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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군보국에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2007년 09월 17일 09:22 【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지난 8월 20일, 《인민에 감사—군영80년 격려》 10대 애국옹군 뉴스인물수상대회가 북경인민대회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였다. 한복차림의 한 조선족어머니가 등장하자 장내는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조선족어머니》가 바로 원 연길시민정국 우대무휼과 과장이고 15차당대회 대표이며 전국옹군모범, 심양군구 우수군인안해인 송순녀이다.

《피 흘린 군인이 눈물까지 흘려서는 안된다》

1970년 7월 9일, 25세의 송순녀는 성도군구 모부 28세의 조선족지도원 리룡우와 결혼했다. 련대를 시름놓지 못한 리룡우는 밀월이 끝나기전에 안해와 작별하고 부대로 돌아갔다.

1971년 6월 22일, 송순녀가 낳은지 한달가량되는 아들애한테 젖을 먹이고있는데 공사 류광은서기가 들어오더니 중앙라지오에서 《리룡우라는 한 부대지도원이 붕락사고중 전우를 구하다가 중상을 입었으며 성도군구에서 그한테 모범공산당원 영예칭호와 함께 1등공을 기입한다》는 내용의 방송을 들었다며 혹시 집사람이 아니냐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송순녀는 낯색이 창백해졌다. 입으로는 《아닐거예요》라고 했지만 입대 8년간 17차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우와 지방군중을 구한적 있는 남편에 대해 잘 알고있는 그녀는 방송의 주인공이 바로 자기 남편일거라고 확신했던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현당위 마서기와 인민무장부 안정위가 성도군구 3명 간부와 함께 집을 찾아와 청천벽력같은 사고소식을 전했다.1971년 1월, 붕락사고중 전우를 구하다가 돌무지에 묻혔는데 흉부 5—12구간 척추뼈가 잘못되고 척수도 손상입었으며 전신마비가 기성사실이라는것이였다.

성도군구의 간부들은 리룡우수상대회에 송순녀를 참가시키고저 데리러 온것이였다.

대회가 있은 그날밤, 리룡우는 송순녀의 손을 잡고 《당신이 20여살밖에 되지 않고 당신의 사업도 있고 하니 나같은 페인을 지키느라 산과부로 있지 말고 장래를 생각해서라도 우리 리혼하자》고 했다.

송순녀는 대뜸 손으로 남편의 입을 막으며 《당신은 련 지도원이고 저는 공사당위 부서기로서 모두 공산당원이예요. 당신이 가장 힘들 때 안해로서 최저의 의무를 리행하지 못하고 어찌 인민을 위해 복무한다고 할수 있나요? 전 절대 자기 량심에 미안한 일을 할수 없어요.》라며 《더는 리혼이라는 말을 꺼내서는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아들이 출생한지 48일후 리룡우는 아이에게 리걸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리룡우가 부상한 소식은 한동안 부모들한테 비밀로 되었지만 매체의 대대적인 선전으로 부모도 사실을 알게 되였다. 비감이 극도에 달한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했고 성격이 불같은 아버지는 침중한 타격에 견디지 못하고 아들의 모습을 보지 못한채 영원히 눈을 감았다. 원래는 단란하고 행복했던 가정이 이렇게 풍지박산났다. 병환에 계시는 시어머니, 아직 성가하지 않은 두 시동생, 게다가 본가집도 돌봐야 하는 송순녀로서는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그래도 송순녀는 이를 악물고 세곳을 달아다니며 버텨나갔다. 남편이 부대병원에 10년 누워있는 기간 성도로 13번 다녀왔으며 1981년 남편의 병세가 안정되자 아예 연길로 데려왔다.

전신마비환자들이 가장 쉽게 걸리는것이 욕창(살이 썩는 현상)이다. 욕창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송순녀는 자주 남편을 목욕시겼다. 대소변을 받아내는것은 제쳐놓고 때로는 대소변을 참지 못해 이불을 적실 때가 많았지만 제때에 갈아빨면서 등한시하지 않았다. 조직에서 송순녀의 로동량을 고려해 전문간호일군을 배치했지만 휴일이나 8시간 이외에는 스스로 해야 했다. 그 과정에 안마와 주사 등 간호기술도 익숙히 했다. 이같은 정성으로 리룡우는 누워있은지 27년간 욕창이 생기지 않았다.

그동안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달리 선택하라고 권고했지만 그녀는 모든것을 귀등으로 흘려보냈다. 그녀는 남편을 보러 온 한 지도일군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공신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딛고 자기의 행복을 추구할수는 없으며 특히는 그를 사회에 떠밀어 맡길수는 없습니다. 누가 와도 저는 이 말뿐입니다. 피를 흘린 그가 눈물까지 흘리게 할수 없습니다. 》

《<군속영광>간판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남편이 상한 이듬해 둘째시동생 리경우가 걸혼해 분가했고 셋째 리철우는 로동자로 되였다. 그때 송순녀는 남편과 상론한 뒤 셋째가 큰형님의 뒤를 잇게 했다.

1972년말, 리철우는 군복을 입었다. 그를 환송하는 자리에서 송순녀는 시동생보고《형님은 공신이예요. 이 영예앞에서 리씨 가문의 사람들은 그를 위해 영예를 떨쳐야지 절대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안돼요》라며 이를 꼭 명심하라고 부탁했다.

입대한 7년동안 리철우는 선후로 감자지역 지진재해구 구조, 성도지역 홍수대처 및 구제 등 임무를 출중히 완수하고 입당하였으며 3등공 5차, 2등공 1차 세웠으며 1978년에는 부련장으로 진급했다.

그런데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한차례 변경작전에서 리철우가 장렬히 희생된것이다. 소식이 전해지자 온가족이 슬픔에 잠겼다. 부대의 초청으로 송순녀는 가족을 대표해 광서로 갔으며 결국 시동생의 골회를 타향에 묻었다. 유물을 정리할때 시동생이 참전전 자기한테 쓴 편지를 발견했는데 편지에는 이렇게 씌여있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형수님, 형수님이 이 편지를 받았을 때는 제가 이미 전선으로 간 뒤였을것입니다…만약 제가 희생된다면 조카 리걸, 리강더러 제뒤를 잇게 하고 저의 막내딸 계홍이가 크면 그도 참군하게 해주세요.》 시동생의 유언대로 연길로 돌아온 그녀는 아들이 큰뒤 삼촌의 뒤를 잇게 했다.

1989년, 리걸은 삼촌의 뒤를 이어 군복을 입었고 1990년 둘째시동생 리경우의 외독자 리강도 군복을 입었다.

1997년, 리걸은 병원으로부터 백혈병으로 진단받았고 2년뒤인 1999년 28세의 젊은 나이에 이 세상과 작별했다. 남편의 부상, 시아버님의 사망, 시동생의 희생…너무나도 많고많은 타격을 받은 그녀로서는 이젠 눈물도 말랐다. 부대의 간부들앞에서 그녀는 《우리 집은 <군속영광>, <렬군속영광> 두 간판을 걸었습니다. 충렬보국의 가풍은 계속 이어질것이며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라고 견정히 말했다.

공헌자를 위해 달갑게 공헌하는 사람

군인의 안해로서 송순녀는 무엇이 군인의 공헌정신인가를 잘 알고있었고 군인의 어머니로서 군인렬사가족의 생활과 정신상의 부담이 얼마나 무거운가를 잘 알고있었다. 군인의 안해, 군인의 어머니로서의 감수가 두두룩한 그녀였기에 군인과 군인가족에 대해 특별한 리해와 존중을 갖게 되였다. 20여년간의 우대무휼사업을 하는 기간 특히 연길시민정국 우대무휼과 과장으로 된후 그녀는 연변의 옹군우속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연길시는 오랜 혁명구역으로서 주둔군단위가 많고 지방우대무휼대상 비률이 높았으며 따라서 군인가족 배치, 자녀입학, 제대군인배치 등 해결할 문제가 많았다. 1990년부터 송순녀는 한 부문의 일군과 함께 연길시 269명 군인가족을 탐방했으며 방법을 강구해 이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었다.

연길시 연집향 려명촌의 렬사유가족 염명숙은 신혼 몇달뒤 남편을 해방전쟁전장에서 잃었고 그녀도 전선지원에서 다리 하나를 잃었다. 70세 고령에 혼자 고독하게 지내는 로인의 사정을 안 송순녀는 로인을 친어머니처럼 대하면서 10년간 로인의 일상을 보살펴왔다. 1985년 정부는 로인한테 새집을 지어드렸는데 이사하는 날 송순녀는 가스통을 메고 찾아갔으며 로인이 불편해한다고 사람을 찾아 둔변기를 좌변기로 고쳐드렸다. 1992년 로인이 사망하자 로인의 후사를 처리했다.

우대무휼사업은 정부 몇 개 부문, 혹은 몇사람에 의거해서는 잘 추진되기 어렵기에 관건고리를 틀어쥐고 정책법규 보장이 있어야 하며 근본적으로 군인의 뒤근심을 덜어주어야 한다. 1992년 연길시는 성공적으로 《전민우대금통일모금》제도를 출범했고 《무휼우대사업 실시방법》을 출범시켰다. 1994년 송순녀는 또 대담히 연길시우대무휼병원을 설립해 우대무휼대상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1995년에는 《정리실업 군인안해 거리》, 《군인안해 매대》를 내와 106명 정리실업 군인안해가 자강자립의 길을 걷게 했다. 1996년, 송순녀는 신안향복원제대군인양식장, 삼도만우대무휼농장, 이란진우대무휼농장 등 실체를 세우고 우대무휼대상들의 취업문제를 해결해주었다.

2007년, 건군 80돐을 맞으며 인민일보, 해방군보, 중국국방보는 공동으로 《인민에 감사—군영80년 격려》 10대 애국옹군뉴스인물평의활동을 펼쳤다. 비록 퇴직한지 오랜 송순녀였지만 그녀의 사적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았으며 40명 후선인 가운데서 뉴스인물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신혼이 얼마 안돼 남편은 전우를 구하다가 전신마비되였지만 당신은 남편을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았고 형제가 총을 잡도록 고무했으며 전장에서 형제를 잃었어도 당신은 여전히 후회없이 또다시 외아들과 조카를 군영에 보냈노라. 다섯 혈육인이 두세대의 군공을 세우게 한 당신! <산마다 진달래요, 촌마다 렬사비>를 보면서 자란 <어머니>, 운명이 휘두르는 비감과 처량함을 떨쳐버리며 <가문충렬>을 머나먼 력사의 그림자가 아닌 오늘날 진실한 감동으로 되게 했노라.》

이는 평의위원회가 송순녀한테 올린 평의감언(评选感言)이였다.

  래원: 연변일보 (편집: 김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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