우 독특한 사명을 지니고있다고 여기였는데 그게 바로 전반 세계를 구하는것이였지요.
이런 유아독존의 신념의 지배하에서 로씨야의 짜리황제들은 령토확장의 길에 들어섰다. 하지만 광활한 국토를 제외한외에 로씨야는 각 방면에서 당시의 서유럽국가들에 비해 뒤떨어져있었다. 로씨야와 서유럽의 차이는 표트르대제로 하여금 류학하려는 소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국문을 나설 때 자기의 신민들이 마음속으로 근본 그의 거동을 접수할수 없었다는것을 몰랐었다. 그는 거의 하루밤사이에 로씨야인이 몇세기동안 양성해온 민족우월감을 분쇄하였다.락후를 인정하는것은 그 어떤 민족이든지 극히 고통스러운것이다.
1698년 7월, 사격군단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국내밀보를 접수한 표트르대제는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그는 제일 참혹한 방식으로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직접 기병도로 한 병사의 머리를 잘라냈다. 폭란을 평정한 그는 한차례의 사회개혁을 진행하였다. 그는 로씨야의 전통력법을 폐지하고 유럽에서 통용되고있는 기원기년으로 대체하였으며 서유럽의 언어습관에 근거하여 로씨야의 문자를 개혁하였다.
1700년 9월, 표트르대제는 빨찍해로 통하는 출해구를 빼앗기 위해 스웨리예에 대한 전쟁을 발동하였는데 10만 로씨야대군은 오히려 8천명의 스웨리예의 병사에게 쉽게 패하고말았다. 전패후의 표트르대제의 개혁중점은 강대한 군대를 건립하는것이였다.
1709년, 스웨리예에 패배당한 9년후 로씨야는 재차 스웨리예와 맡붙었는데 이번에 그들은 대승리를 거두었고 지휘작전하던 모든 스웨리예장군들을 포로하였으며 빨찍해출입구를 차지하였다. 스웨리예국왕은 100명도 안되는 사람들을 데리고 토이기로 망명갔다. 전쟁의 결과는 로씨야의 유럽에서의 지위를 급격히 개변하였다.
1713년, 표트르대제는 로씨야력사에 심원한 영향을 주는 결정을 내렸는데 800년 력사를 가지고있는 모스크바를 포기하고 참신한 수도인 싼끄뜨-뻬쩨르부르그를 세웠다. 그는 두려움없이 계속 개혁을 시행하였는데 자기의 엄혹하고 무정함은 바로 국가의 강성을 위한것이라고 여겼다. 야만적인 방식으로 로씨야문명발전을 추동해온 그는 개혁이 로씨야인을 인내의 극한으로 몰아붙인다는것을 의식하지 못하였다. 그는 거의 모든 신민들을 강박하여 모든것을 남김없이 바치라고 하였다. 로씨야는 이미 자유인이 없어졌으며 농노를 비롯하여 귀족마저 반드시 죽을 때까지 정부를 위하여 복역해야 했다.
1725년 1월 28일, 표트르대제가 세상을 뜬 이해에 그가 친히 창건한 국가과학원이 정식으로 성립되였다. 그는 전례없이 강대하나 정신상에서 평형을 잃은 로씨야제국을 남겨두었다. 그는 로씨야를 위하여 《유럽으로 향하는 창구》를 열었고 보수적이던 국가를 개혁의 도로에 들여놓았지만 이와 동시에 상당한 정도상에서 이 민족과 자기력사의 련계를 끊어놓았다. 어떻게 전통과 현대의 관계를 처리하는가 하는것은 아마도 후발국가가 모두 직면하게 될 어려운 력사과제이다. 필경 유구한 전통을 가진 국가는 현대화발전과정에서 력사를 단절시켜서는 안되며 자기의 문화귀속을 잃어버려서는 안되는것이다. 표트르대제가 죽은후 로씨야는 37년간에 6명의 짜리황제를 바꾸었다.
1762년, 33세나는 녀황제가 짜리황제의 보좌에 올랐는데 력사상에서는 그를 예카테리나라고 부른다. 등극하자마자 그는 자기를 표트르대제의 계승자라고 자칭하였으며 로씨야는 곧 표트르대제가 창립한 길로 돌아올것이라고 하였다. 독일의 한 공작의 딸로서 그는 아버지의 강렬한 반대도 마다하고 원래의 신앙을 포기하고 로씨야 동정교로 넘어갔다. 그녀는 로씨야에 무엇을 가져다줄것인가?
중국 북경사범대학 력사학부 교수 장건화: 예카테리나는 로씨야인의 앞에서 모의천하의 형상으로 있었기에 빠른 시일내에 로씨야백성의 승인을 얻었지요.
그가 로씨야를 통치할 때 계몽운동이 유럽대륙에서 흥행하고 있었는데 녀황은 숭배할 정도로 이런 계몽사상가들을 대하였다. 그는 교육을 보급하기 시작하였으며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황실기금을포기하였는데 당시 짜리황제의 개인경비는 대략 로씨야국가지출의 13분의 1일을 차지하였다.
로씨아력사학가 빠블벤꼬: 1775년 모든 성소재지도시에 4년제학교를 세웠고 각 성의 현소재지에 2년제학교를 세웠는데 18세기말엽에 전국에는 2만여명의 학생들이 이런 학교들에서 공부하고있었지요.
1767년 예카테리나가 등극한 5년째해에 그녀는 개혁중에서 제일 관건적인 한걸음인 유럽의 법제를 로씨야에 인입하려고 하였다. 그녀는 2년이라는 시간을 들여서 직접 《법전기초지도서》를 작성하였는데 600페지에 달하는 이 책에는 계몽운동이 창도한 평등,자유, 박애의 사상들이 나타났다. 그녀는 《나는 사람마다 법률을 지키길 바라나 노역은 수요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아마도 시대의 변화인지 그는 표트르대제와 부동한 방식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로씨야농노제의 형성과 확고화는 로씨야 로동력자원의 부족함과 관련이 있었다. 자유와 인권을 찬양하고 일심으로 개혁을 진행하려던 그는 재차 전통과 현대의 모순 즉 농노제와 공업화의 모순에 빠지게 되였다. 그녀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농노제를 폐지할수 있겠는가?
1768년 12월, 아무런 성과도 취득하지 못한 정황하에서 립법위원회는 무한기휴회를 선포하였다. 그의 제일 중요한 개혁조치가 실패한것이다. 녀황은 표트르대제와 마찬가지로 로씨야사회의 실질을 개변하지 못하였다. 군주본인에 의거하여서 시행한 개혁이 자기를 뒤엎는데 사용할수 없는것이다. 때문에 그는 프랑스혁명의 소식을 들었을 때 계몽사상이《프랑스의 온역》이라고 공개적으로 지적하였다. 제국을 건립하기 위하여 녀황은 더욱 많은 사람들을 농노로 만들었는데 표트르대제시대와 다른 점이라면 녀황은 귀족들의 지지가 필요했기때문에 귀족들에게 더욱 많은 자유를 주었다. 녀황은 대내로는 전제주의, 대외로는 확장의 방식을 채용하여 로씨야의 강대화를 추구하였다. 그가 통치한 34년간 로씨야는 국토가 유럽,아시아,아메리카 3대주를 가로탄 초대제국으로 되였고 녀황제 본신은 로씨야사상 두번째로 《대제》로 불리우는 군주로 되였다.
예카테리나가 죽은후 유럽 전체를 휩쓸었던 나뽈레옹군대가 이 방대한 제국에서 패배의 맛을 보았는데 이는 유럽전체의 패세를 만회하였다. 1814년 알렉산데르1세는 백마를 타고 빠리에로 들어갔으며 유럽신성동맹의 맹주로 추천되였으며 이로써 로씨야는 유럽사무의 중재자로 되였다. 하지만 농노제가 초래한 사회모순은 해결책이 없기에 로씨야의 공업화발전과정은 엄중한 저애를 받았다. 무력으로 확장한 대국지위의 휘황을 유지하는것은 잠시뿐이였다.
19세기중엽에 이르러 영국은 이미 제1차공업혁명을 완성하였고 프랑스와 독일도 공업화의 급행군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짜리황제전제통치하에서의 로씨야는 자기의 위기를 의식하지 못하였다. 1856년 영국, 프랑스와 진행했던 크릠전쟁의 실패로 로씨야는 유럽을 좌우지하던 정상에서 신속히 떨어졌다. 전쟁의 실패는 로씨야인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자기와 유럽강국지간의 거리를 느끼게 하였다. 지식계, 공상계 지어 일부 주요한 직무를 담당하고있는 관원들을 포함하여 모두 나서서 공업화발전과정에 영향을 주는 봉건농노제도를 지적하였다. 1860년, 사회의 거대한 압력하에 로씨야는 근 5세기동안 시행해오던 농노제도를 폐지하였다. 농노제의 개혁은 로씨야의 공업발전에 대량의 로동력과 광활한 시장을 제공하였다.
전쟁판에서 돌아온 이듬해 똘스또이는 로씨야의 미래를 찾기를 바라며 유럽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똘스또이가 이번 행차에서 본것은 유럽강국의 발달뿐만아니라 자본주의가 원시적축적단계에서 일으킨 사회모순도 보았다. 똘스또이는 자본주의제도는 사회의 빈부차이를 없애지 못했을뿐만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압박하는 현실을 개변하지 못하였고 사람들에게 더 많은 자유도 가져다주지 못했다는것을 발견하고 실망하였다. 똘스또이처럼 곤혹을 가지고있는 지식분자,귀족출신,평민출신들은 강국의 길에서 몇번씩 기복하던 로씨야를 보면서 모두 새로운 사고와 선택을 하기 시작하였다. 쟁론의 과정에서 똘스또이, 체르늬쉡스끼 등 문화거장들이 용솟음쳐나왔는데 그들의 출현은 로씨야민족을 학생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며 자기의 두뇌로 외부세계를 관찰하고 사색하게 하였으며 세계에 자기의 관점을 표달할수 있게 하였다. 각종 사상선택과 실천운동에서 로씨야는 20세기에 들어섰다. 1905년, 로씨야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실패한후 자산계급혁명이 폭발하였으며 끝내 짜리황제로 하여금 국가뜌마를 성립하도록 하였고 동시에 총리대신을 임명하여 개혁을 시행하게 하였다.
중국북경사범대학 문학원 교수 오택림: 제일 기본적인 사상은 바로 공동부유의 길, 농민공동체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것이죠. 즉 모든이가 개인재산이 없고 함께 서로 협조하며 생활하는 길을 걸어야 한다는것이죠.
하지만 2년후에 짜리황제는 국가뜌마를 해산시켰으며 똘스또이가 동경하던 공평과 조화로움은 오지 않았다. 지나간 근 2세기동안 국가를 강성에로 이끌었으나 짜리황제개혁은 막바지에 이르게 되였으며 로씨야의 발전에는 새로운 힘이 필요하였다. 똘스또이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운명을 관심하고있는 모든 로씨야의 지식인들, 그들의 몸에서는 하나의 리상주의색채가 체현되고있었다. 고통스러운 력사와 현실은 그들의 희망을 더 많이 미래에 기탁하게 하였다. 로씨야인에 대해 말하면 생활은 바로 하나의 리상을 찾는 순례의 길과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강렬한 사명감을 지니고 인류생존의 종국적인 문제에 대하여 주시하였다.
아마도 이 모든것이 바로 로씨야민족의 운명으로 하여금 비장한 색체를 띠게 하였고 이때문에 로씨야민족이 세계에서 제일 강대한 민족의 하나로 되게 한것 같다.
1917년 11월 7일 세계사상 첫번째 무산계급이 장악한 정권인 쏘베트정부가 탄생하였다. 20년간 이 정부의 령도하에서 빈궁하고 락후하던 농업국가가 기적적으로 공업화강국으로 변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그들은 거대한 희생대가로 급변하던 정세를 되돌려 세계평화를 유지하는데서 지워버릴수 없는 공헌을 하였다. 세계에 거대한 영향을 끼치던 초대국으로서 쏘련은 20세기에 국가발전의 새 길을 탐색하였다. 미증유의 이 사회실천은 구경 어떻게 진행된것인가?
풍운의 새길 로씨야는 영웅을 숭배하고 영웅을 수요하며 동시에 영웅이 배출되는 민족이다. 10월혁명의 승리는 볼쉐위크가 구세계를 개조하고 새 세계를 건립하려는 결심과 신심을 북돋우어주었다. 사람들은 레닌이 령도하는 쏘베트정부가 곧 완전히 부동한 길을 걸어나갈것이며 인민이 권리를 행사하고 모든 사람들이 일자리가 있고 다시는 착취를 받지 않을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새 사회를 건립하는것은 쉬운일이 아니였다.
1921년 봄 로씨야에서 대면적의 재황이 발생하였는데 3천여만명의 백성들이 기아속에서 허덕이였다. 금방 결속된 신정권보위전에서 공산주의정책은 지대한 위력을 나타냈다. 하여 쏘베트정권은 계속하여 농민의 여량을 무상징집하는 정책을 시행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이 정책은 농민들의 불만을 일으켰으며 일부 부농들은 지어 이 기회를 빌어서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외부세계의 봉쇄와 군사압력, 국내의 량식위기와 정치반란으로 하여 쏘베트정권은 경제발전에서 새로운 방식을 채용하기로 하였다. 1921년 3월 쏘베트정권은 새로운 경제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는데 우선 먼저 농민문제해결부터 착수하였다.
중국북경대학 력사학부 교수 서천신: 즉 농민들이 개체로 자기의 경제를 경영할수 있도록 허락해주고 시장의 존재를 허락하며 자본주의시장경제를 리용하여 생산을 회복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며 사회주의건설을 위하여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는것이죠.
상업령역에서는 직접 공업품을 농산물로 교환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화폐교역에 더욱 습관되여 있던 사람들은 물물교환을 진행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쏘베트정권은 국내자유무역을 회복하고 다시 은행체계를 건립한다고 선포하였다. 새로운 경제정책의 실시는 쏘련경제를 회복되게 하였다.
1923년 11월 20일,레닌은 쏘베트전회에서 《사회주의는 멀고먼 장래가 아니고 추상적인 환상이 아니며 새로운 경제정책의 로씨야는 사회주의 로씨야로 될것이다》고 말하였다.
1924년 1월 22일 쏘련인들은 존경스러운 형제, 자애로운 령도자,실천에 근거하여 로씨야를 위하여 미래를 계획하고 지도한 레닌을 잃었다.
그에 이어서 쏘베트정권을 령도한 사람은 일처리가 엄격하고 과단성있는 세인들에 잘 알려진 쓰딸린이였다. 레닌시대에 국가의 경제정책은 상당한 탄성이 있었으나 쓰딸린은 강경한 수단으로 국가공업화의 발걸음을 다그쳤다.
미국 예일대학 교수 폴로.케니디: 그들은 이 광대한 국가가 발전하려면 모든 자원을 집중하고 자산계급을 제한하며 자본주의체계를 제한하여 농업자원을 포함한 모든 자원을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있었지요.
공농업《가위차》의 방식으로 공업화자금을 축적하는것은 그전에 농민리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내놓은 새 경제정책을 곧 포기할것이라는것을 의미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쓰딸린은 쏘련이 수요되는것은 속도이기때문에 새 경제정책이 사회주의공업화건설에 리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20세기 20년대에 서방의 각국 경제는 1차세계대전으로부터 점차 회복되였으며 주요한 공업국가의 공업생산총액은 1차세계대전전의 수준에 도달하였거나 1.5배를 초월하였다. 일부 구미경제가들은 자본주의가 빈곤을 소멸하였다고 말하고있었으며 당면한 번영은 그들로 하여금 신심으로 충만되게 하였으며 계속하여 쏘련경제를 봉쇄하였다. 1927년 영국은 쏘련과 맺은 무역협정을 페지하였으며 영쏘관계를 단절한다고 선포하였다.
의지할데 없는 쏘련은 견딜수 없는것 같았다. 비록 새로운 경제정책이 일정한 효과를 거두었지만 1928년에 이르러 쏘련의 공업생산액은 독일의 절반에도 도달하지 못하였고 미국의 8분의 1이였으며 전국에 뜨락또르가 3만대밖에 없어 99%의 농사는 축력과 인력에 의하여 완성해야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방대한 아시아의 이웃인 중국의 형편도 쓰딸린으로 하여금 중공업을 우선 먼저 발전시키려는 의지를 더욱 굳게 하였다. 쓰딸린은 《중공업이 없으면 우리는 모든 현대화국방무기가 없게 될것이고 그때가 되면 우리의 지위는 곧 목전 중국이 처한 지위와 비슷하게 될것이다. 중국이 자기의 중공업이 없고 자기의 군사공업이 없으니 누구든 원한다면 유린하는것이다》고 하였다.
1929년 5월 쏘베트 제5차대표대회가 모스크바의 대극원에서 열렸는데 토론내용은 국민경제발전의 1차 5개년계획이였다. 세계사상 그 어느 국가도 이처럼 전면적이고 세심하게 자기발전의 과정을 구상해본적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쏘련사람들의 창조인것이다. 그 시대에 모든 생산,운수, 판매는 모두 국가에서 계획하고 배치하였는데 향후 쏘련의 수십년의 흥쇄는 모두 이런 고도집중의 지령적 계획경제와 련결되여 있었다.
쏘련사람들이 첫 5개년계획을 토론하던 이해에 인류사상 전례없던 경제위기가 폭발하였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증시가 폭락하면서부터 시작된 위기는 미국으로부터 전 세계로 빠른 속도로 만연되였으며 거의 모든 자본주의국가들을 휩쓸었다. 제1차세계대전에서 구미발달국가의 손실은 1700억딸라였으나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이번의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조성한 손실은 2500억딸라에 달하였으며 위기는 모든 자본주의세계를 뒤흔들었고 자유시장경제의 폐단도 폭로하였다.
쏘련은 첫 5개년건설계획의 지도하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두었는데 구미의 자본, 기술과 인재는 쏘련에서 출로를 찾기 시작하였다. 전 세계에서 제일 큰 이민국가인 미국도 처음으로 타국으로 이민하는 경향이 출현하였다. 선후로 10만명의 미국인들이 쏘련으로 이민을 신청하였다. 구미국가의 정체적인 쇠퇴와 선명한 대비를 이룬것은 쏘련의 공업화성과일뿐만아니라 국가를 건설하려는 쏘련인민들의 거대한 열정이였다.
1932년 첫5개년계획이 완성됨에 따라 쏘련은 농업국으로부터 공업국으로 변하였다.
1937년 2차5개년계획이 완수됨에 따라 쏘련의 공업생산총액은 유럽의 첫번째, 세계의 두번째를 차지하였다.
10월혁명의 시작으로부터 전 세계 륙지 총면적의 거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이 나라는 20년도 안되는 시간에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 믿기 어려운 속도로 구미국가가 일반적으로 몇십년 지어 백년이라는 시간을 들여서야만이 완성할수 있는 공업화의 길을 끝낸것이다.
쏘련의 《계획》방식은 서방세계에서 지대한 흥취를 불러일으켰는데 20세기 30년대에 서방인사들은 분분히 쏘련으로 와서 경험을 배웠다.
경제생활에 대한 국가의 거시적조절에서 가장 성공적인것은 미국대통령 루즈벨트의 집권이였다.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통하여 미국의 경제는 소생하기 시작하였던것이다.
당시 쏘련의 성공이 전 세계의 주목을 끈것은 사실이나 성공의 빛은 쾌속공업화 배후의 문제를 감추었다. 자아를 잊고 일하는 수천만명의 건설자들은 그렇게 많은 보상을 받지 못하였으며 특히 광범위한 농민들은 매일 엄중한 물질상의 결핍과 대면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다음기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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