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림(楊林)은 중국공농홍군의 고급지휘관이다. 원명은 김훈(金勛)이며 양녕(楊寧), 필사제(畢士悌) 등 이름을 쓰기도 했다. 그는 1898년에 조선 평안북도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서울 30만시민 반일대기의에 참가하였다가 일본군경의 수색과 체포를 피해 중국 길림성에 망명하였다. 1921년 운남강무(講武)학교에 입학, 1924년에 졸업한후 황포군관학교에 가 학생대장, 기술조교 등 직을 맡았으며 상단(商團)반란에 대한 평정과 제1차동정(東征)에 참가하였다. 1925년 여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1월 국민혁명군 제4군 엽정(葉挺)독립퇀 제3영 영장을 맡았다. 1926년 황포군관학교에 돌아와 기술주임교관직을 맡았다. 1927년 당의 파견을 받아 쏘련에 가 중산대학과 모스크바보병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30년 여름 동북에 돌아와 중공동만특위 위원 겸 군위서기 직무를 맡았으며 1931년 만주성위 군위서기에 임명되였다. 이 기간에 성위를 협조하여 무장투쟁을 대대적으로 발전시킬데 관한 지시를 연구, 제정하였으며 만주공농의용군 제4군 1종대(반석공농의용군이라고도 부름)의 창건에 참여하였다. 1932년 7월 중앙쏘베트구역에 가 선후로 중화쏘베트공화국 로동및전쟁위원회 참모장, 중국공농홍군학교 총교관, 홍23군 군장, 월감(粵贛)군구 사령원 등 직무를 맡았다. 1934년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에 당선되였다.
1934년 7월 15일에 투쟁형세가 급격히 변화된 정형밑에서 모택동, 주덕, 주은래 등 동지들은 중화쏘베트정부와 중국로농홍군혁명군사위원회를 대표하여 《중국로농홍군 북상항일선언》을 발표하였다. 양림은 이 선언을 견결히 옹호하면서 7월 22일에 《홍색중화사》를 통하여 《홍군의 북상항일선언을 옹호하는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항일에 대한 자기의 태도를 표시하였다.
1934년 10월에 장개석은 100만 대군과 200대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중앙쏘베트구역에 대한 제5차《포위토벌》을 발동하였다. 중앙홍군의 주력은 부득불 중앙혁명근거지로부터 물러나와 세상에 이름난 2만5천리장정을 시작하였다. 출발하기전에 강서성중앙쏘베트구역에 있는 4개소의 홍군학교와 간부대는 군사위원회의 명령에 의하여 홍색간부퇀으로 편성되였는데 진경이 퇀장으로, 송임궁의 정위로, 종위검이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그 이듬해 1월에 준의회의가 있은 다음 양림은 홍색간부퇀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홍색간부퇀은 당중앙과 중앙군사위원회기관을 호위하며 중앙령도동지들의 안전을 보위하는 책임을 진 동시에 간부를 보존하고 양성하여 주력홍군에 간부를 수송하는 중요한 사명을 짊어졌으며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준의회의가 있은 다음 《적수하를 네번 건너는》 전역에서 홍색간부퇀은 홍근 제3군단과 배합하여 옛성인 아산의 제고점을 탈취하는 전투에서 적군 20개 퇀을 섬멸하고 적 3,000명을 포로함으로써 홍군이 장정을 시작한 이래의 첫 대승전을 하였다.
1935년 4월 29일 오후에 홍색간부퇀은 중앙기관을 호위하면서 금사강에서 140킬로메터 떨어진 이족구역에 이르렀다.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홍색간부퇀에 재빨리 금사강의 교평나루터를 탈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주은래, 류백승, 엽검영 등 군위지도동지들이 이 중요한 작전임무를 홍색간부퇀에 직접 포치하였다. 중공중앙총서기 장문천이 간부퇀에 직접 와서 전투를 앞두고 동원을 하였다. 이 임무를 접수한 홍색간부퇀은 대오를 두갈래로 나누었다. 한 대오는 정위 송임궁이 제3영을 거느리고 군위총참모장인 류백승의 직접적인 지휘밑에서 밤도와 계속 교평나루터로 전진하였고 다른 한 대오는 퇀장 진갱과 참모장 양림이 령솔하는 선봉대로서 하루에 90킬로메터 속도로 전진하여 2경에 금사강기슭에 이르렀다. 그들은 총 한방도 쏘지 않고 교평나루터를 지혜롭게 빼앗고 천연요새인 금사강나루터를 탈취함으로써 맡겨진 임무를 순조롭게 완수하였다.
5월 1일, 날이 희붐히 밝아오자 진갱퇀장은 통안진을 재빨리 탈취하라는 군사위원회의 명령을 받았다. 이것은 금사강나루터를 공고히 하는 한차례의 관건적인 전투였다. 진갱퇀장은 참모장인 양림에게 전위영을 인솔하여 통안진으로 통하는 인후인 화염산의 요충지를 탈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요충지는 뭇산들로 첩첩히 싸여있고 지세가 험하여 이곳을 탈취하면 금사강을 수비하고있던 적들이 통안진으로 도망치는 퇴로를 차단해버릴수 있었다. 화염산의 요충지를 탈취하기 위하여 양림은 앞장에 서서 홍군전사들을 거느리고 모든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산꼭대기로 톺아올라 적들의 진지에 첫 수류탄을 던졌다. 그들은 적진을 짓부셔버리고 재빨리 화염산의 요충지를 탈취하였다. 그는 부대를 령솔하여 계속 도망치는 적들을 추격하여 통안진을 공략하고 적 수백명을 섬멸하고 600명을 포로하였는데 그가운데는 적의 퇀장도 들어있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도강점을 튼튼히 하였고 중앙홍군이 금사강을 성공적으로 도강할수 있도록 담보하였다. 이 전투가 있은 뒤에 중앙군위에서는 명령을 내려 홍색간부퇀을 표창하였다. 장정에서 양림은 대오의 진두에서 걸었으며 홍군간부퇀을 령솔하여 설산을 톺아오르고 초지를 지나면서 앞길을 가로막고 뒤쫓아오는 적들과 결사적인 전투를 벌렸다. 그는 2만 5천리를 걸어 마침내 1935년 12월에 중앙홍군과 같이 승리적으로 섬북근거지에 이르렀다.
섬북에 도달한후 홍15군단 75사 참모장을 맡았으며 라진(羅鎭)전역에 참가하였다. 1936년 2월 동정에 참가하여 선봉영을 거느리고 황하를 강행도하하여 대군도하를 위해 길을 개척하는 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하였다. 그후 양림은 청간하구 상륙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당시 그의 나이 38세였다(일부 내용은 《중국조선족인물전》에서 발췌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