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1936년, 중국공농홍군주력이 장강남북의 각 쏘베트구역에서 섬감(陝甘)혁명근거지(섬감쏘베트구역이라고 부름)으로 전략적이동을 한것을 말한다.
1934년 10월, 왕명《좌》경모험주의의 착오적령도 및 적들의 군사적우위로 중앙혁명근거지(중앙쏘베트구역이라고도 함)는 제5차 반《포위토벌》전쟁에서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홍군제1방면군(중앙홍군)주력은 장정을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부분적 홍군부대를 남겨 유격전쟁을 계속하게 하였다. 8월, 중공중앙과 중앙군위는 중앙홍군의 전략적전이를 위하여 길을 탐색하기 위하여 홍6군단으로 하여금 상감(湘贛)쏘베트구역에서 철수하여 상중(湘中)에 가 유격전쟁을 발전시킬것을 명령하였다. 10월, 홍6군단과 홍3군(그후 홍2군단번호를 회복함)이 합류하여 상악천(湘鄂川)쏘베트구역을 창건하였다.
10월상순, 중앙홍군주력 각 군단은 각기 집결하여 륙속 출발하였으며 중공중앙과 홍군총부 및 직속종대는 강서 서금을 떠나 출발하였다. 10월 21일, 중앙홍군은 감현(贛縣) 왕모도(王母渡)와 신풍현(信豊縣) 신전(新田) 구간에서 국민당군의 첫번째 봉쇄선을 돌파하였으며 월감변(粤贛邊), 상월변(湘粤邊), 상계변(湘桂邊)을 따라 서행하여 11월 15일 국민당군의 두번째, 세번째 봉쇄선을 돌파하였다. 그러나 박고(博古), 리덕(李德) 등 지도자들이 퇴각만 고집하면서 소극적으로 전투를 피하였기때문에 홍군은 계속 불리한 지위에 처해있었다. 중앙군위는 흥안(興安), 전주(全州) 구간에서 상강(湘江)을 강행도하하기로 결정하고 피비린 전투를 거쳐 12월 1일 끝내 상강(즉 네번째 봉쇄선)을 건넜다. 그러나 련일 고전을 계속하였기때문에 홍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12월중순, 상검변(湘黔邊)에 이르렀을 때 모택동은 상서(湘西)에 가 제2, 제6 군단과 합류하려던 계획을 변경할것을 극력 주장하였다. 28일, 중공중앙정치국은 려평(黎平)에서 회의를 열고 모택동의 주장을 접수하였으며 준의(遵義)를 중심으로 한 천검변(川黔邊)지구로 전진하기로 결정함으로써 홍군으로 하여금 복멸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1935년 1월 7일, 홍군은 준의를 점령하였다. 1월 15~17일, 중공중앙은 준의에서 정치국확대회의를 열고 제5차반《포위토벌》실패의 경험교훈을 총화하였고 왕명《좌》경모험주의의 군사적착오를 시정하였으며 모택동을 대표로 하는 중공중앙의 정확한 령도를 확립하고 금후 홍군의 전략적방침을 제정함으로써 가장 위험한 관두에 홍군과 중국공산당을 만회하였다. 이번 회의는 중국공산당과 공농홍군 력사상의 한차례 위대한 전환점이였다. 3월, 사실상 모택동을 위수로 하고 주은래, 왕가상이 참가한 3인군사지휘소조가 성립되였다. 그들은 중공중앙, 중앙군위의 명의로 홍군의 행동을 지휘하였다.
준의회의후, 사천의 적들의 방어가 엄밀한것을 감안하여 천검전변(川黔滇邊)과 귀주성을 우회하여 전진하기로 결정하였다. 특히 적수(赤水)를 4번 건느는 과정에서 중앙홍군은 령활하게 전투기회를 창조하여 운동전으로 적을 각개 격파하고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이겨 주동을 쟁취하였다. 그후 주력부대는 적들이 미처 반응할 사이도 없이 오강(烏江)을 건너 귀양에 이르렀으며 신속히 서쪽으로 전진하였다. 5월, 금사강(金沙江)을 강행도하하여 수십만 국민당군의 포위와 추격에서 벗어남으로써 전략적전이에서 결정적의의를 띤 승리를 취득하였다. 정확한 민족정책을 집행하였기때문에 홍군은 순조롭게 대량산(大凉山) 이족(彛族)구역을 통과하였으며 뒤이어 대도하(大渡河)를 강행도하하고 로정교(瀘定橋)를 탈취하였으며 일년내내 눈이 쌓여있는 협금산(夾金山)을 넘었다. 6월중순, 홍4방면군과 무공(懋功)에서 합류하였다.
홍4방면군은 원래 천섬(川陝)근거지에 머물러있었으나 천감변(川甘邊)으로 발전하기 위하여 1935년 3월 28일부터 4월 28일까지 가릉강(嘉陵江)을 강행도하하는 전역을 벌려 중대한 승리를 취득하였다. 그러나 홍4방면군 주요지도자 장국도 등은 제멋대로 천섬근거지(천섬쏘베트구역이라고도 부름)를 포기하고 서쪽으로 전이하였다. 5월초, 8만여명이 장정을 시작하여 그달 중순에 무현(茂縣, 지금의 茂汶), 리번(理番, 지금의 理縣)을 중심으로 하는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였다.
홍1, 홍4 방면군이 합류한후 홍군은 북상하여 섬감근거지를 건립하는것을 전략적방침으로 제정하였으며 중공중앙은 2개 방면군을 혼합하여 좌, 우 2로군을 편성하고 초지를 지나 북상하기로 결정하였다. 중공중앙은 우로군을 따라 초지를 지나 반우(班佑), 파서(巴西) 지역에 도달하였다. 8월말, 우로군 1부는 포좌(包座)에서 국민당 제49사의 5000여명 적군을 깡그리 섬멸하고 감남(甘南)으로 전진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9월, 장국도는 좌로군을 이끌고 아패(阿壩)지역에 이른후 중공중앙의 북상방침을 집행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중공중앙과 우로군을 협박하여 남하하려 하였다. 모택동 등은 9월 10일 제1군, 제2군(그후 섬감지대로 구성됨)을 거느리고 계속 북상하여 랍자구(腊子口)를 탈취하고 국민당군 위하(渭河)봉쇄선을 돌파하였으며 륙반산(六盤山)을 넘어 10월 19일 섬북 오기진(吳起鎭)에 도달함으로써 제일 먼저 장정을 결속하였다. 11월 21~24일, 직라진(直羅鎭)전역의 승리를 취득하여 당중앙과 홍군이 섬북에 뿌리를 내리는데 기초를 닦아놓았다.
국민당대군이 악예환(鄂豫皖)근거지를 포위공격하는 상황에서 홍25군과 악예환성위는 중공중앙의 지싱 따라 1934년 11월 하남 라산(羅山)현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악예섬변(鄂豫陝邊)에다 근거지를 건립하여 국민당군의 두차례 《포위토벌》을 분쇄하였다. 이듬해 7월 롱동(隴東)을 지나 9월에 섬감근거지의 제26군, 제27군과 합류하여 제15군단으로 편성되였다. 제1군단, 제3군단은 도달한후 홍1방면군으로 편성되였다.
상악천검(湘鄂川黔)근거지의 홍군 2, 6 군단은 1935년 11월 호남 상식(桑植)에서 출발하여 호남, 귀주, 운남 3성을 전전하면서 국민당군의 공격을 짓부시면서 금사강을 건느고 서강, 사천을 지나 1936년 6월말에 감자(甘孜)에 이르러 남하하여 좌절을 당한 홍4방면군과 합류하였다. 그후 2, 6 군단은 2방면군으로 편성되였다. 7월, 2, 4 방면군은 공동히 북상하여 홍1방면군의 호응밑에 10월에 선후로 감숙성 회녕(會寧)현성과 정녕(靜寧)현 장대보(將臺堡)에서 홍1방면군과 합류하였다. 이로써 홍군의 장정은 결속되였다.
중국공농홍군장정의 승리는 인류력사상의 기적이다. 기나긴 2년사이 홍군은 14개 성을 전전하고 갖은 간난신고를 이겨내면서 혁명의 핵심력량을 보존하고 단련시켰으며 중국혁명의 대본영을 서북으로 전이시켜 항일전쟁을 전개하고 중국혁명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조건을 창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