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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시의 력사고적들
2008년 01월 23일 14:23 【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청조시기 유일한 건물-수변루

연길시 하남가두 광화로 서광골목 7-17번지. 고층건물속에 포위되여있는 자그마하고 낡은 2층건물, 이 건물이 바로 연길에서 지금까지 보존되여있는 청조시기의 유일한 건축물이며 길림성중점보호 문화재인 길림변무독판공서—일명 수변루(吉林邊務督辦公署樓-戍邊樓, 도윤루라고도 한다)이다.

수변루는 동서길이가 20.8메터, 남북너비가 18.6메터 되는 정남향 2층루각으로 광서 34년(1908년)에 착공하여 선통원년(1909년)에 준공되였고 선통 2년 정월에 사용에 교부되였다. 력사기재에 의하면 수변루의 건축규모는 상당했으며 부지면적이 2900헥타르에 달했다. 변무독판공서 청사는 검은 벽돌에 푸른 기와로 지은 집으로 주변에 비교적 큰 건축군이 있었는데 남쪽청사, 북쪽청사, 사무청, 대청, 서양대청 등 도합 221칸으로 되여있었다고 한다.

건축군의 남쪽에는 벽돌기토우에 나무바자를 두른 정원이 있었으며 정원안에는 26칸짜리 기와집과 8칸짜리 초가집이 있었다. 건축군의 북쪽에는 동서로 120메터, 남북으로 240메터 되는 검은 벽돌담장이 있었고 남북담장에 각기 큰 대문이 하나씩 있었으며 동서담장에는 작은 대문이 각기 하나씩 있었다. 남쪽문으로 들어서면 한복판에 동서의 길이가 20.8메터, 남북의 너비가 18.6메터에 달하는 남쪽청사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수변루였다. 수변루는 검은 벽돌로 벽체를 하고 푸른 기와를 한 합각지붕으로 된 2층청사였으며 바깥벽 주위에 나무로 만든 회라이 있었다. 벽에서 1.7메터 떨어진 지점에 또 붉은 칠을 한 22대의 통나무기둥이 세워져있었다. 『전문』

연길경내의 첫 관청-연길청

연길청은 청조 광서 27년(1902년) 연길경내에 설치한 첫 관청이였다.

1882년 2월, 청조는 남강에 현성을 배치했었다. 연길청은 황무지개간을 전문 책임진 초간국과 무간국(抚垦局)과는 달리 훈춘부도통부에 귀속된 정부기관이였으며 관할범위는 현재의 연길시, 룡정시, 화룡시, 왕청현, 도문시, 안도현 황구령이북의 지역이였다.

연길청은 현재의 조양거리와 해방로가 교차되는 곳인 현진학소학교자리에 있었다. 연길청의 건축군은 검푸른 벽돌과 푸른 기와로 이루어졌으며 중간은 정방형으로 된 정원이였고 주변은 벽돌로 담장을 둘렀으며 정남쪽 정면에 대문이 있었다.

연길청은 1902년 1월에 건립되기 시작하여 이듬해 3월부터 사무를 보기 시작했다. 1910년 청조는 연길청을 연길부로 승급시켰고 동남로병비도태공서(东南路兵备台公署)에 함께 소속시켰으며 다시 연길부를 연길현으로 고쳤다. 이때로부터 사람들은 국자가를 연길이라 부르기 시작하였고 연길은 연변지구에서의 청조와 민국 정부의 
『전문』

남강초간국과 국자가

남강초간국의 유적지는 현재의 연길시 해방로와 국자가 교차점의 동북부에 위치해있었다고 한다. 그 지방에 일찍 벽돌기와로 된 5칸짜리 단층집이 한채 있었는데 민국시기 "동흥전당포' 간판을 건것으로 기재되고있다.

청조때 연길은 녕고탑부도통의 관할하에 있어 북쪽인 왕청방면에서 보면 남쪽에 위치해있었다고 하여 남강이라고 불렀다.

남강에 처음 이주한 사람은 류씨성을 가진 한족농민이였다고 한다. 그는 성자산(지금의 소영자기슭의 사회복리원부근)기슭에 집을 짓고 황무지를 일구어 농사를 지었는데 후에 이곳에 들어오는 한족농민들이 늘어나면서 마을이 생기고 밥짓는 연기가 잘 빠지지 않으니 연집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남강은 길림, 돈화쪽에서 훈춘과 룡정 및 두만강기슭으로 드나드는 길목이였다. 1881년(광서 7년) 청조정부는 남강에 초간국을 설치하고 이주민을 모집하고 토지개간사무를 보았다. 1885년에 조정에서 조선간민들의 거주와 토지개간을 허용하면서 이곳에 조선인이주민들도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길림장군은 1891년 간광국과 월간국을 합병하여 무간총국을 설치하고 남강에 총국을 옮겼다. 무간총국은 1902년 연길청이 세워지면서 소속부서로 개칭되였다.
『전문』

연길 "아래개방지"의 유래

청조말년과 민국초기 연길의 군정, 민정 기관들이 수차 바뀌는 사이 자그마한 시가지도 점차 커지기 시작하였다.

1921년에 이르러 이미 흥륭대가(지금의 신라호텔-원 부식물상점 구간 해방로), 흥륭후가(진학소학교-우전호텔구간 인민로), 정자가(丁字街: 천합부동산-시건설은행구간 해란로), 국자가(국자가 시건설은행-우전호텔구간), 정자가(贞字街: 진학소학교-천합부동산구간) ""자형 거리가 형성되였으며 그중 흥륭대가, 정자가, 흥륭북대가 그리고 국자가와 흥륭북대가 사이 남북향거리가 제일 번화했다. 당시 국자가 동쪽지역을 "아래개방지"라고 불렀는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들어있다고 한다.

1910년 일제는 지금의 연길시정부청사 및 서광장(지금의 중백청사, 복무대루, 신화서점, 전신청사, 시대광장 십자로구간) 동쪽에 일본령사분관과 경찰서를 설치하였으며 또 "일본거류민회'를 내왔다. - "간도협약"에 따라 국자가 연길도 일본의 통상지로 개방된 뒤 일제는 저들의 세력범위를 국자가에까지 넓히려고 했었지만 국자가에는 지방관청과 군경기관들이 주재하고있었고 중국인 상점이 늘어서 발 붙일수 없게 되였다. 하여 일제는 조선인들이 토지소유권을 향수할수 있는 점을 리용하여 친일분자를 매수하여 조선인의 명의로 지금의 서시장거리의 토지를 헐값으로 사들이고 250여세대의 민가를 짓고 "신시가번영회"라는 조직을 내오고 『전문』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

왕우구(湾湾沟라고도 불리운다)항일유격근거지는 동만항일유격근거지가운데서 가장 큰 근거지의 하나이다.

왕우구는 원 연길시 의란진소재지 구룡평에서 북쪽으로 2킬로메터 되는 곳에 위치해있는데 당시 근거지의 범위는 왕우구와 구룡평서쪽 의란하상류일대의 북동(현재의 고성촌)과 남동(련화동이라고도 한다) 등지를 포함하고있다.

1919년-1920년 이곳은 안무(安武)의 간도국민회군,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 및 의군단 등 조선족항일무장단체가 근거지로 하던 곳이다.

북동으로 불리우는 고성촌은 경상도 하동에서 집단이주하여 온 조선인들에 의하여 개척된 마을이며 한국의 유명한 소설가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되였던 곳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곳이다. 또한 서쪽 연화동 상촌, 지금은 페허로 변하였지만 1930년대만 하여도 이곳은 항일유격대의 본부가 자리잡았던 지역이다.

고성촌과 연화촌 동북쪽의 왕우구는 1930년대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의 중심이였다. 1932년 11월 2일, 중공동만특위와 연길현위의 직접적인 령도아래 왕우구 중촌에서 왕우구위 제1기 쏘베트대표대회가 열렸는데 북동, 남동, 왕우구 부근의 각 촌 대표와 기타 지방 대표 600여명이 대회에 출석, 왕우구쏘베트정부를 건립했다.
『전문』

연길의 돈대와 고대장성

군사요새로 이름난 성자산성, 이 성자산성을 둘러싸고 주변에 돈대(일명 봉화대)가 자리잡고있는데 비교적 이름을 날린것은 모아산돈대, 소돈대, 연집하돈대, 대돈대 등이다.

모아산돈대는 연길시와 룡정시 접경지대의 해발 517메터 되는 모아산주봉에 위치해있는데 맑게 개인 날 이곳에서 방원 30킬로메터의 동정을 살필수 있었다고 한다. 모아산돈대밑층 직경은 대략 15메터, 높이는 3메터, 꼭대기직경은 6~8메터에 달한것으로 알려지고있다.

모아산돈대는 서북 연길공원내의 소돈대, 북부 의란진 흥안촌의 대돈대와 함께 당시의 "심장"으로 되였던 성자산성을 지켜나선것으로 학계는 인정하고있다.

돈대와 관련된 고대 군사시설로는 연변의 "고장성"을 꼽을수 있다. 그 장성의 길이가 얼마나 되고 시작점과 끝점이 어디에 있으며 언제 수축했고 어떤 역할을 발휘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연길에서 발견된 고대장성은 이어서 연길, 룡정, 화룡 험산준령에도 자욱을 남기고있다. 연길시북부의 고대장성은 대부분 토건축이였고 일부 돌건축도 있었으며 돌과 흙으로 된 토석건축도 있었다. 현재 발견된 고대장성은 서쪽으로 화룡시 팔가자진 풍산에서 시작하여 서성, 룡문, 다시 룡정시 세린하, 도원, 동불사, 조양, 팔도, 또다시 연길시 연집, 도문시 장안진 마반산(성자산성부근)을 거쳐 동으로 장안진 계림북산에 이르는데 총길이가 100여킬로메터에 달한다고 한다.
『전문』

와룡동 창동학원과 "사은기념비"

연길시 공원다리서쪽 3.5킬로메터 되는 곳에 위치한 마을이 90여세대 조선족이 사는 와룡동이다. 와룡동은 오늘날 연길시 소영진 민흥촌 제3, 4 촌민소조를 말하는데 마을서쪽에 구불구불 뻗은 산들이 마치 룡이 뒤틀고 누워있는듯하여 생겨난 지명이다. 이곳은 조선 함경북도의 가난한 농민들이 들어와 개척한 마을로서 1883년경에 이르러서는 80여세대가 사는 큰 동네로 되였다.

1907년, 연길시 서쪽교외의 와룡동에 제자들이 사은의 정을 새겨놓은것이다. 당시 번성했던 학교는 1920년 경신년 대참변때 불타버리고 현재는 비석만 외로이 남아있다

그러나 연길에서 무엇보다 자랑스럽다고 느껴지는것은 “사은기념비”이다. 민주촌 산비탈, 화강암에 “사은기념비(師恩記念碑)”라 한자로 씌여진, 높이 1.87메터의 비석이 있는데 이는 조선족 근대교육의 한페지를 기록한 창동학원의 제자들이 스승의 은혜를 기념하여 세운것이다.

옛날 와룡동 창동학원이 바로 이곳에 자리잡았었다. 지난 세기초 룡정의 명동학교와 더불어 연변 조선족 근대교육의 요람으로 불리우며 조선족교육사에서 찬란한 교육의 한페지를 기록한 창동학원은 남성우, 리병휘, 오상근 등 반일지사들의 창의로 세워졌다.

1907년, 기독교인 오상근, 리병휘, 남성우 등이 반일민족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최병균 등 12명으로 구성된 학교후원회의 도움으로 창동강습소를 설립하였다. 1910년에 중학부를 부설하고 학교이름을 창동학원으로 개칭하였다. 이 학교에는 조선, 로씨야 연해주일대에서 온 학생들도 있었다. 이 학교 중학부에서는 십여년동안에 200여명의 학생을 육성하였는데 많은 항일투사들이 배출되였다.
『전문』

  래원: 인민넷-중국공산당뉴스 (편집: 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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