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외인사가 부직으로부터 정직으로 된것은 새로운 형세에서 새로운 시작과 신호임을 표징한다.
치공당중앙 부주석인 만강이 과학기술부 부장으로 임직되였다. 《당외인사가 정직으로 부임》된데 대하여 사회 각계는 찬양과 지지를 보내고있다. 중앙당학교 당사부 류건휘주임은 이번의 임명은 뜻밖은 아니지만 새로운 형세에서의 새로운 시작과 신호임을 표징한다고 덧붙였다.
2005년 중공중앙은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다당합작과 정치협상 제도건설을 가일층 강화할데 관한 의견》에서 《현이상 지방정부는 민주당파 성원 또는 무소속인사를 선발하여 지도직무에 배치함에 있어서… 조건에 부합되면 정직을 담임할수 있다.》고 명확히 지적하였다. 만강의 임명은 이 문건의 구체적인 락착이다.
새 중국 창건초기 집권당으로서의 중국공산당은 인민민주독재성격의 중앙인민정부를 설립할 때 련합정부의 내포에 깊은 중시를 돌렸다. 건국준비 당시 모택동은 주은래에게 력사적으로 기여를 한 민주당파와 무소속인사들에게 《큰 직위》를 주라고 했다고 한다.
1949년 9월 30일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전체회의에서 선거산생된 6명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중 송경령, 리제심, 장란 등 3명의 민주당파와 무소속인사가 들어있으며 56명 중앙정부 위원중 27명이 들어갔다. 그해 10월 19일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3차회의에서 임명되 4명 정무원 부총리중 민주당파와 무소속인사가 2명 들어있었으며 15명 정무위원중 9명이 들어있으며 정무원산하 32개 부, 회, 원, 서, 행의 정직책임자중 13명이 들어있다. 성, 시정부 주석, 부주석에는 54명이나 들어갔다. 《문화대혁명》전야까지 국무원 각 부, 위에는 비공산당원 부장이 9명이나 되였다.
유감스러운것은 이한 제도의 설계는 1957년부터 왜곡되기 시작하였는데 《문화대혁명》에서 훼멸적인 파괴를 받았다.
당의 11기3차전원회의이후 중공이 령도하는 다당합작과 정치협상 제도는 가일층 발전되고 완벽화되여 성숙에로 나갔다.
1979년 등소평동지는 처음으로 공산당이 령도하는 다당합작을 정치제도범주에 넣었으며 1989년 중공중앙은 문건을 발부하여 처음으로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다당합작 및 정치협상 제도는 우리 나라의 기본정치제도라고 처음으로 명확히 지적하였다. 1993년 제8기전국인대 1차회의에서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다당합작 및 정치협상 제도를 정식으로 헌법에 넣어 국가의 의지로 상승시켰으며 중화전국공상련 주석이며 민건중앙 상무위원인 영의인을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으로 선거하였다. 1998년 전국인대, 정협 기바꿈에서 처음으로 8개 민주당파 중앙주석이 각기 전국인대 부위원장, 전국정협 부주석을 담임하였다.
2005년 중공중앙은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다당합작 및 정치협상 제도건설을 가일층 강화할데 관한 의견》에서 《민주당파와 무소속인사가 국가와 정부 지도직무를 담임하는것은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다당합작을 이룩함에 있어서의 중요한 내용의 하나》라고 명확히 규정하였다.
오늘 우리 나라 8개 민주당파는 《문화혁명》이후의 6.5만명으로부터 60여만명으로 불어났으며 2000년말 중앙국가기관부문과 최고법원, 최고인민검찰원 지도부에 비중공인사가 19명에 달했으며 31개 성, 자치구, 직할시와 15개 부성급 도시의 정부지도부에 모두 당외지도간부가 들어갔다. 전국적으로 현(처)급이상 정부 및 사법기관에서 지도직무를 담임한 당외간부는 9000여명에 달한다.
만강이 과학기술부 부장직을 담임한것은 중앙이 국가권력구조와 운행에 대한 상관적인 조정이다. 류건휘교수는 향후 제반 면의 조건이 구비된 형편에서 당면 비중공인사가 기본상에서 《부직》이고 주로 문교위생부문에 배치한 현상을 의식적으로 점차 해결할것이며 중점을 행정집법감독, 군중리익과 관계되고 지식인과 밀접히 련계되며 전문기술성이 강한 정부사업부문의 지도부에 둘것이며 민주당파 성원, 무소속인사들을 실권이 있는 지도직무에 배치할것이며 조건이 구비되였다면 정직에 배치할것이라고 인정하면서 일련의 제도적조치로 그들이 임직한후 개성이 있게 사업을 전개하며 직권을 충분히 리행하도록 담보할것이라고 덧붙였다(《료망》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