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武亭)은 홍군대오에서 용맹하고 싸움에 능한 조선적 지휘관이였다. 그의 능숙한 포격술은 홍3군단 군단장 팽덕회의 찬양을 받았을뿐만아니라 광범한 지휘관들로부터 《홍군포병의 시조》로 불리기까지 했다. 장정로상에서 그는 포병영을 거느리고 탄우속을 헤쳐나가며 수많은 전공을 쌓았다.
무정은 원명이 김무정(金武亭)이며 1905년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태여났다. 1919년, 그는 조선의 《3.1》반일애국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이때로부터 그의 혁명생애가 시작되였다. 1923년초, 그는 조선독립의 길을 찾고저 비밀리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왔다. 이때로부터 그는 중국에서 22년간의 전기적색채가 다분한 삶을 살았다.
무정은 중국공농홍군에서 련장, 영장과 퇀장 등 직무를 력임하였으며 중앙쏘베트구역의 5차반《포위토벌》에 참가하였다. 장정이 시작된후 무정은 군위 제1종대 제3제대(梯隊) 대장 겸 정위를 담임하였으며 1934년 12월 려평회의후에는 홍3군단 포병영 영장으로 임명되였다.
간고한 정정길에서 무정은 포병영을 거느리고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전진하였다. 적들의 4겹의 봉쇄선을 돌파할 때 무정은 포병영을 이끌고 평석(坪石)에서 단독작전하여 적 1개 보안퇀을 격파하고 적 100여명을 소멸하였다. 가장 정채로운것은 무정이 광서 룡승지구에서 지휘한 한차례 저격전이였다. 당시 홍군은 상강(湘江)을 돌파한지 얼마 안되였으며 사상자수가 절반을 넘어 적의 력량이 박약한 귀주로 진발할수밖에 없었다. 로상에서 중앙종대는 광서군벌 리종인부대와 맞부딪쳤다. 홍3군단은 결사적으로 적들의 방선을 뚫고나가는한편 팽설풍(彭雪楓)에게 명하여 제4사를 이끌고 적들을 저지하여 주력부대를 엄호하게 하였다. 제4사는 하루낮 하루밤을 적들과 싸우다보니 사상자가 아주 많았다. 총부에서는 무정에게 포병영을 거느리고 전투에 참가할것을 명령하였다. 팽설풍은 무정에게 말하였다. 《한사람이 남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내야 하오. 당신들의 배후에는 중앙종대가 있으므로 한걸음도 후퇴해서는 안되오.》 무정은 포병영을 지휘하여 영용하고 완강하게 싸워 중앙종대를 엄호하는 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성하였다. 그후 홍3군단 포병영은 보병과 배합하여 완강하게 싸워 적들의 포위와 추격 음모를 분쇄하였다. 루산관(婁山關)전투에서 포병영은 위력을 발휘하여 전투의 승리를 위하여 관건적작용을 하였다.
1935년 6월, 홍1방면군이 사천 무공(懋功)지역에서 홍4방면군과 합류한후 장국도는 당중앙이 잠시적인 어려움에 직면한 기회를 빌어 당과 홍군의 최고지도권을 찬탈하려 하였다. 8월중순, 홍3군단 군단장 팽덕회는 군위 참모부가 각 군단지간 및 각 군단과 중앙혁명군사위원회 모택동과의 통보암호를 전부 회수하는바람에 각 군단과 군위와의 직접적련락이 중단되고 전적(前敵)총지휘부(즉 장국도가 령도하는 홍4방면군)와만 련락이 가능한것을 발견하였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팽덕회는 홍3군단이 따로 암호책을 만들것을 지시하였으며 방법을 대여 림표가 령도하는 홍1군단과의 련락을 회복하여 함께 중앙의 안전을 보위하려고 하였다. 팽덕회는 이 중임을 무정에게 맡겼다. 무정은 무선통신기와 암호책을 휴대하고 감숙 로씨야변계(俄界)로 홍1군단을 찾으러 떠나 갖은 간난신고끝에 마침내 임무를 완수하였다.
무정이 암호책을 홍1군단에 전해준 그날, 장국도는 진창호에게 《남하하여 당내투쟁을 철저히 전개하자》는 비밀전보를 보냈으며 중앙과 중앙홍군에 해를 끼치려 하였다. 모택동은 홍3군단과 군위종대를 거느리고 로씨야변계에 가 홍1군단과 합류하기로 과단한 결정을 내렸다. 이리하여 장국도의 음모는 실패로 돌아가게 되였다. 무정에 의하여 회복된 홍1군단과 홍3군단의 무선통신련락은 홍군의 생사존망을 결정하는 행동에서 중요한 작용을 발휘하였다.
장정이 끝난후, 무정은 홍군대학교에 들어가 학습하였으며 그후 홍군총부 작전과장을 맡았다. 1937년 무정은 팔로군포병을 재건할 중임을 맡았으며 1938년 1월 팔로군 제1포병퇀-총부포병퇀 퇀장을 맡았다. 항일전쟁승리후 무정은 조선에 돌아가 조선림시인민위원회 중앙위원, 로동당 제2서기, 조선인민군제2군 단장, 수도방위사령관 등 직무를 맡았다. 1951년 7월, 무정은 병으로 평양에서 서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