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국경절 전날 오전, 나는 외교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오후에 중앙지도자가 조선대표단을 접견하게 되니 통역하러 나오라는 통지였다.
그때 국제방송국 조선어조 기자로 근무하고있던 나는 때때로 외사통역에 나서군 하였는데 한동안 방송실무가 딸려 대표단을 따라다닐수 없었기때문에 중요한 접견시에만 두세시간씩 부름을 받고 나가군 하였던것이다.
이날 오후 약속된 시간전에 인민대회당에 들어서니 외교부 의전국 관원과 보도부문 기자들이 벌써 나와있었다.
중앙의 어느 지도자가 접견하는가고 물으니 주은래총리가 조선친선대표단을 만나신다는것이였다. 총리의 말씀은 이미 여러번 통역해보았고 말씨도 알아듣기 쉬운데다가 례의적인 일반접견일것이라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한 나는 별로 긴장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총리의 통역을 할 때 반드시 정신을 고도로 가다듬어야 한다는것만은 나도 잘알고있었다. 한번은 조선의 전통명절에 즈음해서 베푼 연회에서 중앙 대외련락부의 한 젊은 통역원이 총리 연설의 통역을 담당하였다. 그날 그는 총리가 사전에 작성된 연설문에 없는 말 한마디를 보충한줄 모르고 통역하지 않았다가 그 자리에서 총리의 지적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주은래총리의 말씀을 통역할 때면 언제나 여느때보다 정신을 집중하군 하였다.
주은래총리가 인민대회당에 나오신 잠간후에 조선친선대표단 성원들이 접견장소에 들어섰다. 나는 외교부 의전국 관원과 함께 조선친선대표단 성원들을 일일이 총리께 소개해드렸다.
이날도 예나 다름없이 나는 몇해전 결혼식때 연길에서 해입은 양복을 입었다. 그래서 나를 조선측 수행인원인줄 아셨는지 총리께서는 나중에 나의 손을 잡으며 수고한다고 말씀하시였다. 나는 즉시 내가 중국측 통역원이라고 말씀을 올렸다. 그러자 총리는 웃는 얼굴로 나의 옷을 살펴보면서 “복장을 봐선 조선동지들과 구별할수 없구만. 다음부터 옷을 바꿔입었으면 좋겠소”라고 부탁하는것이였다(이틑날로 나는 왕부정거리에 있는 복장점에 가서 그때 류행되던 중산복을 시키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주은래총리는 조선친선대표단 성원들과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은래총리는 먼저 중국 국경절에 즈음하여 저명한 인사들로 구성된 조선친선대표단의 중국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그들에게 열렬한 환영의 뜻을 표시하였다. 친선대표단 성원들가운데는 조선과학원 력사연구소 소장 박시형교수와 이름난 영화배우 최현숙녀사도 들어있었던것이다.
총리는 중조 두 나라간의 친선관계에 대해 언급하다가 나를 돌아보면서 왜 기록하지 않는가고 물었다.
당시 자신의 기억력을 믿고있은 나는 일반 접견시 쌍방사이에 주고받는 대화들을 머리속에 기억했다가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류창히 통역하군 하였다. 하여 이날도 총리와 단장 사이에 말들을 수첩에 적지 않고 통역하였던것이다.
총리가 귀띔해주자 나는 수첩과 원주필을 꺼내들었다…
내가 주은래총리의 통역을 마지막으로 담당한것은 1973년 5월이였다.
그때 총리는 병환으로 몹시 고생하던 몸이였으나 조선 《로동신문》대표단을 만나려고 특별히 북경호텔에 가 리발까지 하고 인민대회당에 나왔다(총리의 암은 1972년 5월에 발견되였다. 그는 1974년 6월 1일 북경 305병원에 입원하여 인생의 마지막 1년 6개월을 보냈다).
그날 인민의 총리는 얼굴에 밝은 웃음을 지으시고 조선기자들과 오래동안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정경은 지금도 나의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한창희략력】
한창희, 1935년 길림성 도문시 출생.
1953년 중앙군사위원회 군사간부학원 졸업.
중앙인민방송국, 중국국제방송국 편집, 기자 력임.
1980년 《민족문학》잡지사로 전근.
중국작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부비서장 등 력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