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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현: 중앙지도자들의 수행기자로 사업하던 나날에
2007년 11월 23일 14:48 【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1987년 11월, 등소평동지는 인민대회당에서 조선 리근모총리를 접견한후 기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시였다. 뒤줄 왼쪽 첫번째 사람이 저자 윤봉현임.
1988년 9월 10일, 중국당정대표단 단장 양상곤주석이 김일성주석을 접견한후 기자들을 따뜻이 만나보고 함께 백화원호텔앞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러 나가면서 저자 윤봉현과 담소하고있다.
1985년 5월 7일, 조선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도중 특별렬차안에서 수행기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있는 호요방동지. 뒤줄 오른쪽 첫번째 사람이 저자 윤봉현임.
리붕동지를 단장으로 한 중국당정대표단이 대동강반에 우뚝 솟아있는 주체사상탑을 참관하고있다. 첫줄 왼쪽 첫번째 사람이 저자 윤봉현임.

나는 40년동안 방송사업에 종사해왔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많은 일들이 희미한 자취로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아나운서, 번역, 편집, 기자, 정치보도기자로 활약하던 그 뜻깊은 나날들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은 잊혀지지 않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지금도 새록새록 뇌리에 떠오른다. 특히 정치보도기자로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신변에서 취재활동을 진행하던 일들은 영원한 추억으로 남아있을것이다.

주은래총리를 뵙던 그날

나는 이전에 지진이라는 말은 들었어도 지진이 어떤것인지 몰랐다. 1965년 4월, 하북성 형태에 6.4규모의 지진이 일어났다.

하루는 사무상앞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전등이 좌우로 흔들리고 그 두터운 문이 폭풍이나 만난것처럼 덜컹거렸다.

지진이다! 그번 지진으로 하여 우리 사무실벽도 두세곳에 길게 금이 갔다.

며칠후 저녁에 식사하러 식당으로 가려고 막 대문에 들어서려는데 서쪽켠으로부터 쏘련제 짐표고급승용차 대렬이 서서히 들어오고있었다.

나는 대뜸 중앙 지도간부들의 차로 짐작하고 대문옆에 붙어서서 기다렸다. 제일 앞 승용차가 나의 앞으로 지나갈 때였다. 갑자기 차의 카텐이 열리며 익숙한 모습이 나타났다.

주은래총리가 내다보고있는것이였다. 아, 주은래총리! 손을 내밀면 금시 악수라도 할수 있는 지척에 그이가 있었다!

순간 나의 가슴은 마구 방망이질하였다.

마당에 차가 멎자 원 중국인민지원군 정치부 부주임이며 중국방송사업국(지금의 광전총국)당위원회 서기인 정래부(丁莱夫)중장이 주은래총리를 안내하며 지진후의 방송사업국 상황을 일일이 소개하였다. 나는 식당에 들어가 주은래총리가 오셨다고 사람들에게 알렸다.

나의 말에 숱한 사람들이 밥술을 놓고 욱 몰려나왔다.

경호원에게 주은래총리가 언제쯤 어디로 나오시는가고 묻자 경호원은 총리를 만나려거든 시방송국 뒤문에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우리는 시방송국 뒤문에 가 질서있게 줄을 서 기다렸다. 총리께서는 왼손을 가슴에 얹은채 오른손을 힘있게 흔드시며 “안녕하십니까(你们好!)”라고 말하며 빠른 걸음으로 승용차에로 다가갔다.

그날 우리가 주은래총리를 모신 시간은 분으로 쪼갤수 있는 너무나 짧은 순간이였다.

언제나 우리의 방송사업에 관심과 배려를 돌려주시던 주은래총리를 마지막으로 뵌것은 1974년 9월 30일 저녁, 인민대회당에서 진행된 국경절 연회때였다.

나는 조선 윤범수전문가와 함께 주석단 제일 앞 식탁에 앉았다. 주은래총리는 이미 병으로 얼굴에 로년반점이 가득 나오고 수척했으나 여전히 름름하고 씩씩하였으며 인자하였다.

그이가 연단에 나오시자 장내는 온통 환호성으로 들끓었다. 중국사람들뿐만아니라 숱한 외국손님들과 기자들, 외국류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주총리의 연설을 들었다. 20세기말에 4개현대화를 실현할데 대하여 말할 때 특별히 격앙된 어조로 강조하였다. 이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총리의 목소리였다.

첫 출국방문

1975년 8월 22일. 나는 처음 중국텔레비죤촬영대표단 통역으로 조선을 방문하게 되였다. 문화대혁명기간이라 출국방문이였지만 우리는 한 여름에도 중산복을 입고 목단추까지 채우고 다니다보니 늘 온통 땀투성이였다. 우리 촬영단의 리철부단장은 원 중국인민지원군 군단장이였고 촬영사는 원 중국인민지원군 종군기자였다. 우리 촬영단은 조선의 이르는 곳마다에서 따뜻하고도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우리는 조선에 머무르는 두달동안에 《동방례의지국》, 《조선의 꽃봉오리》,《아침의 나라 조선》 등 7, 8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다. 그중에서 제일 잊을수 없었던것은 9월 8일, 내가 처음 조선인민문화궁전에서 김일성주석과 최용건위원장을 만나뵙던 일이다.

이날 오전 10시. 인민문화궁전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만세소리, 환호소리로 들끓었다. 이윽고 김일성주석이 손을 흔들어 답례하시며 주석단에 나오시고 그뒤에 최용건위원장이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나왔다.

최용건위원장의 부인도 이날 처음 함께 나왔다. 순간 일찍 조선인민들과 어깨겯고 한 전호속에서 싸우던 리철부단장과 주전방촬영사의 두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우리도 눈물을 흘리며 어찌나 박수를 쳤던지 손바닥이 다 아플 정도였다.

나는 그번 방문을 통하여 중조 두 나라 인민들사이의 전투적친선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가슴깊이 느낄수 있었다.

우리가 황해남도 과일군에 가 촬영할 때의 일이다.

날마다 현장에 나가 촬영하다보면 언제 집에 돌아와 빨래할 사이도 없어 옷이 어지러우면 걸어놓기 멋적어 가방에 구겨넣군 하였다. 그런데 어느 하루 오후에 돌아와 와이샤쯔를 빨려고 가방을 뒤졌더니 분명 가방에 넣어두고 나간 옷을 찾을수 없었다. 그렇다고 호텔안내원들에게 물을수도 없고… 바로 이때 언제나 상냥하고 인정스럽게 우리를 대해주던 한 녀안내원이 웃으며 방에 들어서는것이였다.

“와이샤쯔를 찾으시지요? 미안합니다. 제가 빨아드리려고 가져다 씻었는데 지금 말리고있는중입니다. 손님들은 일이 빠바 옷을 빨 시간도 없으시겠는데 옷을 빨아드리려고 옷을 찾아도 없으니 실례인줄 번연히 알면서도 가방을 뒤져 옷을 빨았습니다. 미안해요.”

“아, 괜찮습니다. 정말 너무 고맙고 미안합니다!”

“전 중국손님들만 보면 남달리 잊을수 없는 추억들이 머리에 떠올라 남보다 더 반갑고 정답고 친근한 감을 느끼게 됩니다. 전 조선전쟁시기에 간호원으로 지원군 전사들을 돌봐주었습니다. 그중 한 전사는 저와 각별히 친근한 사이였습니다. 귀국한후에도 그는 한동안 계속 저에게 편지를 보내주었지요. 후에 알고보니 그가 저를 좋아하였던 모양이였습니다. 제가 우둔해서 그것이 사랑인지 뭔지도 몰랐지요…”

나는 지원군전사의 머리에 붕대를 감아주며 살틀히 보살펴주던 그녀의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듯 했다. 우리가 과일군을 떠나던 날 그녀는 울먹이며 우리를 따라 마당까지 나와 우리의 두손을 꼭 잡아주었다. 우리가 탄 직승기는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기나 한듯이 떠나기 아쉬운듯 호텔상공을 두바퀴나 저공비행하다가 그냥 우리를 향해 손저어주는 안내원들을 멀리 뒤에 떨구며 평양으로 날아갔다….

분망한 외사취재활동

10년동란이 끝나고 1980년대에 들어서자 중조 두 나라 간의 친선은 갈수록 두터워지고 고조기에 이르렀다.

1985년 4월, 나는 국제방송국 체육기자단으로 항주에 가 제 19회 아시아력기선 수권대회를 취재하게 되였다. 이것은 남북조선선수들이 처음 함께 참가한 규모가 비교적 큰 운동회였다.

나는 어느날 남조선선수단의 통역과 련계하고 남조선기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갑자기 내가 조선말을 하니 그는 깜짝 놀라는것이였다.
KBS의 촬영기자는 깍듯이 인사하며 “저는 정말 이국땅에서 우리 한국말을 하는 분을 만날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오기전까지만도 중공에 갔다가 무사히 돌아오겠는지 근심까지 했댔는데 정작 와보니 생각과는 판 달리 편하고 즐거웠습니다. 이렇게 만나니 실로 반갑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서로 기념품을 교환하였다. 제도와 리념을 달리하고있을뿐 그들도 우리와 다를바 없었다.

우리가 취재를 원만히 마치고 북경에 돌아올 준비를 하고있을 때 《5월초에 호요방총서기와 함께 조선에 취재하러 가게 되니 곧 돌아오라》는 전화통지를 받았다.

나는 즉시 비행기를 타고 먼저 북경에 돌아왔다.

1985년 5월 3일, 나는 중앙텔레비젼방송국과 중앙인민방송국, 인민일보, 신화통신기자들과 함께 호요방총서기가 탄 특별렬차에 올랐다. 양상곤, 호계립 등 당정간부들이 역에서 호요방일행을 바래였다.

우리는 외교부 보도국 책임일군들과 함께 먼저 승용차로 압록강철교를 지나 신의주로 건너갔다. 5월이라 하지만 이날 따라 날씨가 좀 추웠고 아침에는 비가 내려 을씨년스러웠다.

신의주시에 들어서니 벌써 연도환영을 나온 10만명 군중들이 장사진을 이루고있었다.

나는 사진기와 록음기를 메고 다른 기자들과 함께 군중들 한가운데 죽 깔아놓은 붉은주단우를 걸어 신의주역 광장으로 갔다.

이윽고 검은색 고급승용차가 들어서고 경호원이 차문을 열자 웅장한 체구의 김일성주석께서 허리를 굽히시며 천천히 내리시였다. 경호원이 중절모자와 은회색 코 트를 받아들었다.

광장에서는 환영곡이 연주되고 만세소리, 환호소리가 터져올랐다. 김일성주석의 뒤로 약 10메터 사이두고 김정일, 박성철, 허담, 현준극, 신인하대사가 서있었다.

한번은 공식회담에 들어가기전에 호요방총서기가 “듣자니 ‘사향가’는 김일성주석께서 쓰신것이라면서요”라고 하자 김일성주석은 “그것은 내가 젊었을 때 노름삼아 쓴거라구”라고 하시며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이어 김정일동지는 “그것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쓰신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조선에 대한 호요방총서기의 비공식방문이 끝나던 5월 7일 조선측에서는 우리에게 김일성주석의 선물로 고급트렁크 하나에 공단이불등 2개, 고급 인삼술, 고급사탕과 과자, 연필 등을 선물하였다.

김일성주석의 이 선물트렁크는 국제방송국 전람행사에서 두번이나 전시되였었다.

우리가 조선에 머무른 시간은 5일밖에 안되였지만 두 나라 수뇌자들과 이렇게 장시간 같이 있어보긴 그때가 처음이였다.

우리는 귀국도중 특별렬차안에서 호요방총서기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1985년 10월, 리붕부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중국당정대표단이 조선에 가 중국인민지원군참전 35돐 경축 기념행사에 참가하게 되였다. 나는 이번에도 수행기자로 중앙텔레비죤방송국 기자들과 함께 먼저 조선에 가 사전취재를 하였다.

온 조선은 실로 말그대로 친선의 도가니로 들끓고있었다.

10월 24일, 리붕동지를 단장으로 하는 중국당정대표단이 탄 특별비행기가 평양 순안비행장에 내리자 김환서기가 앞으로 나와 따뜻이 맞이하였다.

이어 리붕동지는 김환서기와 함께 환영군중들 앞을 지나며 시내에 들어섰다.

저녁에 김일성주석께서는 리붕동지를 단장으로 한 중국당정대표단을 회견하였다. 김일성주석은 리붕동지를 만난 자리에서 “당신은 중국의 후계자로 제일 먼저 우리 나라를 찾아주어 대단히 고맙습니다!”라고 하였다.

조선에 대한 방문을 마치며 리붕동지는 백화원에서 작별연회를 차렸다. 연회가 끝날 무렵에 리붕동동지는 우리 기자석에 찾아와 제일 먼저 나에게 술을 권하며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하였다.

신화통신 기자가 미처 사진을 찍지 못한것을 서운해하자 리붕동지는 “다시 찍으면 되지 않습니까(重來嘛!)”라고 하며 다시 술잔을 들었다.

나는 너무도 고마워 연신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가볍게 머리숙여 인사하였다.

이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서기 김환동지가 술을 권하였다.

10월 26일, 우리는 리붕부총리를 따라 회창군 지원군렬사릉을 찾아갔다. 화환진정식이 끝난 다음 리붕동지와 양성무총참모장이 모안영렬사묘앞에서 묵도하였다.

모안영의 부인 사제와 모안청의 부인이 모안영동상앞에 나타났다. 모안영의 묘를 한바퀴 돌던 모안영의 부인 사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그만 얼굴을 돌려버렸다.

나는 인츰 마이크를 들고 그를 취재하기 시작하였다. 인민일보의 서보강과 신화통신사의 고호영도 나를 따라 나섰다.

사제는 울먹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안영이 희생된후 1953년에 모주석께서 이 사실을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주석께서는 ‘안영은 국제주의전사’라고 하시면서 저더러 잘 따라배우라고 하시였습니다. 모안영은 쏘련에서 반파쑈전쟁에 참가하였고 후에 뽈스까와 체스꼬슬로벤스꼬에 가 반파쑈전쟁에 참가한후 조선전선에서 희생되였습니다. 오늘 모안영의 동상을 보니 저의 마음은 한없이 괴롭습니다. 저는 조선에서 모안영에 대하여 이처럼 높은 평가를 주고 기념하여주니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모안영의 동상앞에서 우리는 또 양성무총참모장에게 마이크를 돌렸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로전우 모안영의 동상을 보니 나는 마음이 아픕니다. 이번에 두번째로 조선에 와 조선의 일산일수, 일초일목을 보니 감격에 목이 멥니다. 그때 모안영동지는 사령부에서 일했고 저는 동부전선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만났습니다. 이번에 조선에 와 조선의 번영하는 기상을 보니 정말 기쁩니다. 조선에 오니 두번째 고향에 온것 같습니다.》

회창을 떠나 평양으로 올라오는 승용차안에서 나는 눈물을 머금고 《조선땅에 고이 잠든 영웅들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조선중앙 방송위원회에 가 북경에 소식을 전했다. 이것은 내가 기자생활에서 처음 눈물을 머금고 쓴 원고이다.

1988년 9월, 양상곤주석을 단장으로 한 중국당정대표단이 조선을 방문할 때였다. 어느날 백화원 국빈관에서 김일성주석의 접견이 있은후 양상곤주석께서 우리 곁으로 오시더니 《여러분 수고하십니다(你们辛苦了!)》라고 하며 나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순간 나는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양상곤주석과 나란히 걸으면서 밖으로 나왔다. 이때 중앙인민방송국 시정기자 라관흥이 샤타를 눌렀다. 지금도 양상곤주석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볼 때마다 단체사진을 찍을 때 주석옆에 선 전기침외교부장의 허리를 끌어안아 옆으로 밀어다세우던 일이 생각나 미안쩍은 감이 들군 한다. 전기침외교부장은 시무룩이 웃으면서 나에게 자리를 양도해주었다. 이럴 때 보면 기자들은 지도간부들과 아주 친숙한 사이라고 할수 있었다.

1980년대는 나의 기자생애에서 제일 휘황한 년대이기도 하였다.

1987년 5월 7일, 김일성주석께서 중국을 방문할 때 등소평동지가 조어대국빈관 18호청사에서 김일성주석을 접견하시였다.

이것은 중국에 대한 김일성주석의 마지막 방문이였고 또한 등소평동지와의 마지막 상봉이기도 하였다.

그해 11월에 조선리근모총리가 중국을 방문할 때 등소평동지는 인민대회당에서 리근모총리를 회견하신후 처음으로 우리 기자들과 기념촬영을 하시였다. 실로 두고두고 기념할 귀중한 사진이다. 나는 1985년부터 1990년까지 정치보도기자로 활약하는 사이에 등소평동지께서 조선 김일성주석, 양형섭의장과 리근모총리를 접견하실 때 세번 취재에 참가할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며 한번은 손녀의 손을 잡고 중국당정대표단을 전송하러 북경역에 나오신 등소평동지를 만난적이 있었다.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인 그이의 거룩한 모습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을것이다.

1990년 9월, 북경아시아운동회때 나는 국제방송국 기자단에 참가하여 취재보도를 하는 한편 축구 준결승과 결승 실황중계방송을 담당하여 성과적으로 과업을 수 행하였다. 그 덕에 강택민총서기와 양상곤주석, 리붕총리가 인민대회당에서 3천명 대표들을 접견할 때 국제방송국 2명의 대표중 일원으로 접견에 참가할수 있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었다.

촬영이 끝난후 나는 자리에서 내려와 기자들과 함께 취재촬영을 하였다.

강택민주석과 리붕총리가 각기 연설하였다. 나는 이 력사적인 사진을 카메라에 담았다. 나는 지금도 한가할 때면 잊을수 없는 지난날의 영광의 나날들을 감회깊게 추억하군 한다.

【윤봉현 략력】

길림성 룡정시 출생.

1961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후 연변인민방송국에 입사.

1964년말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에 전근. 아나운서, 번역, 기자,
정치보도기자로 활약. 조선어부 부주임, 주임 력임.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회원.

  래원: 인민넷-중국공산당뉴스 (편집: 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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