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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신골이 낳은 걸출한 인재들
◎ 김원범
2007년 09월 26일 16:36 【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시에서 차를 타고 약 40분쯤 가게 되면 룡정시 덕신향에 이른다.

항간에서는 덕신향을 《팔도하자(八道河子)》라고도 부른다. 언제부터인지는 딱히 몰라도 여덟갈래 골짜기에서 흘러내려 한곬으로 흐르는 물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6,200여명의 인구(한족을 포함)에 경작지가 3,700여헥타르 되는 덕신향은 밭농사를 위주로 하는 자그마한 시골 향이다.

우리 조상들이 개척한 이 땅은 살기 좋은 고장이다. 이전부터 조, 옥수수, 콩, 수수 등 곡식이 매우 잘되는 고장이라고 소문이 났다. 특히 콩은 과거에도 대량으로 일본 등 나라에 수출되였고 잎담배는 질이 좋아 중앙급 신문에 보도되였으며 지난 세기 50년대 말 중앙기록영화촬영소에서 기록영화를 찍어 전국에서 방영하기도 했다.

연변에서는 과거나 지금이나 덕신의 채소를 알아준다. 김장철이 되면 도시주민들은 덕신의 고추, 마늘, 감자, 무우 등 채소가 시장에 들어오기 바쁘게 그 채소를 사기 위해 아침부터 서둔다. 연변의 채소시장을 독판치다싶이 하는데 채소수입만 해도 전 향 수입의 20%를 차지한다고 한다.

광복전 비옥한 이 땅우에 우리 조상들은 마을마다 사립학교를 세우고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지극한 열성을 몰부었다. 교원들은 대부분 도쿄나 서울의 명문학교 졸업생들로서 그 수준이 매우 높았다. 광복을 맞아 1945년 9월 석문출신의 유지 림현순의 발기로 사립덕신중학교를 설립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는 기초를 닦았다.

무엇보다 중국의 항일전쟁과 해방전쟁 전후 이 작은 이 시골향에 항일투사와 해방전쟁과 기타 전쟁에 참가한 용사들이 많이 배출되였다. 또한 해방후 고위급 지도자와 군사장령, 교육, 문화, 예술, 과학, 체육 등 분야에 걸쳐 수많은 걸출한 인재가 배출되였다.

이 글에서는 덕신골이 낳은 걸출한 인재들을 간단히 소개하려고 한다.

덕신향은 개산툰과 약 30리 상거해있으며 중조 국경지대에 위치해있다. 일제가 동북을 강점한후 덕신의 백성들은 일제의 심한 억압과 착취를 받아왔다. 덕신사람들은 일제와의 싸움에 앞장섰다. 항일전쟁시기 유명했던 《연길작탄》도 덕신의 금곡골에서 처음 만들어졌으며 가짜 관속에 총과 폭발물을 감추고 남양경찰소를 습격한 항일투사들의 용맹하고 슬기로운 전설도 바로 덕신골에서 나왔다.

1974년 11월 말, 필자는 평양에 한달간 체류하는 기간 그 당시 조선로동당 중앙정치국 위원이며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국장으로 있던 한익수상장(덕신 룡암촌 출신)의 저택에서 한익수장군으로부터 항일투사들의 무용담을 밤새도록 들었다. 그때를 회억하면서 한익수장군은 《금곡, 자동(개산툰), 룡암 등 곳에서 항일투사들이 많이 싸웠다. 자그마한 산골 팔도하자에 항일투사들이 제일 많았다. 지금 살아있는 항일간부들 가운데 덕신출신의 고위급 지도자들이 적지 않다》고 말하였다.

필자가 룡정시민정국을 통해 알아본데 의하면 룡정시 렬사 725명 가운데 덕신출신의 렬사가 97명, 참전용사가 274명이 넘는것으로 밝혀졌다. 이밖에 중국과 조선, 한국 정계의 고위급 지도간부와 군사장령 10여명이 배출되였다.

덕신골에는 고위급 지도자와 군사장령이 많이 배출되였을뿐만 아니라 교육분야에서도 많은 교수와 박사들이 배출되였다. 연변대학에만 해도 교수 10명, 연변농학원과 연변의학원에도 7명이나 있다. 초보적인 조사수치에 의하더라도 약 100명 가량 된다. 아래에 그중 몇사람을 소개한다.

연변농학원 리종철교수는 1931년 생으로 연변대학 농학원 제1회 졸업생이다. 대학 졸업후 그는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줄곧 토양학연구에 정진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1982년부터 1992년까지 전국 제6기, 7기 전국인민대표로 활약하였으며 1994년 정년퇴직후에는 농민들을 위해 농작물성장에 유리한 비료를 만들어 공급하였다.

대련리공대학교 송학산교수는 1943년 12월 덕신 숭민촌에서 출생했다. 그는 연변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후 공주령시에서 교편을 잡다가 동북사범대학 연구생시험에 합격했으며 1978년 국가의 파견으로 일본 히로시마대학에 가서 석사학위를 받고 또 오사까대학교 박사과정을 마친후 귀국하였다. 지금 대련리공대학에서 교수, 박사연구생 지도교수로 교육사업에 정진하고있다.

일본 히로시마국제대학교 리명교수는 1964년 11월 덕신 장동촌에서 출생했다. 그는 룡정2중을 나온후 천진대학 건축학부에 진학해 본과와 석사과정을 마친후 청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후 일본 히로시마국제대학의 초청되여 현재 이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덕신향에는 문화, 예술 등 분야에서 배출된 걸출한 인재들도 많다. 소설가 림원춘은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있다. 덕신 안방촌 출신인 그는 연변대학을 졸업한후 소설창작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중에서 독자들한테 가장 인기가 높았던 《몽당치마》는 전국 단편소설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사람들이 애창하는 《백산의 붉은 꽃》, 《수양버들》 등 노래의 작곡가 허원식선생은 덕신 숭민촌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심양음악학원을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다가 연변가무단의 초청으로 연변가무단에 전근하여 수십년간 대중들이 즐겨 부르는 대중가요를 많이 창작하였다.

덕신향에는 과학자들과 로력모범도 적지 않게 배출되였다. 우리 나라 첫 인공위성 발사실험 성공에 크게 기여한 분이 있는데 그가 바로 덕신 석문촌 출신의 김민달연구원이다. 그는 어려서 공부를 잘해 소학교 때는 1학년에서 3 학년으로 올라가 소학교를 4년밖에 다니지 않다. 1965년 길림대학 수학학부를 졸업하고 상해우주비행연구센터에 배치받아 인공위성발사실험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인공위성발사실험이 기본적으로 완성되여가고있을 때《문화혁명》이 터졌다. 그는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리워 1968년에 감옥에 들어갔다. 그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후 등소평동지의 지시에 따라 1975년에 석방되였지만 등소평이 다시 《4인무리》의 박해를 받아 물러나자 그는 또다시 감옥에 들어갔다. 《문화혁명》이 끝난후 1978년에 석방되였는데 10년간의 감옥살이에서 이루 말할수 없는 박해를 받았다. 그가 석방되였을 때 량친은 아들의 해방된 소식도 알지 못하고 고인이 되였다.

감옥에서 나온후 상해우주비행연구센터에 다시 복직한 그는 기상관측위성인 《풍운1호》, 《풍운2호》의 설계, 연구, 제작, 발사사업에 참가해 중국의 우주비행기술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거의 40세가 돼서 결혼한 그는 1995년에 퇴직하였다. 퇴직한후에도 나라의 개혁개방을 위해 상해에 한국의 현대그룹, 포항제철, 대만의 기업 등 기업들을 유치하는데 큰 역할을 함으로써 국가의 표창을 받았다.

《미사일전문가》로 불리우는 김수복연구원은 덕신 룡암촌 출신이다. 그는 룡암소학교를 마친후 왕복 30리 되는 길을 통학으로 덕신중학교를 졸업하고 룡정2중을 거쳐 북경리공대학 미사일학부에 추천되였다. 5년간의 대학생활에서 공부를 잘해 1963년에 직접 중국항천부에 배치받았다. 42년간 줄곧 우리 나라 우주비행연구에 크게 기여해 중국과학기술진보 특등상, 국방과학기술상, 항천계통 과학기술상을 수상했으며 《중국우주항공협회》, 《항천보고》등 잡지에 우주비행기술 등에 관한 론문 수십편을 발표하였다.

주지연고급공정사 역시 덕신 룡암촌에서 출신이다. 그는 고중을 마친후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다니지 못하고 독학으로 대학학력을 가졌다. 재능이 뛰여나고 물리연구에 이름을 날리게 되자 중국과학원 물리연구중심에 전근하여 수십년간 우리 나라 물리공간연구에 공헌하였다. 고급공정사의 직함을 가진 그는 퇴직후 북경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역시 룡암촌 출신인 김용환총공정사는 덕신중학교를 마친후 연변3고중(지금의 연변2중)을 거쳐 장춘광학기계학원에 진학하였다. 5년간의 대학생활을 마친후 미사일 연구와 발사실험 전문기관인 해방군 제2포병부대에 배치받아 서안에서 오래동안 미사일 연구와 발사실험을 해왔다. 후에는 천진에 있는 항천부에 전근되여 총공정사로 있다가 정년퇴직했다.

전국 우전계통의 《로동모범》리호천이라면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물론 젊은이들도 적지 않게 잘 알고 있을것이다. 덕신 우동촌 출신인 그는 1951년부터 산촌의 우편배달원원으로 되여 매일 《연변일보》를 비롯한 신문, 잡지와 기타 우편물 100여근씩 지고 하루 120여리 길을 걸어 시골 농민들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는 장장 32년간 수만리길에 보람찬 발자취를 남겼다.

리호천은 모택동, 류소기, 주은래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접견을 수십번 받았으며 40여개 나라와 지구 기자들의 취재를 받았다. 공화국창건 10주년 때는 중앙기록영화에까지 소개되였다. 리호천의 업적을 모델로 우리 나라 우전계통에서 처음으로 영화 《기러기》를 제작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리운비 배역은 저명한 영화배우 류세룡(刘世龙, 예술영화 《영웅 아들딸》에서 왕성(王成)역을 맡은 사람)이 맡았다. 류세룡은 이 영화를 찍기 위해 덕신에 와서 리호천과 함께 3개월 남짓이 생활체험을 하였다.

덕신향에는 축구인재도 많이 배출되였다. 덕신향 장동촌은 중국조선족 축구의 발원지라고도 할수 있다. 《중국조선민족사》에 따르면 중국의 조선족축구는 1905년부터 조선 애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간도성(지금의 연변)을 중심으로 각 지방들에서 차츰 보급되였다고 한다. 관련 사료에 따르면 1910년 단오절에 처음으로 장동소학교와 명동소학교가 대항경기를 진행하였는데 이것이 연변에서 처음으로 되는 축구경기라고 한다. 민국 년간에 팔도하자(덕신향) 에서 운동대회가 많이 열렸는데 그때 장동팀과 남양팀이 그 당시 축구판을 독판치다싶이 했다고 한다.

장동촌과 남양촌의 축구전통을 이어 광복전과 해방후에도 덕신향의 축구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우수한 축구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였다. 지난 세기 60년대 초 《민족화보》에서는 조선족 축구발원지인 덕신향의 축구 경기장면들을 특별히 소개하였다. 그럼 아래에 덕신향의 걸출한 축구인재를 몇사람 소개한다.

덕신 남양촌 출신인 박주환과 박익환 두형제는 뽈을 잘 차서 《간도성》과 《만주국》 축구무대를 휩쓸었다. 두형제는 모두 《간도성팀》과 《만주구팀》 선수로 활약했다. 동생 박익환이 형보다 뽈을 더 잘 차서 《만주국》과 조선반도 그리고 일본에까지 그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1937년 말, 박익환은 유명한 프로선수로 되려는 큰 뜻을 품고 조선으로 나갔다. 한국 일간스포츠 1978년 9월 23일자 스포츠일화 2446호는 《간도성》과 일본 전역에 이름을 떨친 박익환이 고려대학을 다닐 때인 1940년에 일본축구대회에 학교팀선수로 출전하여 일본 간사이학원팀을 꺾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적고있다. 한국 일간스포츠 1979년 5월 12일자 스포츠일화 2542 호는 당대에서 가장 뛰여난 하프로 민병대와 박익환을 꼽았다. 또 박익환은 간도에서 어렵게 자랐으나 몸집이 크고 건장했으며 남달리 운동신경이 예민하여 아세아에 그 명성을 떨쳤기에 연전(연세대학의 전신)이 스카우트하여 중요한 자리를 맡겼다고 했다.

덕신 남양촌 출신인 최태환과 최증석 두형제는지난 세기 40년대와 50년대 중국 축구무대를 주름잡은 프로선수였다. 두형제는 모두 동북팀과 국가팀에서 활약했고 국가체육운동위원회 로부터 《국가건장》칭호를 수여받았다. 건국이래 자그마한 시골마을에서 축구건장이 두명이나 나오고 그것도 형제가 나란히 그런 칭호를 받았다는것은 보기 드문 일이였다.

동생 최증석은 중국 제1대 국가팀선수로 선발된후 하룡원수의 지시로 웽그리아에 파견되여 축구기술을 배웠다. 국가팀의 공격수로 최증석이 쌓은 업적을 기려 수십년이 지난 1981년 10월 3일 《체육보》는 글을 실어 그를 극찬하기도 하였다.

남양소학교와 덕신중학시절부터 축구로 유명했던 최호균선수도 중국 제1대 국가팀 공격수로 역시 웽그리아에 가서 배우고 돌아와 중국 축구무대에서 활약하다가 50년대 말 조선에 나가 《2․8》팀과 조선국가팀에서 이름을 떨쳤다.

덕산 금곡촌 출신인 손중천은 길림성팀에서 《분사식비행기》라는 별명을 갖고 중국 축구무대에서 소문난 축구명장이다. 속도가 빠른 손중천은 길림성팀과 국가팀에서 꼴을 제일 많이 넣어 명성을 떨쳤다. 손중천은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11회 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1등을 한 손기정의 6촌 동생이기도 하였다. 《국가건장》칭호를 받은 손중천은 지난 세기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중반까지 길림성팀과 국가팀을 위해 크게 공헌한 축구명장이다.

2004년에 조선에서는 《조선의 어제와 오늘의 축구》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는 《허죽산(1925~1949)은 중국 길림성 연길현 태생으로 〈기계다리〉라는 별호를 달고 세계축구왕 벨리 못지 않게 뽈을 잘 찼다》고 하였다. 또 《그는 마치 〈곡예단배우〉처럼 공을 잘 다뤘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허죽산은 덕신 영동촌 출신이였다. 그리고 한 때 연길현팀과 연변팀에서 프로선수로 있은 김문선수는 덕신 남양촌 출신으로 축구선수에서 물러난후 축구교원으로 후대양성에 진력했는데 축구원로와 축구계의 교수들은 김문선수를 높이 평가하였다.

19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길림성팀의 꼴문을 철벽같이 지켜선 유명한 꼴키퍼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박장수축구건장이였다. 1936년 5월 덕신 중성골에서 태여난 그는 1955년에 길림성팀이 설립된후 10년 동안 길림성팀의 꼴문을 잘 지켜 당시 국무원 부총리이며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이였던 하룡원수까지 그를 《철문과 같다》며 극찬했다. 조선족들로 무어진 길림성팀은 1965년에 중국 축구무대에서 1등이란 월계관을 차지했고 1958, 1960, 1962년 세번에 걸쳐 4 등이란 영예를 따냈다. 그가운데는 축구명장 박장수의 피타는 노력과 공헌이 컸다.

덕신향에는 해방전에도 축구명장 여럿이 배출되였고 건국후에는 《축구건장》 4명이 배출되였다. 중국에서 축구인재가 가장 많이 배출된 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래원: 중국민족 (편집: 김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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