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계속) 중국 북경대학 력사학부 교수 서천신: 쓰딸린의 경제발전도 일부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하고있었는데 우선은 경제발전의 불균형이지요, 중공업, 군사공업이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지만 경공업, 농업은 매우 큰 손실을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농업손실이 엄중했지요. 다음 공업발전과 더불어 인민의 생활이 개선을 가져오지 못하였지요.
하지만 당시의 계획경제의 성공은 사람들로 하여금 오늘처럼 그 페단을 돌이켜보게 할수는 없었다. 더우기 당시의 쏘련은 갈수록 긴박되는 전쟁의 위협에 직면하고있었다.
1939년, 제2차세계대전이 폭발하였다.
1941년 6월 22일 새벽 3시 독일군대는 쏘련을 돌연습격하였다. 한주일내 쏘련군은 100만명이상의 병력을 손실보았으며 서부공업구는 전부 함락되였다. 히틀러는 이제 곧 모스크바광장에서 경축의식을 거행할것이라고 웃으면서 말하였지만 결국 그는 웃을수 없게 되였다. 독일군은 전부 억제되였을뿐만아니라 반격을 당하기 시작하였다. 히틀러는 서부공업기지를 잃은 쏘련이 어떻게 싸움을 하면 할수록 더욱 강대해지는지 리해가 되지 않았다.
중국사회과학원 세계력사연구소 연구원 문일: 전쟁조건때문에 거의 24시간 근무제를 실시하였는데 이때에 공업은 아주 빠르게 발전하였지요.
제일 어려운 1942년에도 비행기 생산량은 여전히 2만대이상에 달하였는데 독일군에 비하면 거의 배에 달했다. 쏘련의 거대한 공업능력은 나치스독일을 압도하여 이길수 있는 예리한 검으로 되였다. 전쟁이 제일 치렬한 시각에 쓰딸린그라드 뜨락또르공장의 로동자들은 금방 만들어낸 땅크를 운전하고 직접 공장에서 나와 독일군과 맞섰다.
1945년 5월1일 세계반파쑈전쟁이 끝내 최후의 승리를 맞이하였다. 쏘련홍군은 베를린을 공격하고 붉은기를 독일국회대청의 정상에 꽂았다. 쏘련은 2천만명의 희생대가로 정의와 평화를 지켰다. 이는 인류사상 제일 비장한 한페지이다. 이점만 보더라도 쏘련은 대국으로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다.
독일군의 전패국면이 결정된 1945년 2월 미국, 쏘련, 영국 3대 강국의 수뇌들인 루즈벨트, 쓰딸린, 처칠이 얄따에서 만나 전쟁후의 세계판도를 상담하고 확립하였다. 이것은 세계가 쏘련의 강대한 군사정치력량에 대한 승인이며 쏘련이 맡은 대국의 책임에 대한 존경이다.
1957년, 쏘련은 세계에서 제일 처음으로 인공지구위성을 우주로 올려보냈다.
1961년 4월 12일 쏘련우주비행사 가갈린이 《동방》호 우주비행선을 타고 처음으로 인류가 우주로 들어가는 꿈을 실현하였다.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것은 인류문명의 고도이며 세계 첫 사회주의국가인 쏘련의 고도이기도 하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 고도는 영원히 사책에 기재될것이다. 이 고도를 초월할수 있는가는 로씨야 력대 지도자들의 시야가 어느만큼 넓은가에 달렸다.
중국 중앙편역국 연구원 정이범: 당시 쏘련은 확실히 각종 문제가 존재하고있다는것을 발견하였죠. 례를 들면 당시 쓰딸린에 대한 개인숭배, 당시의 관료주의의 작풍, 그리고 광범위한 농민과 일반백성들의 빈곤한 생활, 국내에서 의식적으로 국외의 정황을 봉쇄하는것 등등이지요.
1991년 크레믈린궁전의 붉은기는 조용히 내려졌고 홍색년륜이 대국흥기의 무대에서 74바퀴를 새겼다. 쏘련의 신속한 궐기는 20세기에 제일 주목되는 대사이다. 전례없는 위대한 실천으로 그 경험과 교훈은 모두 인류발전의 귀중한 재부로 되였다. 력사에 대한 판단은 대척도로 가늠해야 하며 사회변혁의 완성은 아마 몇십년 몇백년 심지어 이보다 더 긴 시간이 수요될것이다.
위대한 민족으로 말하면 좌절은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오늘날 로씨야는 민족부흥의 길에 나섰다(신국신 드림).
♣♣ ♣♣ ♣♣ ♣♣ ♣♣ ♣♣ ♣♣ ♣♣ 아메리카대륙북부에는 아메리카합중국이란 나라가 있는데 우리는 흔히 미국이라고 부른다. 이 나라의 출현은 비록 230년의 력사밖에 안되지만 보기 드문 대국흥기의 기적을 연역하였다. 미국은 유럽문명을 토대로 독창적으로 자기 발전의 길을 걸었으며 세계 제1경제강국의 위치를 한세기동안 지켜왔다.
1620년 100여명의 종교박해를 피해서 달아난 영국청교도들은 자유의 종교성지를 건립할 목적으로 (5월화호)배를 타고 아메리카대륙으로 향하였다. 망망한 바다에서 그들은 무서운 파도와 질병의 고통을 이겨내면서도 미지의 신대륙에 대한 술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킬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자기의 리상을 실현할것이며 또 어떤 방식으로 낯설은 이 땅에서 생존해나갈것인가?
《5월화호》가 북아메리카대륙에 도착하기전 41명의 성년남자들은 갑판에서 《5월화호공약》이라는 계약을 체결하였는데 공약은 자원적으로 민중자치단체를 결성하며 아울러 단체리익에 유익한 공정한 법률, 법규, 조례와 헌장을 제정, 실시한다고 규정하였다. 사학가들은 이 공약을 미국사상 첫 정치성계약문건이라고 승인한다.
호기심과 꿈을 가지고 온 청교도외에도 기타 유럽국가의 부동한 계층, 부동한 신앙을 가진 모험자들과 아프리카에서 팔려온 흑인노예들도 륙속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대영제국은 18세기중엽에 이르러 에스빠냐를 물리쳤으며 프랑스와 7년동안 전쟁을 치르며 확장시기에 들어섰다. 계속하여 이어지는 전쟁은 대영제국의 재정이 수입보다 지출이 더 많게 하였으며 별수없이 북미식민지에 세금을 증가하여 재정위기를 풀려하였다. 대영제국이 자체로 세금을 증가한후 식민지에서는 항세사건이 종종 발생하였으며 더불어 사회모순도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대량의 영국군대들이 신대륙으로 와서 주둔하였으며 심지어 민가에 뛰여들고 무역이 차단되였으며 식민지의회가 제한을 받았다. 북미영국식민지의 사회운행전통이 도전을 받았으며 사람들은 선택앞에서 리상을 지키고 압박과 반항하는 투쟁성격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775년 4월 19일 보스톤부근의 영국군대가 콘고드에 있는 비밀군수품창고를 점령하려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렉싱톤과 콘고드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로동자, 수공업자와 농민출신의 봉기자들이 영국식민군 240여명을 섬멸하였다. 이 충돌이 나중에 전쟁으로 되였는데 력사에서는 이 전쟁을 《미국독립전쟁》이라고 부른다.
1776년 7월 4일 13개주의 식민지인민들은 《독립선언》을 채택하였다. 선언은 대영제국의 통치에서 리탈하며 영국왕의 모든 예속관계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아메리카합중국》을 건립한다고 선포하였다. 또 선언은 《사람은 나면서부터 평등하며 불가침의 천부의 권리를 갖고있으며 낡은 정부를 뒤엎고 새 정부를 건립할 권리를 가진다》고 선포하였다. 선언은 일정한 정도에서 북미주식민지인민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념원을 반영하였고 인민을 독립전쟁에로 동원시키는데 진보적역할을 하였다. 200여년전의 시대에 식민지가 련합하여 종주국에 도전한다는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였다. 독립을 선포한 13개 식민지들은 유럽의 프랑스 등 나라들의 지지하에 대영제국과 8년동안 전쟁을 치러서야 최종 독립을 하였다. 독립하기전의 백여년동안에 식민지경제는 줄곧 대영제국에 의거하였으며 모든 업종은 영국자유무역의 상업체계하에서 발전하였었다. 영국의 방조를 벗어난 미국은 구경 어떻게 생존해나갈것인가?
준엄한 도전은 경제령역에서만 온것이 아니였다. 독립후의 아메리카합중국은 정권방면에서도 국회만 설립하고 대통령, 최고법원도 없었고 지어 국회 본신도 실제적인 집행권력이 없었는바 전쟁으로 바꾼 독립은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실현하지 못하였다. 1787년 5월 25일부터 9월17일까지 헌법제정회의가 필라델피아에서 비밀리에 진행되였다. 헌법은 련방제와 소위《3권분립》의 원칙에 근거하여 작성되였는데 국회는 참의원과 중의원으로 구성되며 최고립법기관이고 대통령은 일체 행정권과 군권을 장악하며 최고법원은 최고사법기관이라고 규정하였다. 1788년부터 헌법은 효력을 발생하였는데 이듬해 3월에는 헌법에 근거하여 제1차국회가 소집되였고 워싱톤이 제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였다. 련방헌법의 제정과 실시로 하여 진정한 의의상의 미국이 탄생하였다. 이때로부터 미국은 통일된 정부, 시장, 세수, 화페가 있게 되였으며 경제운행에서는 직접 영국의 자유주의경제모식을 채용하였다. 또 유럽에 비해 현저하게 락후한 경제를 개변하기 위하여 련방정부는 금융, 재정제도를 영국에서 들여왔다. 1791년 2월 미국의 첫 은행이 설립되였고 유럽의 증권시장, 교역소와 비슷한 회사들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후 60여년시간에 미국은 독립시기의 300만명 인구로부터 3000만명으로 증가되였는데 이로서 황무지를 개간하는 로동력이 제공되였고 과학기술의 인입을 촉진시켰다.
1860년 전후 미국의 경제발전수준은 이미 대다수 유럽국가를 초과하였지만 련방정부의 권력은 여전히 박약하였다. 당시 북방은 자유자본주의제도를 실행하며 공상업을 주로 발전시켰지만 남방은 농장주가 통제하는 흑인노예제도를 보류하며 재배업을 주로 하였다. 남방의 제도는 미국의 《사람마다 평등하다》는 리념과 맞지 않았을뿐만아니라 로동력의 자유류동과 국가공업화진척을 저애하였다. 1860년 11월에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북방자산계급민주파의 대표인물이며 공화당인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거되였다.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거되자 남방의 노예소유자들은 반란을 일으켜 저들의 대통령을 선거해가지고 리치몬드에 반란정부를 세우고 련방에서 리탈한다고 선포하였다. 1862년 5월 22일 국내전쟁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링컨정부는 자산계급민주조치인 《홈스테드법령》을 공포하였는데 선언에는 무릇 미국공민은 10딸라의 수속비만 내면 서부에서 1홈스테드 즉 64헥타르에 해당하는 토지를 분여받을수 있고 련속 5년이상 경작하면 그 땅이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된다고 규정하였다. 링컨정부는 서부토지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농민들의 적극성을 추동하였으며 국내전쟁이 승리할수 있는 물질적기초를 닦아놓았다. 이때로부터 련방정부는 강대해지기 시작하였으며 농업, 공업 등 모든 방면에서 중요한 전변을 가져왔다. 많은 미국의 사학가들은 남북전쟁이 미국력사의 분수령이라고 여기고있다. 1865년 4월 14일 워싱톤의 한 극장에서 내전의 승리를 경축하는 대회를 열었는데 실패를 달가와하지 않는 노예소유자들은 간첩을 시켜 총으로 링컨을 살해하게 하였다. 링컨은 비록 죽었지만 노예해방투쟁을 지도하여 노예제도를 페지한것으로 하여 그는 미국과 세계인민들의 존경을 받고있다.
19세기 70년대말 전력이 점차 증기동력을 대체하여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되면서 미국경제발전에 강유력한 동력을 가져왔다. 에디슨은 일생에서 천여가지 발명을 하였는데 백열등이 그중의 하나이다. 이러루한 발명들은 인민의 생활을 개변시켰을뿐만아니라 재부를 창조하는 원천으로 되였다. 19세기후반기부터는 각양각색의 발명이 우후죽순마냥 솟아나왔는데 1865년부터 1900년 이 기간에만도 정식으로 비준, 등록된 발명특혜는 무려 64만여종에 달한다. 미국은 강대한 과학기술실력에 의거하여 제2차산업혁명에서 앞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렇다면 구경 무슨 원인이 미국으로 하여금 유럽기술을 배우던 학생신분으로부터 자주창신할수 있는 능력을 갖춘 국가로 성장하게 하였는가?
1787년의 제헌회의에서 대표들은 미국정부의 미래 공중정책에 대해 격렬한 변론을 하였다. 그러나 제1조 8항 《과학과 실용기술의 보급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작가들의 저작, 발명가들의 발명에 대해서 일정한 기한내 전매권의 보장을 기여한다》에서는 대표들의 의견이 일치를 보였다. 전매권의 보호는 16세기에 영국에서 이미 시작했지만 미국인들은 제일 처음으로 이것을 헌법에 써넣었으며 국가의 근본대법으로 발명창조를 보호하였다. 련방정부는 전매제도로 발명인의 권익을 보호하였고 동시에 전 사회의 창조열정도 불러일으켰다.
중앙정부의 력량이 날따라 강대해짐에 따라 미국경제는 비교적 성숙된 제도체계의 보호아래 도약식발전을 가져왔다. 전기화를 상징으로 하는 제2차산업혁명에서 이 신흥공업국가는 중대한 과학기술발명을 기초로 19세기말엽에 이르러 신속하게 줄곧 앞자리에 있던 유럽강국들을 초과하였다. 미국은 전쟁병탄과 구매방식으로 령토가 건국시보다 10배 확장되였으며 45개 주와 7000여만 인구를 가진 명실상부한 대국으로 되였다.
력사는 또다시 세기교체의 정점에 이르렀다. 20세기에 진입한 미국은 어떻게 자기의 전진방향을 선택할것이며 세계무대에서 어떤 각색을 맡을것인가?
위기국세에서 신정
미국은 1894년에 이르러 세계 제1경제강국으로 된 후로부터 줄곧 빠른속도의 발전을 유지하였다. 루즈벨트가 대통령으로 된후 정부가 직접 경제를 감독하는 조치를 취하였는데 우선 먼저 독점적인 대회사, 대재단에 손을 댔는데 이는 줄곧 일관적으로 자유경쟁을 제창하던 미국에서는 미증유의 일이였다. 몇년사이에 몇십개의 트러스트가 선후로 기소당했는데 그중 일부 기업들은 핍박에 못이겨 해체되였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렇게 했으며 또 이것은 미국의 발전에 무엇을 가져다줄것인가?
1870년 정유업의 전도를 보아낸 록펠러는 표준석유회사를 창건하였다. 록펠러의 석유트러스트는 련속 백여개의 석유기업을 병탄했으며 1890년에 이르러서는 이미 미국의 90%에 달하는 석유제련을 장악하였다. 미국은 건국후의 백여년간에 줄곧 영국으로부터 이어받은 사유경제와 자유경쟁을 신봉해 왔다. 우수기업들은 련합, 합병 등 수단으로 생산. 시장, 가격을 통제하여 안정하고도 높은 리윤을 추구하였다. 중요한 공업부문에서 트러스트가 거의다 출현하였는데 례하면 강철대왕 모르간, 석유대왕 록펠러 등 소수의 금융자본가들이 전국의 경제명맥을 틀어쥐였으며 국가재부의 60%가 미국인구의 2%도 안되는 부유한 사람들이 장악하고있었다. 독점경제자원의 트러스트는 미국에 번영을 가져다주었지만 사회에는 날따라 확장되는 사회모순, 엄중한 량극화와 각종 죄악들이 출현하였다. 당시 미국은 공업화국가중에서 공상치상률이 제일 높은 나라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직면한 현실이였다.
자유시장경제는 굴레를 벗어난 말처럼 한세기를 달린후 재난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독점형성은 자유경쟁의 결과였다. 그들은 대량의 경제자원을 모으는 동시에 첨예한 사회모순도 초래하였으며 로동자리익과 사회공평에 손해를 주었으며 중소기업의 자유발전을 저애하였다. 아주 많은 중소기업들이 독점기업의 그늘아래서 생존할수 없었으므로 분분히 파산되였으며 도시빈곤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기업독점, 재정부패, 가짜식품 등을 비판하는 글들이 속출하였으며 사회의 추악한 현상을 없애고 합리한 시장질서를 건립하려는 노력이 20세기초부터 점차 뜨거운 사회운동으로 형성되였다. 이 운동은 20세기 20년대까지 지속되였는데 사학가들은 이 운동을 미국의 《진보운동》이라고 부른다. 상임한지 얼마 안되는 루즈벨트는 강대한 사회압력앞에서 《진보운동》을 받아들였으며 독점자본에 대해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1911년, 미국최고법원에서는 표준석유회사의 독점행위가 자유경쟁을 방애한 위법행위가 있으므로 해산할것을 선포하였으며 한시기 휘황하던 석유제국이 몇개의 작은 회사로 나뉘여졌다. 루즈벨트가 상임한후 미국정부는 선후하여 40여개 회사를 소송하였는데 소고기트러스트, 석유트러스트, 잎담배트러스트 등이 사법부의 핍박아래 해산되였다. 이때로부터 정부가 헌법을 통해 독점을 제한하는 원칙이 확립되였으며 반트러스트행동이 정식으로 미국정부제도화의 장구한 정책속에 있게 되였다. 그는 또 독점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로자모순을 해결하는데 착수하였는데 일부 주정부에서는 륙속 로동자권익을 보호하는 법률조문을 제정하였으며 공상배상표준과 로동자의 로동시간을 명확히 하였다.
미국정부가 경제생활의 관리에서 효과를 보고있을 때 국제무대에서는 또다시 미국에 경제발전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1914년 인류사상의 제1차세계대전이 폭발하면서 유럽에서 오는 군수물자와 강철방면의 주문은 미국의 공업생산을 더욱 활기띠게 하였다. 미국은 전쟁전의 채무국으로부터 유럽의 채권국으로 되였으며 세계재부의 40%를 차지하였고 영국, 프랑스 등 나라들과 함께 전승국으로 되였다.
20세기초 미국의 진보운동과 동시에 펼친것은 과학기술발명과 체제창신이였다. 1903년 인류사상의 제일 첫번째 동력비행기가 라이트형제의 손에서 탄생하였으며 1913년 미국정부가 주도한 빠나마운하가 정식으로 개통되였는데 이때로부터 대서양과 태평양이 이어졌다. 이 시기 미국인들은 공업분야에서 《포드식생산방식》이라는 혁명적인 창조를 하였다. 포드는 젊은 시절에 원근에 이름난 총명한 기술자였다. 로동자들이 고정된 라인에서 자동차를 조립하는것을 본 그는 별안간 령감이 떠올랐다. 1913년 8월 처음으로 로동자들이 부속품을 생산라인에 실린 자동차차체에 장치할 때 표준화, 어셈블리라인, 과학관리를 한몸에 융합한 현대화 대규모생산이 이때로부터 시작되였다. 제1차산업혁명시기에 현대의의를 띤 공장이 탄생됐듯이 그의 이 창조는 인류생산방식의 변혁진척중 또 한가지 리정비이다.
포드의 생산방식은 아주 빠른 속도로 기타 제조령역에서 광범위하게 응용되였으며 로동생산능력의 미증유의 제고는 미국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을 초래하였고 미국인들의 생활방식을 크게 개변시켰다. 산업화의 영화세계는 스타를 만드는 동시에 미국의 몽상을 창조하였고 천가만호에 들어선 무선전라지오는 소식전파방식을 개변함과 더불어 기업의 광고선전도 촉진하였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20년대의 미국이였으며 사람들은 살기 좋은 세월이 왔다고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29년, 뉴욕증시가 붕괴하면서 800여개 은행이 파산하였고 900만개의 저금통장이 소실되였다. 2년도 안되는 시간에 경제위기로 14만개 기업이 파산하고 전국에 4분의1의 사람들이 실업하였다. 위기는 미국뿐만아니라 모든 자본주의나라들을 휩쌌으며 전반 자본주의세계를 진동시켰다. 1929년 미국의 GDP는 1040억딸라였는데 1932년에 이르러 580억딸라밖에 남지 않았으며 실업자는 1700만명, 근 200만명이 전국각지에서 류랑생활을 하였다. 그렇다면 이 미증유의 위기를 어떻게 풀어 나갈것인가?
서방세계가 경제위기에서 헤맬 때 신생국가인 쏘련은 일종의 새 경제사회관리모식인 계획경제로 1차5개년 건설계획을 실현하였으며 농업국으로부터 일약 공업국으로 되였다. 쏘련의 5년건설계획의 성공은 서방정치가들과 경제학가들로 하여금 고도의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1933년, 대통령으로 된 플랭클린 루즈벨트는 국가자본주의를 강화하고 경제공황의 엄중한 후과를 극복하고 자본주의제도를 만회하기 위하여 《신정》을 실시할것을 제기했다. 그는 정부가 응당 행동을 취할 시기라고 의식하고 일련의 정부공사를 실시하였으며 이것으로 미국인들의 진정한 수요를 만족시켰다. 《신정》기간 루즈벨트는 또 양로보험과 실업보험 등 방면의 보장체계를 설립하였으며 인민들의 경제자유를 지지하였다. 1936년 경제는 회복하기 시작하였으며 희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는 또다시 미국인들의 마음속에서 부풀기 시작하였다.
1937년 일본은 령토를 확장하고 자원을 강탈하기 위하여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발동하였으며 1939년 독일은 뽈스까를 침략하였다. 20년 세월이 흐른 이때 인류사상의 제2차세계대전이 폭발하였다. 미국은 독일-이딸리아집단의 침략과 전쟁정책을 반대하였으며 1941년 8월에는 영국과 함께 자본주의세계의 정치강령을 대표한 《대서양헌장》을 제기하였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난후 미국은 반파쑈동맹에 참가하였다. 경제, 군사 제1강국인 미국의 가입은 반파쑈전쟁의 승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것만은 의심할바 없는것이다. 1945년 미국의 전통을 깨뜨리고 련속 4차나 대통령으로 당선되였던 루즈벨트가 세상을 떴으며 5개월후 제2차세계대전도 결속되였다.
두차례의 세계대전은 신흥대국인 독일과 일본에 심한 타격을 주었으며 따라서 전통대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세계지배권을 잃어버리게 하였다. 전쟁후의 미국은 공업생산총액이 세계총량의 절반이상을 차지하였으며 전 세계 범위내에서 딸라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금융체계를 설립하였고 세계 50여개 나라와 지역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은 미국력사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되였다. 유일무이한 종합실력은 미국으로 하여금 제1차세계대전후 세계질서를 휘여잡으려 시도하다 놓친 난처한 국면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며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국제질서를 주도하게 하였고 나중에 끝내는 초대국으로 되였다.
(다음기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