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 소개
1934~1936년, 중국공농홍군주력이 장강남북의 각 쏘베트구역에서 섬감(陝甘)혁명근거지으로 전략적이동을 한것을 말한다. 1934년 10월, 왕명《좌》경모험주의의 착오적령도 및 적들의 군사적우위로 중앙혁명근거지는 제5차 반《포위토벌》전쟁에서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홍군제1방면군주력은 장정을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부분적 홍군부대를 남겨 유격전쟁을 계속하게 하였다. 8월, 중공중앙과 중앙군위는 중앙홍군의 전략적전이를 위하여 길을 탐색하기 위하여 홍6군단으로 하여금 상감(湘贛)쏘베트구역에서 철수하여 상중(湘中)에 가 유격전쟁을 발전시킬것을 명령하였다. 10월, 홍6군단과 홍3군이 합류, 상악천(湘鄂川)쏘베트구역을 창건하였다. 10월, 중앙홍군주력 각 군단은 각기 집결하여 륙속 출발하였으며 중공중앙과 홍군총부 및 직속종대는 서금을 떠나 출발하였다. [더보기]
|
 |
장정에 참가한 조선족- 중국공농홍군 고급지휘관 양림
양림(楊林)은 중국공농홍군의 고급지휘관이다. 원명은 김훈(金勛)이며 양녕(楊寧), 필사제(畢士悌) 등 이름을 쓰기도 했다. 그는 1898년에 조선 평안북도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서울 30만시민 반일대기의에 참가하였다가 일본군경의 수색과 체포를 피해 중국 길림성에 망명하였다. 1921년 운남강무(講武)학교에 입학, 1924년에 졸업한후 황포군관학교에 가 학생대장, 기술조교 등 직을 맡았으며 상단(商團)반란에 대한 평정과 제1차동정(東征)에 참가하였다. 1925년 여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1월 국민혁명군 제4군 엽정(葉挺)독립퇀 제3영 영장을 맡았다. 1926년 황포군관학교에 돌아와 기술주임교관직을 맡았다. 1927년 당의 파견을 받아 쏘련에 가 중산대학과 모스크바보병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30년 여름 동북에 돌아와 중공동만특위 위원 겸 군위서기 직무를 맡았으며 1931년 만주성위 군위서기에 임명되였다. 이 기간에 성위를 협조하여 무장투쟁을 대대적으로 발전시킬데 관한 지시를 연구, 제정하였으며 만주공농의용군 제4군 1종대(반석공농의용군이라고도 부름)의 창건에 참여하였다. 1932년 7월 중앙쏘베트구역에 가 선후로 중화쏘베트공화국 로동및전쟁위원회 참모장, 중국공농홍군학교 총교관, 홍23군 군장, 월감(粵贛)군구 사령원 등 직무를 맡았다. [더보기]
|
 |
장정에 참가한 조선인- 《홍군포병의 시조》 무정
무정(武亭)은 홍군대오에서 용맹하고 싸움에 능한 조선적 지휘관이였다. 그의 능숙한 포격술은 홍3군단 군단장 팽덕회의 찬양을 받았을뿐만아니라 광범한 지휘관들로부터 《홍군포병의 시조》로 불리기까지 했다. 장정로상에서 그는 포병영을 거느리고 탄우속을 헤쳐나가며 수많은 전공을 쌓았다. 1919년, 그는 조선의 《3.1》반일애국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이때로부터 그의 혁명생애가 시작되였다. 1923년, 그는 조선독립의 길을 찾고저 비밀리에 중국으로 왔다. 이때로부터 그는 중국에서 22년간의 전기적색채가 다분한 삶을 살았다. [더보기]
|
 |
|
장정중의 녀성홍군
중앙홍군 장정시 32명의 녀성홍군이 부대를 따라 출정하였는데 그중 30명이 연안에 도착했다. 당시 중앙홍군의 편제에는 녀전사가 없었다. 소수의 녀동지들을 데리고 떠난것은 새로운 근거지에서 녀성사업을 벌리기 위해서였다. [더보기]
|
초지를 지나기전 네명 남아
1935년 11월 19일, 오형양은 부대를 따라 장정을 시작했다. 《그때는 무기가 모자라 사람마다 총을 가지고있은것이 아니였다. 나한테도 총이 없었다.》서포에서 적의 정규군과 맞띠웠다. 《총이 없었지만 나도 남들과 같이 돌격해나갔다. 》[더보기]
|
장정에 참가한 네갈래 홍군
2만 5000리 장정이란 말은 중앙홍군이 섬서 북부에 도달한후 모택동이 제일 먼저 말한것이다. 중앙홍군은 섬서 북부에 이른후 장정로정에 대해 통계를 하였다. 장정에 참가한 부대는 중앙홍군뿐만아니라 홍2방면군, 홍4방면군, 홍25군도 있다. [더보기]
|
장정도중 처음 격추한 적기
장정이 시작될 때 19살 되는 엽음정은 갓 홍군대학 고사기관총훈련반에서 나와 중앙군위 경위영 기관총련 련장으로 되였다. 늘 공중에서 위세를 부리는 적기를 대처하기 위하여 엽음정은 한양제조 30절식 중기관총을 개조하였다. [더보기]
|
|
|
 |
|
림치파: 장정의 알려지지 않은 중대한 전략적의의
올해는 중국공농홍군 장정승리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거시적으로 볼 때 장정은 2대 전략적의의를 가진다. 첫째, 당시로 말할 때 장정은 공산당과 홍군을 구원해주었으며 그들로 하여금 생존과 발전의 공간을 얻게 하였다. 둘째, 후세사람들로 말할 때 장정은 견인불발의 장정정신을 남겨주어 사람들을 분발하도록 고무해주고있다. 전자(前者)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론술하고 해석할수 있다. 당시 장개석 국민정부는 두개의 적을 갖고있었다. 하나는 동북에 있는 일본침략군이였고 다른 하나는 장강중하류에 있는 공산당 쏘베트정권이였다. 알다싶이 당시 국민정부는 장강중하류지역(화중)을 그 핵심리익지대로 삼고있었다. 그러므로 장개석의 립장에서 볼 때 일본은 비록 민족의 적이지만 먼 곳에 있었고 또 중간에 화북을 사이두고있어 그자신의 통치에 대하여 직접적위협을 조성하지 않고있었다. 그러나 공산당력량은 장강중하류에 자리잡고있어 눈에 든 가시같은 존재라고 볼수 있었으므로 장개석으로서는 도저히 용인할수 없었다. 때문에 장개석은 일본이 《9.18》사변을 일으킨 상황에서 민족의 위기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력을 집중하여 공산당에 대하여 거듭되는 대규모 포위토벌을 진행했던것이다. 10월, 중앙홍군주력 각 군단은 각기 집결하여 륙속 출발하였으며 중공중앙과 홍군총부 및 직속종대는 서금을 떠나 출발하였다. [더보기]
|
 |
|
중국공농홍군 장정의 제일
● 장정 첫 선견대― 북상항일선견대. 1934년 7월, 당중앙은 심회주(尋淮洲), 속유(粟裕) 등을 파견하여 서금(瑞金)에서 출발하여 북상하게 하였다. 10월, 강서성 동북부에서 방지민(方志民)이 령도하는 홍10군과 합류하여 홍10군단으로 편성한후 정식으로 중국공농홍군 북상항일선견대를 설립하고 계속 북상하였다.
● 장정출발 제1산― 서금 운석산(雲石山). 1934년 10월중순, 중공중앙, 중앙군위와 중앙직속기관은 운석산부근의 매갱(梅坑)에서 출발하여 장정을 시작하였다.
● 장정중 돌파한 첫 봉쇄선― 강서 안원(安遠), 신풍(新豊) 구간. 1934년 10월하순, 홍1, 홍3 군단은 적군 진제당(陳濟棠)부대가 지키던 안원, 신풍 봉쇄선을 돌파하고 장수(漳水)를 건너 호남 여성(汝城)을 향해 출발하였다.
● 장정중 소집한 첫 중앙정치국회의― 려평(黎平)회의. 1934년 12월 18일, 중앙정치국은 려평에서 회의를 소집하고 2, 6군단과의 합류계획을 포기하고 적의 력량이 박약한 귀주로 전진할데 관한 모택동의 정확한 주장을 긍정하였다.
● 장정중 건립한 첫 지방혁명무장― 묘족(苗族)유격대. 1934년 12월, 홍1방면군의 도움으로 귀주 동남인민들은 자기들의 혁명무장- 묘족유격대를 건립하였다. [더보기]
|
 |
|

리완빈 장정코스 계속 이어진다
2004년 10월 당시 17살인 아들 리휘를 데리고 374일간의 일정으로 홍군 제1방면군의 장정코스를 정복한 계속으로 2005년 11월부터 홍군 제2방면군 장정코스에 홀로 다시 오른 리완빈(연변사진가협회 회원, 연변태권도협회 부회장, 세계태권도련맹 공인6단)이 올 10월 녕하 서길현 장태보에 이르러 그의 제2차장정코스를 원만히 완수했다.[더보기]
|
91세 로홍군 《장정길》 다시 걸어
91세에 나는 로홍군 류국보는 1932년 18세에 혁명에 참가, 1934년 10월 장정길에 올랐다. 류로인은 《장정은 내 한평생에서 가장 중요한 경력이다. 나는 내가 장정인이라는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2005년 류로인은 홍군장정승리 60주년 기념활동에 참가하여 로수장, 로전우들과 만났다. 그의 머리속에는 생전에 다시 장정길을 걸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더보기]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