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적수기념관에 소장된 서신 일부(사도적수기념관 사진 제공).
“관영아, 네가 나를 대신해 귀주의 장지현(90원), 원성안(60원) 두 집안의 자손에게 돈을 부쳐다오. 꼭 나를 도와주렴.”
이는 복건출신의 로홍군 황만선이 림종을 앞두고 맏아들 황관영에게 쓴 유언이다. 그는 평생 모은 돈 150원을 아들에게 부탁하며 사도적수(四渡赤水)전투 당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구해주고 치료해준 두 은인에게 반드시 부쳐달라고 당부했다.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는 24년의 세월을 뛰여넘은 10통의 서신으로 응결되여 사도적수기념관에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홍색 증언으로 되였다.
얼마전, 제3회 새 시대 청년 ‘장정의 길 다시 걷기’ 행사가 귀주 준의에서 개최되였다. 전국 각지에서 온 청년대표와 로홍군 후대 등 300여명이 사도적수기념관을 찾았다. 앞서 청강파전투유적지로 가서 온 산에 가득한 푸른 소나무와 렬사묘비를 둘러보았던 사람들은 이 시각 진렬장 앞에 서서 누렇게 바랜 서신 사진들에 단번에 시선을 빼앗겼다.
1935년 1월 준의회의 이후, 중앙홍군은 세갈래로 나뉘여 습수(习水)에 진입한 후 토성과 적수 방향으로 진격하여 북으로 장강을 건너 홍4방면군과 합류할 계획이였다. 그러나 국민당이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켜 토성으로 압박해 들어왔다.
1월 28일, 중앙홍군 주력은 토성 청강파에서 적군과 격전을 펼쳤으나 획득한 정보에 착오가 생겨 쌍방은 대치상태를 형성했다. 전투가 진행되는 도중 중앙은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모택동의 의견에 따라 원정계획을 과감히 개변하여 즉시 전투에서 철수해 서쪽으로 적수하를 건너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사도적수의 서막이 열리게 되였다.
청강파전투 중 황만선은 쇄골에 총탄을 맞고 어느 풀더미 옆에서 혼절해 쓰러졌는데 이 풀더미의 주인이 바로 현지 촌민 장선안이였다.
이튿날 이른 아침, 숨이 꺼져가는 황만선을 발견한 장선안은 즉시 아들 장지현을 불러 그를 집으로 옮겨 응급치료를 했다. 당시 검북에는 백색공포가 뒤덮여있었다. 민단(民团) 우두머리는 소식을 듣고마자 장씨네 집으로 뛰쳐들어와 황만선을 살해하려 했다. 위급한 시각, 장지현과 10여명의 마을사람들이 용감히 나서서 결사적으로 가로막은 덕분에 황만선은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수색을 피하기 위해 장지현은 황만선을 등에 업고 산에 올라 그를 빈 무덤 속에 숨긴 뒤 매일 몰래 밥과 약을 날라주었다. 황만선의 상처가 반복적으로 염증을 일으키자 그가 하루빨리 회복되게 하기 위해 장지현은 의술을 아는 외삼촌 원성안의 집으로 그를 옮겨 계속 치료받게 했다.
1936년 초, 황만선의 총상이 완쾌되였다. 장지현 일가족이 로자를 조금 모아주었고 황만선은 천신만고 끝에 최종적으로 복건 무평의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예전에 교과서에서 ‘군민어수정(军民鱼水情, 물과 물고기 같은 군민의 정)’을 읽을 때는 그저 다섯글자로만 여겨졌는데 오늘 이곳에 서서 이 서신들을 보고 나니 비로소 무엇을 두고 ‘목숨을 맞바꾼 신임’이라고 하는지 알게 되였습니다.” 기념관 안에서 해설을 듣고 난 화중과학기술대학 경제학원 석사연구생 곽기영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목숨을 구해준 은혜는 일생토록 명기하는 법이다. 황만선은 여러차례 서신을 보내 감사를 표했지만 주소가 모호하여 편지들은 바다에 돌을 던진 격으로 감감무소식이였다. 1965년, 30년의 세월이 흘러 황만선은 마침내 정확한 주소를 수소문해 알아냈고 뒤늦은 첫 감사편지를 부쳤다.
장지현의 아들 장덕고는 아버지가 편지를 받고 감격해 마지않았으며 다년간 중단되였던 정분이 이로써 이어지게 되였다고 회고했다.
“홍군전사인 나 하나를 살려내기 위해 자신의 생사안위를 안중에 두지 않았고 칼산에도 오르고 불바다에도 뛰여들 기세였습니다. 나를 위해 적에게 체포되고 련좌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엄동설한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사방으로 약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세끼 식사와 다과를 챙겨주고 상처를 씻어주던 그 지극한 정성은 피를 나눈 친혈육보다도 더 깊고 극진했습니다…” 1967년 5월 25일 장지현에게 쓴 서신에서 황만선은 당시의 정경을 이렇게 회고했다.
1985년과 1991년, 장지현과 황만선은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선친께서 전투 중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선배님들의 구호가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비로소 우리 세대도 있게 되였으니 이는 우리 일가족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버지의 당부를 명기하고 황관영은 장씨네 집안과 서신래왕을 이어갔다.
2019년, 장덕고는 황만선과 그의 후대가 할아버지 장선안, 아버지 장지현 그리고 자신에게 보낸 10통의 서신을 사도적수기념관에 기증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력사를 료해할 수 있도록 했다.
“24년에 걸친 이 10통의 편지를 집에 두면 그저 가족의 일에 불과하지만 전람홀에 진렬해두면 당시 토성의 백성들과 홍군이 생사를 같이하는 정분을 나누었음을 보여주는 증언이 됩니다.” 서신을 기증한 후 장덕고는 가족들과 함께 기념관을 찾군 한다. 관광객들이 그 리면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료해하는 모습을 볼 때면 그는 마음이 각별히 든든하고 뿌듯하다.
사도적수기념관이 학교 진입, 사회구역 진입, 기업 진입, 군영 진입 등 행사를 륙속 전개함에 따라 10통의 서신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방식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다.